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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여는 순간 새로운 우주가 열린다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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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5월 16일 (월) 01:32:06 [조회수 : 7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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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중학교 입학 시험을 위해 서울로 유학 와서 지내고 있던 나는 방학이면 늘 고향집으로 돌아가 지내곤 했다. 무더운 여름날,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던 시골집, 어른들이 논과 밭을 돌보러 나가고 나면 사위는 적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망둥이 낚시를 하러 바다로 향하는 이웃 마을 사람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기도 하고, 하릴없이 집 주변을 맴돌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누이들이 읽다 쳐박아 둔 책 몇 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방으로 달려가 먼지 않은 책을 꺼내들고 밖으로 나와 책을 읽을만한 곳을 두리번거리며 찾기도 했다. 마당가 복숭아 나무 그늘 아래 앉을 때도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좀 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에 둠벙 옆에 서있던 플라타나스 나무 그늘 아래 자리잡을 때도 있었다. 시원한 바람에 실려 새소리라도 들려오면 문득 눈을 들어 사색하는 척하기도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인 에어> 등 초등학생 수준에 걸맞지 않는 책들이었다. 깨알같은 글씨, 이단 편집에 세로쓰기로 되어 있는 그 커다란 책들을 무슨 재미로 읽었는지 지금은 하나도 기억 나지 않는다. 다만 꽤 근사해 보일 거라는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흑석동 산 중턱에 있던 외가의 먼 친척집은 내게 별천지였다. 당시로서는 귀하던 텔레비전과 피아노가 있었고, 거실 한켠에는 소년소녀문학전집이 있었다. 물론 그 집 아이들은 그 책을 읽지 않았다. 눈치 없었던 나는 그 집에 무시로 드나들며 노량으로 그 책을 다 읽어치웠다. 내 소유의 책이 아니었기에 더욱 열정을 기울여 읽었다. 이후 책을 읽는 것은 마치 숨을 쉬듯 내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중학생 때는 시장통 옆 한갓진 도로변에 카바이트 등불을 밝혀놓고 책을 대여해주던 아저씨와 친해져서 하룻밤에도 무협지 몇 권씩 빌려 섭렵하곤 했다. 그 흥미진진하던 무협의 세계에서 나는 영웅을 꿈꿨다. 고등학생 때는 운동에 미쳐 지내느라 많은 책을 보지 못했다.

그 운명의 책을 만난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한 두어달 지날 무렵이었다. 신앙에 뒤늦게 입문한 나는 어떤 열정에 이끌려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동료들과 대화할 때마다 당혹감을 느끼곤 했다.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 내게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래저래 나는 회의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믿음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외로움을 느꼈던 건 분명하다. 어느 날 학교 앞 서점에 들러 서가에 꽂힌 책들을 일람하던 중 내 마음에 꼭 와닿는 제목과 만났다. <아웃사이더>, 영국의 비평가인 콜린 윌슨의 책이었다. 책을 펼쳐들고 서문을 읽다가 나는 불에 덴 듯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책을 썼을 때 저자의 나이가 24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동년배 아닌가? 그런데 나는? 책을 사서 다방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진실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는 해박한 지식과 전거를 가지고 그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앙리 바르뷔스, 니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헤세, 니진스키, 까뮈, 카프카, 사르트르……. 충격이었다. 그는 그 거장들의 책을 자기 방식으로 소화해서 자유롭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때 약간은 무모한 결심을 했다.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책들은 찾을 수 있는 한 다 찾아 읽자고.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아웃사이더>는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명제와 더불어 내 사유의 지평을 넓히라고 내게 발송된 일종의 초대장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렇게 저렇게 사 모은 책이 1만여 권에 이른다. 전집류의 책들은 거의 없고 하나하나 발품을 팔아 모든 책들이다. 책을 사 모으고 읽는 것 이외에는 다른 취미가 없었던 내게 그 책들 한 권 한 권은 내 정신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제는 분류하는 것을 포기한지 오래다. 분류를 하기 위해서는 책을 재배치해야 하는 데 서가 어디에도 그럴만한 여백이 없기 때문이다. 겹겹이 무질서하게 쌓인 책들을 보노라면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질 때도 있다. 책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 책들이 자기 위로 쏟아져내리는 꿈을 꾸기도 한다는 데 나는 아직 그런 경험은 없다. 때가 되면 그 책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어 갈 데로 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어떻게 떠나보내야 할까? 책을 정리할 때 불러달라는 후배들이 제법 많다. 그 책이 후배들의 서가에 꽂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어느 시인은 고물상을 불러 자기 책을 근으로 달아 팔았다고 한다. 역시 시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들은 내 서재를 둘러보다가 문득 예의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 책 다 읽으셨어요?" 힐난하기 위해 한 말은 물론 아닐 테지만 이 질문 앞에서는 대답이 궁색해진다. 장서가들 가운데 구입한 책을 다 읽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은 다 이유가 있어 그 서가에 있는 법이다. 움베르트 에코는 자기 서가를 둘러보며 이 많은 책을 다 읽었느냐고 묻는 바보들에게 이렇게 대답하라고 조언했다. "내일부터 읽을 겁니다." 책은 만날 때의 인연이 있는 것처럼 읽을 때의 인연 또한 있는 법이다. 오래 전에 구입한 책을 뒤적이다가 가끔 젊은 날의 나의 모습과 조우할 때가 있다. 책에 그어진 밑줄 하나하나, 페이지의 여백에 써놓은 단어 몇 개가 오늘 내 사유의 기초가 되었구나 생각하면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아 가슴이 저릿해지기도 한다.

일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는 에드워드 사이드를 인용하여 독서로 얻는 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설프고 얄팍한 수용이 아니라, 전인간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나를 뭉클하게move 하고, 활력을 느끼게animate 하고, 흥분시키는gets me excited 것이니, 편리하게 차트화한 지식 정보를 넘겨주는 고요한 것이 아니에요."(오에 겐자부로, <읽는 인간>, 정수윤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5년 12월 23일, p.48-49) 책을 멀리하는 세태가 안타까운 것은 참된 사람이 될 가능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좋은 책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는 이들이 제법 많다. 그들은 이야기를 통해 자극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몇 권을 책을 소개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의 독서 능력이나 취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와닿는 작가를 만난 적이 있다면 그의 전작에 도전해 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면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래도 지금 한 권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동방의 수도원 운동과 정교회 경건생활 전통에서 나온 지혜를 모아놓은 책인 <필로칼리아>를 권하고 싶다. 한 문장 한 문장 곱씹다 보면 숨이 가지런해지고, 우리 내면에 신령한 빛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책의 첫 장을 연다는 것은 새로운 우주의 신비 앞에 서는 일이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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