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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빛을 잃을 때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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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6월 05일 (일) 23:56:30
최종편집 : 2016년 06월 08일 (수) 21:03:24 [조회수 : 7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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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중편소설집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면서 많은 화제를 낳고 있다. 대중들의 시선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던 한국 소설의 활로가 열릴지도 모른다며 성급한 기대감을 표출하는 이들도 있다. 잠재력 있는 작가들의 이름이 호명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 수상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한강의 소설을 번역한 데보러 스미스이다. 한국어를 공부한지 겨우 6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그는 정교한 어휘 선택과 구문 변화를 통해 작품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출발어에 집중하는 원문주의나 도착어에 집중하는 과잉번역의 한계를 넘어서서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번역자는 이질적인 두 언어 사이를 오가면서 가장 적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고심한다. 적절한 단어 하나가 구문의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단어를 찾지 못했을 때 작가가 전달하려는 의미는 두루뭉실하게 변하고 만다.

데보러 스미스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줌파 라히리가 떠올랐다. 벵골 출신 런던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축복받은 집>, <이름 뒤에 숨은 사랑>, <그저 좋은 사람> 등의 작품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그는 자기가 글을 쓰는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한다. 존재의 신비를 탐구하고, 자기 자신을 견뎌내고, 자기 밖에 있는 모든 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함이 그것이다. 영어는 그런 글쓰기를 위한 유용한 수단이지만 너무나 익숙하기에 가끔은 작가를 타성에 빠뜨리기도 했다. 줌파 라히리는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낯설고도 매혹적인 다른 언어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탈리아어 공부를 시작한다. 어휘와 용례를 하나하나 익혀나가는 과정을 통해 그는 살아 있음의 희열을 느낀다. 이탈리아어는 그에게 완벽함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불완전할 자유를 주었던 것이다.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를 익히고 그 낯선 언어로 글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라는 책 속에 담아냈다.

그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거기에 빠져드는 것을 호수를 건너는 일에 빗대 설명한다. 호수 가장자리만 빙빙 돌며 헤엄을 치면 결코 건너편에 당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명대 없이 기슭을 떠나 호수를 가로지르는 용기를 내야 한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심연은 더욱 큰 공포가 되어 우리 삶을 잡아당기지 않던가. 줌파 라히리는 익숙한 언어를 잠시 떠나 낯선 언어 속으로 들어갔다. 익숙하지 않았기에 언어 선택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사물과 세상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었다. 낯선 언어,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투성 속에 갇히기 쉬운 삶을 긴장 속으로 밀어넣는 일이다.

성경은 온통 '떠나라'는 명령으로 가득 차 있다.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은 친족들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던 고향을 떠나 낯선 세계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낯선 세계는 언제라도 증오의 표적이 될 수 있는 곳이다. 세상은 내부에 응축된 폭력의 충동을 해소시키기 위해 공통의 적을 만들곤 한다. 어느 시대든 외부자들은 그러한 증오의 표적이 되기 쉽다. 언어, 피부색, 종교, 습속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취약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쩌자고 하나님은 택하신 이들에게 익숙한 땅을 떠나라 하시는 것일까?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을 환대의 공간으로 바꾸라는 뜻이 아닐까? 떠남은 특정한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떠남은 타성에 젖은 생각이나 입장,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버릇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며칠 전 이 땅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중국 교포로부터 자기들의 이질적인 억양 때문에 자녀들이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싶어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차이가 쉽게 차별로 환치되는 사회, 동일화의 폭력이 암암리에 작동하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이다.

신앙은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종교적 앎은 교만으로 귀착되거나 타자에 대한 배타성으로 변하곤 한다. 고백과 삶의 분리 혹은 부조화로 인해 가장 아름다워야 할 종교가 세상의 추문거리가 되고 있다. 굴타리먹은 과일처럼 종교가 혐오에 잠식되거나 살천스럽게 변할 때 세상의 어둠은 더욱 짙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장벽을 허무는 것이 종교의 본령이다. 장벽 저 너머에서 발화된 메시지를 알아듣고 반응하기 위해서는 낯선 언어를 익히는 것과 같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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