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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길을 잃을 때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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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5월 24일 (화) 23:39:02 [조회수 : 6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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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메르스 확진 환자가 발생한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메르스 사태는 신종 감염병을 비롯한 긴급 재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우리 사회가 얼마나 허둥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매뉴얼은 작동되지 않았고, 관계당국은 책임을 회피하기에 전전긍긍했다. 메르스는 사람들의 의식에 안개처럼 파고들어 공포를 극대화했다. 그때 우리 사회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오랑시와 다를 바 없었다.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페스트와 맞서 싸운 리유와 랑베르 등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메르스를 종식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 온 의료진들의 수고는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된다. 문제는 메르스 이후이다. 질병이나 재난에 대한 경각심이 과연 높아졌는가?

작년에 주한 미군 부대에서 탄저균 실험이 진행되었다는 소식이 폭로되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언제나 그랬듯 그 문제는 흐지부지 잊혀지고 말았다. 그런데 또다시 미군 부대에서 생화학전에 대비한 쥬피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카 바이러스 실험이 실시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국방 관계자들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그 죽음의 균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쾌적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던 가습기 살균제가 실은 죽음의 독을 내뿜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영리 추구를 위해 생명을 위험에 빠뜨린 기업에 대해 분노했다. 폐질환으로 죽은 사람들, 아이들을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부모들, 산소호흡기를 들고 통학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참담한 사건이 기업, 학계, 언론, 대형 로펌, 정부 기관의 불의한 공모로 빚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게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돈이 유사-신으로 대접받는 사회에서 생명은 도외시되곤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유동하는 공포'가 우리 삶을 지며리 유린하고 있다. 대개는 세상에 적응하며 살지만, 그런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공포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

인터내셔널 부문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가 그 예이다. 함부로 파괴하고 죽이는 세상에서 영혜는 차라리 식물이 되고 싶어한다. 식물은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해치지는 않으니까. 영혜는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묶인 채 끌려다니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간 개의 핏빛 눈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는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탕수육을 밀어넣기도 했다. 딸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자기 가치관에 폭력적으로 동화시키려는 아버지의 행동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영혜의 독백이다. 둥근 가슴으로만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세상은 공포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 소설이 건네는 희망이 있다면 자신도 안팎으로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안으로 다독이며 어려움 속에 처한 영혜 곁에 끝끝내 머물러준 언니 인혜이다. 영혜는 지금 우리 삶이 폭력에 근거한 것이 아닌지를 묻는 물음표이다. 그리고 인혜는 참 사람됨이 무엇인지를 묻는 기호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빚어낸 휘황한 환등상의 세계에 중독된 이들은 여린 생명들이 발하는 아우성을 듣지 못한다. 문명이 길을 잃을 때 종교는 삶의 근본을 가리켜 보여야 한다. 죽음을 권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삶의 근본은 생명을 북돋는 일일 것이다. 생명보다 더 높은 가치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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