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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있는 목사축도를 ‘~찌어다’로 끝낸다고 권위 있는 목사가 되는가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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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5월 11일 (수) 23:41:55
최종편집 : 2016년 06월 15일 (수) 13:35:00 [조회수 : 12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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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빈자리가 금방 티가 나는 담임목사

 

지금은 기도원을 찾는 사람이 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기도원이라는 게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몇 년에 한 번은 그 기도원이라는 데를 찾는다. 기도를 위해서라기보다 뭣인가 생각하거나 구상해야 할 일이 있을 때이다.

지난번에 갔을 때에는 그 기도원에서 부흥회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목적이 다른 데에 있었고, 기도원에서 하는 부흥집회라는 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대충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만난 강사 목사는 자기 교회 예배를 부목에게 맡기고 왔는데, 자기가 없으면 교인들의 수가 줄어 그게 걱정이라 했다.

여기에서 독자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다. 그 목사님은 능력 있는 사역자인가, 아닌가. 부목사가 예배를 인도할 때보다 담임목사인 그분이 인도할 때 더 많은 교인들이 참석하니 상대적이긴 하나 분명 능력이 있어 보이는데, 독자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이 목사님은 자기의 능력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었다. 따라온 사람이 사모를 포함해 7,8명은 족히 돼 보였다.

진정한 목회능력이 있는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라면 담임목사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 표가 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물론 장기간이야 그럴 수 없는 일이지만, 짧은 동안이라면 구성원 모두가 더욱 정신을 차리고 한마음으로 교회를 보살펴야 할 것이다.

담임 목사인 자기의 자리 비운 티가 금방 난다면 목회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담임목사의 눈을 더 의식하는 사람들로 길렀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목회자라면 교인들을 7,8명씩이나 달고 부흥회에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기도로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따라나선다 해도 각자의 자리에 남아 교회를 돌보며 하나님께 매달리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따라다니며 옆에서 하는 기도만을 들어 주시고, 자기 위치에 남아 할 일을 하며 하는 기도는 들어 주시지 않으시는가. 응원단까지 끌고 다녀야 할 정도라면 자기 교회의 담임목사로서뿐 아니라 부흥강사로서도 능력 있다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찌어다’는, ‘마땅히 그렇게 해라’라는 의미
 

필자는 이 같은 경우, 그러니까 담임목사의 부재중에 교회를 돌봐야 할 경우, 부교역자들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니 그런 경우에 그들이 보인 모습에 대해 생각해 봤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부교역자, 그들에게도 목회철학이 있고 신앙상의 칼라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드러내 보일 수가 없다. 아니 그래선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담임목사의 부재중이라 해서 일거에 그가 해 온 방법을 무시한 채 부교육자가 자기의 방식대로 한다면 일관성을 잃어 교회는 많은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예배 인도만 해도 그렇다. 부교역자로서는 자기의 생각이나 견해를 덮어 둔 채 담임목사가 만들어 실행해 온 틀에 따라 인도한다. 틀뿐 아니라 내용까지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저것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축도’ 또한 그렇다.

축도는 다 알다시피 예배가 끝날 때에 목사가 신자들에게 행하는 축복기도로, 옛날에는 모두가 ‘~찌어다’로 끝났다. 그러나 이는 너무 권위적이라서 안 된다는 이유로 배척을 받아 지금은 많은 목사님들이 ‘축원합니다’ 식으로 마친다. 사실 만인제사장설이 보편적 진리로 자리매김 된 게 오늘날의 기독교인데, 목사가 하나님과 성도들의 중간 위치에서 하듯이 ‘~찌어다’ 어쩌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찌어다’가 무엇인가. ‘~해라’라고 해야 할 자리에 쓰여, ‘마땅히 그렇게 해라’라고 하는 뜻을 나타내는 예스러운 표현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누구에게 이 같은 표현으로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축도권을 말하기도 하는데, 기가 다 막힐 노릇이다. 설교권도 있다니 유구무언일 따름이다. 축도가 무엇인가. 축복하는 기도 아닌가. 그렇다면 기도도 권리로 한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런 권리들이 있다면 전도권, 구제권, 헌금권 같은 것들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아브라함은 이삭을 축복했고,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그 아들들을 축복했다. 그리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도 그 축복이라는 것을 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런 걸 왜 목사 아닌 사람이 해선 안 된다는 말인가. 축도권이라는 것을 누가 목사들에게만 주었다는 말인가. 그것도 ‘마땅히 그렇게 해라’보다 더 권위적인 느낌이 드는 ‘~찌어다’라로 해야 할 당위성은 어디에 있는가.

축도의 내용으로도 쓰이고 있는, 신약성경의 서신서들 말미에 많이 나와 있는 표현들도 옛날 성경은 모두 ‘~찌어다’로 번역되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번역에는 ‘~바랍니다’ ‘~빕니다’ 식으로 되어 있다. 오역을 바로잡은 결과이다. 축도에서 ‘~찌어다’를 ‘축원합니다’ 식으로 바꾼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축도란 ‘~찌어다’가 아닌 ‘축원합니다’ 식으로 고쳐 해야 한다는 빤한 게 아니다. ‘~찌어다’로 축도를 마치는 담임목사가 자리를 비워 인도하는 예배에서 부교역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이다. 그도 역시 ‘~찌어다’가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그가 필자처럼 그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부교역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독자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 놓이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자기의 신앙적 신념을 죽이고 담임목사가 했던 대로 ‘~찌어다’로 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소신에 따라 ‘축원합니다’ 식으로 할 것인가.

필자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라면 담임목사가 했던 대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축도의 방법이 담임목사와 부교역자가 다르다면 혼란을 겪는 건 교인들일 수밖에 없으니 어쩌겠는가, 담임목사가 바꾸지 않는 한 내가 바꿀 수밖에.

 

부교역자들이여! 이 가엾은 존재들이여!
 

자신의 신앙적 신념이나 소신마저 죽여야 하는 것이 부교역자들이니 그들만큼 가여운 사람들도 없는 것 같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용기 있게 그런 교회를 박차고 나오면 될 게 아니냐고 호기스러운 말을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건 호기가 아니라 치기이다.

필자가 늦깎이로 신학을 공부할 때의 일이다. 필자는 어느 대형교회의 목사가 시간강사로 나와 하는 강의도 들었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로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젊은 그의 말투는 거침이 없었다. 자기 교회의 부교역자들을 말할 때면 스스럼도 없이 ‘걔들’이라 했다. 자기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을 초청하여 그의 교회에 가 봤더니 부교역자들 가운데에는 나이가 그와 엇비슷한 교역자들이 몇인가 있었다.

우리의 교계는 담임목사가 갑이요 부교역자들이 을이 된지 오래다. 섬김을 받으러가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 속에 박제된 존재이지 살아서 당신의 권속들을 인도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담임목사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교회개척을 개인이 할 때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교회들이 개척되고 있으나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예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개인이 개척하기는 힘이 턱없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그러니 개척은 교회가 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런 일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염불보다 잿밥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도 2부, 3부예배로도 자리가 모자라면 교회를 새로 짓지 않고 교인들을 나누어 부목으로 하여금 분가를 하게 하겠다고 하는 담임목사들도 있다. 필자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는 것은 별로 보지 못했다. 그리하려고 준비를 하는 교회조차 보지 못했다. 그런 교회의 부교역자들은 그 준비라도 시작하기를 목을 늘여 기다리지만, 담임목사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딴청만 부리는 것이 보통이다.

대학의 시간강사들에게 자기가 취직을 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여 그들의 코를 꿰어 붙잡고 있는 교수도 있는데, 설마한들 하나님의 종이라는 목사가 그런 식의 마음이야 품겠는가마는, 실천의지도 없이 말만의 공수표를 뗀다면 결과는 그와 그리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목사는 자기의 능력을 말 아닌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목사는 말을 주로 하여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설교가 있다. 설교만 잘하면 목회는 성공한다. 그 질이야 어떻든 외적이고도 양적인 면에서의 성공은 설교가 주도한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고전4:20)다고 말씀하신다. 교역자의 주된 사역은 죄에 빠져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교역자들은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말로, 말의 힘으로 목회를 하려 한다. 입으로는 능력의 말씀에 따라 한다 하면서도, 그 말씀에 적당히 자기의 견해를 섞어 넣거나 아전인수식의 자의적 해석으로 하나님의 뜻 아닌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는 가운데 교회의 몸집을 불려 간다. 그러고는 교회가 성장했다며 목회의 성공을 자랑한다. 어린 자식에게 저질의 패스트푸드를 먹여 비만하게 해 놓고는 많이 성장했다고 좋아하는 어머니와 다를 것이 없다.

 

진정으로 능력 있는 목사
 

진정으로 능력 있는 교역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기의 말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인들의 신앙을 기르는 가운데 교회를 건강하게 성장시켜 간다.

그런데 그 무엇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라게 하는 게 교인들만이라면 안 될 일이다. 교역자 자신도 자라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요 속임수이다. 교인들보다 더 많이 자라야 할 사람은 누구도 아닌 바로 나 교역자이다.

신앙으로 자라지 않아도 되는 신자는 아무도 없다. 목사를 포함한 모든 교역자도 예외일 수 없다. 평신도이라 해서 교역자보다 신앙이 덜해도 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역자로서의 신앙이 그들 평신도보다 못하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현실이 그러한데도 많은 교역자들은 자기의 신앙은 당연히 다른 교인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역자는 하나님과 교인들의 중간쯤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다고 하는 의식까지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한 축도의 ‘~찌어다’ 운운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한다. 정말이지 시대착오적이요 독선의 선봉에 선 사람들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유의 교역자들은 교권주의적이며 교조주의적 권위로 교회의 절대적 권좌에 등극하고는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도 하는데, 그런 건 진정한 능력이 될 수 없다. 설령 능력이라 할지라도 시중잡배라든가 건달 사회에서나 인정받을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해박한 성경지식과 무게감 있는 언변을 무기로 하여 자신을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서는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부교역자들에게는 찍 소리도 못하고 따르게 해 놓고도 자기 교회는 언로가 열려 자유로운 교회라고 큰소리를 친다.

그런데 그런 유의 사람들은 억지로 언로를 막거나 하지는 않는다. 권위에 눌려 이견을 말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말해 봤자 자신의 성경지식과 언변에 상대방 스스로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부교역자들을 가리켜 ‘걔들’이라고 거친 표현을 쓰거나 하는 것은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우격다짐으로 힘을 남용하여 상대로 하여금 반발케 하는 것도 머리 좋은 교역자는 아니다.

지혜롭다고는 할 수 없어도 영리한 교역자는 방금 말한 것처럼 어떤 말도 하지 않고도 누가 됐건 이견을 말할 수 없도록 한다. 이에 이견이 없다면 좋은 게 아니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수십, 수백, 수천 명이 모인 집단에 이견이 없다면 그 집단은 살아 있으나 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견이 있으나 말할 수 없어 하지 않을 뿐이라는 말이다.

 

담임목사에게 있어 만인제사장이란 헛소리에 불과한가
 

독자 여러분의 교회는 어떠한가. 교인들이 목사의 견해와 다른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인가. 물론 그 많은 교인들이 입에서 나온 대로 하여 말을 절제하지 않는다면 중구난방이 되어 그 교회는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꼭 해야 할 말조차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견이 없어 조용할지는 몰라도 질적 성장을 이루어내는 데에 장애가 될 것이다. 생물체는 결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 교계의 현실은 담임목사가 교회의 절대자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물론 교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교회가 그리되어 버렸다. 특히 부교역자들에게 있어 담임목사는 갑 중의 갑이요,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절대자가 되었다.

담임목사의 ‘~찌어다’로 마치는 축도에 이견을 말할 수 있는 부교역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자기의 신앙적 신념을 저버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담임목사를 따라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말 능력 있는 담임목사라면 가끔일지라도 부교역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여 목회며 신앙에 대해 격의 없는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아직 애송이 전도사의 말일지라도 옳으면 자기의 생각을 접고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의 생각에 절대성을 부여할 때 자신은 이미 기독인으로서의 자질을 잃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허물투성이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인정하여 그 허물을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것이 기독인으로서의 본령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말 능력 있는 목사란 자신에게 배어 있는 절대성을 거둬내고 내려갈 수 있는 데까지 내려가 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생각으로 덧칠하지 않고 말씀 그 자체가 지닌 뜻을 찾아 실천하려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딸로서의 좋은 교인은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침묵만을 일삼지 않고 꼭 해야 할 말을 분별하여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교역자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의 눈의 밝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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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OTHY (14.1.198.190)
2016-05-14 16:45:52
예배를 받으시고 예배를 통해 그의 백성들을 만나시고자 의식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는 모든 순서가 하나님의 주관과 영광의 현현입니다. 일부 인본적 생각을 가진 목사들이 자신의 주관적 의도와 형식을 가질지는 모르지만... 예배 중 설교도 하나님의 마음을 바르게 대언해야 할 것과 축도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축복하시는 선언을 목사를 통해 대언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목사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위적인 선언을 강단에 세운 목사를 통해 가감 없이 그대로 하나님의 선언으로 축도를 하개 됩니다. 가감하는 것이 오히려 사람의 생각과 만족을 위해서 변형시키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축도는 사람을 사용하시지만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그렇게 하시겠다는 약속이고 또 선언입니다. 오히려 성도들에게 더 큰 은혜와 확신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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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 (119.206.19.45)
2016-05-17 08:27:11
TIMOTHY님께서는, ‘예배의 모든 순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대언하는 것이고, 축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축복하시는 것을 대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도를 “~찌어다”로 마치는 것이 옳다.’ 대충 이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설교도 ‘~해라’ 식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누구도 성경을 통하는 것 말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목사뿐 아니라 누구라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를 하나님과 교인들 중간에 대언자로 세우시지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왕 같은 제사상(만인제사장)’입니다. 그러한데 누가 누구에게 ‘~해라’보다 더 권위적인 ‘~찌어다’라 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어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성도들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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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218.48.137.251)
2016-05-14 08:46:00
목사 안수 받고 교회에 부임하면 부목사가 되는 제도는 담임 목사를 신격화 하자는 수작이지요. 담임 목사, 부담임 목사라든가 담임 목사, 전담 목사라 하면 어떨까요? 예를 들자면 기사나 기술사 자격증을 따서 취업했을 때 초년이라고 해서 부기사, 부기술사라고 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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