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들아, 상전에게 복종하라'

얼마전 어느 자리에서 설교를 했다. 설교 제목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노동이사제>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칭의稱義의 관계적 의미를 먼저 부각시켰다. 전통적으로 개신교회에서 일방적으로 강조해온 칭의의 법정적 의미가 아니라 관계적 의미를 지금은 강조하며 새롭게 은혜받아야 할 때임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관계인 '자본과 노동자와의 관계'를 언급하고, 기업경영에 노동자의 참여 필요성을 말했다.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그 참여를 제도화하는 '노동이사제'를 최근 국내에선 처음으로 서울시가 도입하기로 한 점을 나는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 제도의 내실화를 위해 노동이사제의 이사로 노동자가 절반은 들어가야 된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기업경영에서 자본을 대표하는 주주이사와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동이사가 동수로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노동이사가 되면 노조에서 탈퇴해야하는 현행 노동법의 개정이 필요함을 아울러 주장했다.(그날 설교의 요지를 담은 칼럼이 당당뉴스에 실린 바 있다.2016.5.23)

설교가 끝난 뒤 여러 반응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반응들 가운데 인상 깊은 것이 하나 있다.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40대 남자의 반응이다. 그는 소위 모태신자였고 중소기업체에 다니는 노동자였다. 그는 성경 구절을 대며 나에게 항변했다. 그가 댄 구절은 에베소서였다.

"종들아, 상전에게 복종하라."(엡6:5)

상전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이 성경에 분명히 있는데 , 왜 노동자를 선동하느냐는 식의 논리를 그는 폈다. 그는 순종도 아니고 복종이라는 단어를 굳이 써 가며 그리 했다. 노동자가 왜 기업경영에까지 참여하는가? 회사나 사장이 시키는대로 인내하며 순종함으로써 일터의 평화를 유지하는 게 하나님의 뜻 아닌가? 노동자가 회사 경영에까지 참여해 노사분규와 사회혼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는가, 하고  그는 물었다. 긴 얘기를 할 상황이 아니라 '더 연구해 보자'며 헤어지고 말았지만 마음이 씁쓸했다. 그래서 이 지면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먼저 '종들아, 상전에게 순종하라'는 표현이 들어있는 에베소서 6장의 문단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  문단이 말하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보자.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 6:5-9)

이 본문이 들려주는 가르침 중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 2가지가  있다.

1. 종과 상전의 동등성

바울 서신은 흔히  진리의 원칙을 제시하는 동시에 그 원칙을 현실 상황에 적용한 말을 한다.이 본문도 우리는 그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종과 상전, 종과 자유인, 노예와 노예주 이렇게 신분적이고 계급적인 차별이 있는 현실에서 바울은 기본적으로 종과 상전, 노예주와 노예의 동등성을 말한다. 종과 자유인의 상전은 하나님이 라고 천명한 점이 그렇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종과 상전은 기본적으로 동등(평등)하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사회적 신분, 계급, 지위 등)로 평가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을 바울은 덧붙인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회는  종과 상전, 노예와 노예주,  이런 식의 신분이나 계급적 차별이 없는 세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그런 새세상의 도래를 염두에 두고 현실 상황에 적용한 말씀을 바울이 전술적으로 전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시해야 한다. 이는 성경의 등뼈와 같은 출애굽사건과 십자가 사건이 지향하는 점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출애굽사건과 십자가 사건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자유, 평등, 사랑이 넘치는 새세상이다. 그런데 그 세상이 오려면 계급과 신분의 차별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노동이사제는 그 차별을 줄이고 새세상을 만들기 위한 좋은 발걸음이다.

2.종과 상전의 상호 협력의 필요성

위 본문은 일방통행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첨예한 갈등관계에 놓여있는 양측 즉 종과 상전, 노예와 노예주 모두에게 균형 있게 권고한다. 종에게는 성실하게 일할 것을 주문하고, 상전에게는 위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위협은 무엇인가. 더 많은 착취를 위해 가하는 온갖 종류의 폭력을 의미한다. 예나 지금이나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사회에서 강자의 위치에 있는 지배 계층은 폭력을 사용하는 습성이 있다. 여기서 폭력은 단지 물리적 폭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배 계층의 권력자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유지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온갖 폭력을 행사한다. 폭력 가운데 가장 큰 폭력은 아마도  국가 폭력일 것이다. 지배 계층은 국가를 이용해 피지배 계층을 나름 합법적으로 억압하며 착취하는 일을 언제나 도모해 왔음을 역사는 증언해준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국가를 감시하고 통제하지 않는 한 국가는 흉기 노릇을 한다. 우리는 최근 세월호사건을 통해 국가가 무엇인지, 누구 편에 서 있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었다.

국가 폭력 못지않은 폭력이 있다. 종교를 이용한 지배자들의 폭력이다. 겉으로는 고상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이 폭력은 매우 효과적이다. 피지배 계층을 우민화하고 혹세무민하는 데 종교만한 도구가 없다. 이는 인류 역사가 명명백백하게 이미 증명해 준 엄연한 사실이다. 기독교를 떼어놓고 보면, 서기 4세기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되면서부터 기독교는 지배 계층의 권위적인 통치 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전락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는 모든 폭력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무려 천년 이상을 .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에 지배 계층과 강자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되는 체질적 기틀을 마련했다. 내세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신앙, 기복적이며 사대적인 신앙을 자신의 체질로 만들면서 강자의 지배도구가 되는 길을 스스로 닦았다. 해방 뒤 한국교회가 수종 드는 상전은 일제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 미국을 등에 업고 권력을 쥔 이승만(장로)정권은 친일파와 한국교회를 양 팔에 끼고 권위주의적인 독재통치를 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광신적인 반공주의 세력이 된 주류 한국교회는 애국 세력으로 변신한 친일파를 도와 권위주의적인 군사독재가 활개를 치도록 했다. 두 세력이 주도해서 만든 사회는 결국 돈이 왕 노릇하는 사회다. 사람보다 자본, 생명보다 이윤의 극대화, 사랑보다 이기심과 증오, 수평적인 인간관계보다 수직적인 주종관계를 더 선호하는 문화를 기반으로 한 '돈주의사회'를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세력이 주류 한국교회다.

이런 한국교회 풍토에서 태어나고 자란 교인이나 목회자의 입에서 "종들아, 상전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19세기 말 개화기 시절 조선 민중은 기독교에서 희망을 찾았다. 조선 5백년 동안 권위주의적인 봉건적 유교윤리에 극심한 염증을 느낀 민중들은 기독교에 수평적인 윤리,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적 가치를 기대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주류 한국교회는 그 기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주인도덕이 아니라 노예도덕을 가르치는 본거지가 되었다. 이조시대에 봉건적인 노예도덕을 가르친 유교보다 더 지독한 노예도덕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집단으로 전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에서는 수령주의가 근대화의 발목을 잡는다면, 남한에서는 주류 한국교회(천주교를 포함한 대다수 종교)가 가르치는 노예도덕이 진정한 근대화를 가로 막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GNP가 오른다고 근대화가 아니다. 모든 시민들의 인간관계가 주종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주인과 주인의 관계가 되어야 비로소 근대화된 사회라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 얼룩말의 무늬처럼 새겨있는 상명하복적인 서열문화는 주류 한국교회(대다수 종교들도 마찬가지)와 한국군대가 낳은 산물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 관계인 자본과 노동자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이 둘 사이의 상호협력과 화목 없이는 사회의 평화는 없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너무 성실하고 근면하다. 2천만 노동자들은 너무 장시간 일을 하고 저임금에 시달린다.(한국노동자의 절반은 비정규직이고, 그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된다. 한편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0%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노동자의 80%인 중소기업체의 노조조직률은 2%로 미미하다.)  문제는 자본 쪽이다. 공룡같이 크고 ,문어발처럼 무분별하고, 하이에나처럼 횡포가 심하고, 뱀파이어처럼 착취에 능한 독점자본이 화평을 깨는 주범이다. 한국사회에서 상위 10% 사람들이 나라 전체 자산의 70%를 움켜쥐고 있다. 하위 50%의 사람들이 가진 자산은 고작 1.7%일뿐이다. 그런가하면 재벌 100대 기업이 1년 동안 가져가는 순이익은 나라 전체 순이익의 60%나 된다. 고용은 고작 4%만 하고.)지금 상황은 독점 자본 쪽에게 '위협하지 말라'는 말씀을 집중적으로 전해줘야 할 때다. 한국교회가 집중 해야할 사명은 그것이다. 한국교회가 진정 평화를 도모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길은 거기에 있다.

"바로 왕에게 복종하라!"

애굽의 히브리 노예들에게 이렇게 가르친 목사가 있었다면, 그는 과연 누가 보낸 사람일까?  "우리는 바로 왕과 그의 체제에 복종해야 한다!"고 외치는 히브리 노예가 있다면 그는 또 누구인가?

 "종들아, 상전에게 복종하라"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노동자 교인이 구원받는 길은 무엇인가? 평생 교회에 다닌 그가 구원받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성경은 무엇보다 먼저 세례를 권한다(로마서6장). 진정한 세례는 옛사람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은혜로 시작한다. 그 노동자 교인의 옛사람은 상전에게 복종하고픈 욕망의 지배를 받는 사람 아닐까? 임금노예로 사는 그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왕이 이끄는 애굽체체와 같은 천민자본주의 체제에 예속됨으로써 행복감을 느끼는 착각 아닐까?

골방에 들어가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자신을 살피는 일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본다. 그만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가야할 자리는 골방이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은혜로 나아가자.

김달성목사(평안감리교회. '옆구리 뚫린 아담의 기쁨'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