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이나 안건을 정식으로 작성하기에 앞서 처음으로 잡아본 생각이나 안건을 초안이라고 한다. 이 초안의 뜻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애벌로 안(案)을 잡음. 또는 그 안. ‘첫 안’으로 순화.” 첫 안이기도 하니까 사람들은 보통 초안 속에 들어있는 한자 ‘초’는 당연히 처음 초(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초안에 들어있는 ‘초’는 처음 초가 아니라 뜻밖에도 풀 초(草)다. 그러니까 초안은 처음의 안이 아니라 풀의 안, 즉 풀처럼 흔들리는 안이라는 뜻인 셈이다. 결국 초안이 처음의 안을 뜻하는 것임은 분명하나 초안(草案)이라는 말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안(案)이 처음의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풀처럼 흔들린다는 사실인 셈이다. 첨언하자면 초벌로 쓴 원고를 뜻하는 초고(草藁) 역시 풀 초(草)를 사용한다.

초안(草案). 첫 안으로서의 풀 같은 생각. 이 한자어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처음의 것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거야. 그러니 시작을 너무 겁먹지 마. 처음에 완전한 것을 해내야 한다거나, 처음부터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버려. 처음은 언제나 풀처럼 흔들리는 것이니까.”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게 될 때, 그리고 그것이 중요한 것일수록 우리는 시작에 큰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한 번도 해보지 못 했다는 사실에 대한 걱정, 잘 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자신감의 결여, 실패에 대한 두려움, 보란 듯 멋지게 시작해보고 싶다는 욕심, 예를 들자면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 처음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초안의 한자가 보여주듯 초안은 언제나 풀과 같이 흔들리는 것이다. 처음은 언제나 풀처럼 이리저리 흔들려도 괜찮다는 생각만 해도 우리의 모든 시작은 한결 수월하고 편해지지 않을까?

시작이 반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처음에 관한 익숙한 속담들이다. 처음이 가장 중요하고, 이 처음이 잘못되면 결국에는 낭패를 본다는 생각에 익숙한 우리는 처음에 대해 너무 진중하고 심각하게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이 중요하다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경우에 따라 시작과 처음을 좀 더 편안하고 느슨하게 생각할 필요도 있다. 이것은 신앙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처음을 선사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처음을 잘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지나치게 신중하기보다는, 오히려 좀 더 담대하고 적극적으로 시작에 임할 필요가 있다. “실패하면 어때, 어차피 하나님은 또 다른 처음을 선사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런 종류의 신뢰와 담대함일지도 모른다. 걱정, 근심, 두려움으로 시작조차 못 한 사람의 예를 우리는 하나 알고 있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마 25:24-25) 우리는 그의 말로 또한 잘 알고 있다. 초안(草案). 어차피 처음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마음껏 흔들리며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