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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인간을 외면하는가?교회와 휴머니즘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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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8월 05일 (금) 00:51:49
최종편집 : 2016년 09월 07일 (수) 22:28:59 [조회수 : 1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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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시대 이래로 교회에서는 문화의 중심지인 아테네와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은 상종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인간 혹은 인간의 문화를 외면해 왔다. 종교개혁자들이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들의 신학은 여전히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거나 인간의 무능을 강조함으로써 여전히 인간을 외면했다. 그래서 중세의 교회를 계승하는 가톨릭에서도, 개혁자들의 신학을 따르는 개신교에서도 오랫동안 인간을 외면해 왔다. 그러나 교회가 인간을 외면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전통이나 보수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이 옛 신학을 고집하지만, 실상 성경에서는 인간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세교회에서 그리고 개혁자들이 인간을 외면한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말할 수 없다. 특히 신약에 오면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 모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님이야 말로 기독교 휴머니즘의 원조다.

종교개혁자들이 활동하던 르네상스기에 신앙과 인문주의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기독교 휴머니스트들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과 능력이 중시되는 현대 문화 안에 살고 있는 신학자들은 현대의 상황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에 인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신학은 영원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물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 신학도 바뀌게 되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강조되는 현대에 와서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형성된 신학에 매달리면서 인간을 외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성경에 나타난 인간에 대한 관심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마지막에 지으셨을 뿐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인간이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또한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닮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실 뿐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이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대행자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땅에 충만하라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는 모든 식물과 동물을 먹도록 허락하셨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을 지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에게 순종하고 섬기기를 원하셨지만, 일면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십계명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십계명에서 보면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섬길 것, 우상을 만들지 말 것,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 것, 그리고 하나님이 쉬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하고 있다. 이 네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관한 계명들이다. 그러나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인간에 관한 계명들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살인하지 말라는, 간음하지 말라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계명과 인간을 사랑하는 계명이 대립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복 주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지으시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과 인간존중의 균형이 신구약 성경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신앙인들은 흔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치중한 나머지 인간 사랑을 외면한다. 그것이 중세교회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 결과 문예부흥을 통해서 인간을 중시하자는 휴머니즘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예수님은 고르반 전통의 비판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하나님 사랑에 치우친 나머지 인간 사랑을 외면하는 것을 지적하셨다(막 7:10-13). 모세는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주었지만, 유대인들은 부모에게 드릴 것까지 하나님에게 드리면 부모에게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인간은 외면해도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기독교에서 하나님 사랑에만 치중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하나님이 세상을, 다시 말해서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사랑은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희생양 삼으실 정도로 지극한 사랑이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하나님 사랑에 몰두한 나머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모두 중시하셨다. 마가복음 12장에서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에게 나와서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묻지 않은 둘째까지 알려주셨다. 예수님이 둘째 계명을 언급하신 것은 서기관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서기관이 첫째만을 물었다는 데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르반 전통을 비판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당시 유대인들이 등한시했던 이웃에 대한 사랑의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균형을 강조하셨다. 마태복음 22장에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40)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균형이다. 이렇게 양면을 모두 중시하신 예수님의 태도에 주목한 역사학자들은 신본주의적인 헤브라이즘과 인본주의적인 헬레니즘을 예수님이 종합했다고 말한다. 역사학자들의 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오셨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셨고, 인간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은 분명히 휴머니스트였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기독교 휴머니즘의 창시자임에 틀림없다.


문예부흥기의 기독교 휴머니스트들

문예부흥기에 기독교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토마스 모어와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를 들 수 있다. 모어는 15세에 옥스퍼드에서 수사학과 논리학을 공부했지만, 그가 인문학에 눈 뜬 것은 런던 법학원에 들어간 후부터였다. 그가 거기서 읽은 키케로는 정치인으로서의 모어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헨리 8세의 스승이 된 존 홀트와 희랍어의 대가였던 윌리엄 그로신을 통해서 그는 인문학에 몰입했다. 그리고 모어의 인문학적 소양은 당대를 대표하는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를 만난 시점을 전후해서 급성장했다. 이어 존 콜렛을 비롯한 기독교 휴머니스트들 사이에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행동하는 신앙인이었으며 인문주의자였다. 법조인으로 출발한 그는 의회에 진출하여 하원의 의장이 되었고, 헨리 8세 치하에서 대법관이 되고 기사작위를 받았다. 모어는 무엇보다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종교개혁을 반대한 가톨릭으로서 『반 루터론』과 『이단에 대한 대화』를 썼다. 특히 그의 대표작 『유토피아』에서 기독교 휴머니스트로서의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리고 헨리 8세가 주도한 국교회를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결국 사형 당했는데, 1935년에 로마 교황은 가톨릭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건 그에게 성인의 칭호를 주었다.

에라스무스는 르네상스 시기의 최대의 인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 휴머니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들 중의 하나며 기독교 휴머니즘의 전범이었다. 문법학교와 수도원에서 라틴 고전학과 신학을 공부한 그는 21살 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특히 그리스 문화를 숭배하는 영국 휴머니스트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고전과 그리스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여 당대 최고의 그리스 문헌학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고전에 담긴 자유로운 인간적 이상과 기독교의 융합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 과업은 그리스 및 라틴 고전과 기독교 문헌의 번역과 편집 작업이었다. 그는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책들을 편찬하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대역 성경 번역서를 냈고, 라틴 고전과 그리스 고전에서 인용한 격언들을 모아 『격언집』을 펴냈다. 그리고 토마스 모어의 집에 머물면서 쓴 『우신예찬』에서 권위주의에 빠진 교회를 비판하고 직업적인 성직자들의 부패상을 드러내면서 교회개혁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복음에 대한 확신,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기쁨, 교회의 개혁을 귀중하게 여겼던 성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동시에 그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특징인 고전주의,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인간 능력의 계발을 믿은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인문학을 외면하는 신학자들과 신앙을 외면하는 인문주의자들이 중요한 반쪽을 외면하고 있다고 보았다. 에라스무스는 신앙과 인문학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 다시 말해서 신과 인간 어느 하나도 외면하지 않고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당연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에라스무스 시대에 종교계에서 인간을 외면하고 신의 절대권을 주장한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신구교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과 박해가 일어났다. 신에 대한 충성이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게 만들고 종교간의 전쟁 혹은 교파간의 전쟁이나 갈등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이 살상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인명을 살상하는 끔찍한 테러가 여기저기서 자행되고 있다. 종교는 신을 위한 것인가, 인간을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신과 인간 모두를 위한 것인가? 신을 위해서 인간을 외면할 때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역사를 통해서 드러났다.


현대의 기독교 휴머니스트들

현대에 와서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인간의 지식과 노력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우주 공간에 우주정거장을 마련하고 사람들이 그 우주정거장과 지구를 오가면서 연구하고 있다. 지난 번 뉴스에서는 5년 전에 쏘아올린 목성 탐사선이 최근 목성의 괘도에 진입해서 목성 탄생의 신비에 관한 탐사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생물학에서는 전자생물학의 발달로 인해서 유전인자에 관한 연구, 뇌 과학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인들도 인간의 능력과 성취를 중시하는 현대의 문화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회가 현대의 지식을 외면하고 중세로 돌아갈 수는 없다. 현대의 천문학이나 지질학적 지식을 외면할 수도 없다. 지하철에서 보면 모두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대에 정보통신이 발달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건강을 위한 음식이나 운동에 매달리면서 인생 100세를 노래하는 때에 교인들도 지상생활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지식과 성취가 주목을 받는 이 시대에 교회에서 인간은 무능한 존재라거나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현대인이 수긍할 수 있는 말로 하나님과 인간에 관해서 말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죽은 후에 가는 천국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이 지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한다. 그들은 초월해 계실 뿐 아니라 인간 삶 안에서 역사하시는 내재적인 하나님을 믿는다. 교부시대부터 문학을 외면하던 신학자들이 20세기에 인간의 경험을 다루는 문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정치적인, 사회적인, 과학적인 여러 가지 상황 안에서 인간을 위해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학자들은 현대의 인문학적 지식이나 과학을 외면하지 않는다. 해방신학자들은 남아메리카의 정치적 상황에서 소외된 자들을 돌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여성신학자들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생태신학자들은 환경오염으로 인해서 죽어가는 자연을 구해야 하는 사명이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믿는다. 그들은 현대의 기독교 휴머니스트들이다.

 

마치면서

기독교는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고 그 두 가지 원리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슈바이처가 지적한 대로, 기독교는 처음에 말세를 기대했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동시에 능동적인 윤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원시 기독교에서는 종말에 대한 기대로 인해서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문예부흥을 거치면서 계몽주의자들의 영향 아래 교회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바꾸었다. 생명에 대한 긍정과 함께 기독교는 세상을 위해 일하고 문명을 창조할 수 있는 종교로 변했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의 변화와 더불어 성경을 읽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임박한 종말이 누가복음에서는 지연된 종말로 바뀌고 그 후에 종말이 아주 먼 앞날의 것으로 인식되면서 교회는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만큼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게 되었고, 우리가 세상이나 인간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 사이의 균형을 중시하게 되었다. 원시 기독교에서는 오직 천국과 하나님만을 강조하고 세상과 인간을 외면했지만, 문예부흥기를 지나면서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가는 하나님 나라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아직도 고르반 전통을 지키던 유대교인들처럼 하나님 사랑에 치중하면서 인간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 사랑만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다. 십계명의 열 가지 계명 중에서 절반이 넘는 여섯 가지가 인간에 관한 계명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에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신구약의 기반이다. 따라서 하나님 사랑에 치우치면서 인간을 외면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을 외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인간을 외면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능력과 지혜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이해하고  사랑한 기독교 휴머니스트들에게서 그들이 깨달은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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