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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교수의 기고 글을 읽고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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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4월 20일 (수) 17:09:55 [조회수 : 4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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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교수는 고려신학대학원의 역사신학 교수이다. 나는 이성호 교수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하고 같은 해에 졸업했다. 이후의 글은 개인의 인격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견해가 아니다. 말씀 사역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동역자로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나누는 것이다. 말씀의 교제이다. 그가 고신대학교의 ‘개혁정론’에 기고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http://reformedjr.com/xe/board02/9241)에 대한 개인적 평가이다.

제목에는 두 구원이 나타나고 있다. 한번 구원과 영원한 구원이다. 두 구원이 같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제목과 같이 물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한번 구원과 영원한 구원은 그 의미가 다르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마 8:22). 여기에서 죽음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앞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이다. 뒤의 죽음은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난 상태이다. 관계 단절의 상태에서는 영원한 멸망이 뒤따른다. 구원은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관계 단절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곧 이 땅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영원한 멸망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곧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삼위의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것이다. 전자는 한번 구원이고 후자는 영원한 구원이다.

성도는 성자 안에서 용납하시고 성령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이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조건 없이 선택하시고 부르시기를 예정하셨다가 당사자의 생애 가운데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불러내신 자이다. 복음이 들려질 때에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심으로(행 16:14)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로서 다 믿은 것이다(행 13:48). 믿는다는 것은 복음에서 제시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다(요 1:12).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모든 죄를 사함받는다. 곧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여기에서 작정은 예정과 동의어이다. 영생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7:3에서 말씀하신 바 성부와 성자를 체험적으로 아는 것 곧 삼위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삼위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곧 한번 구원이다. 한번 구원이 작정된 사람은 모두 믿는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사람에서 한번 구원은 불가항력적이다. 이를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한다.

이렇게 불가항력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되어 견디고 인내하게 되어 영원한 구원을 반드시 얻게 된다는 것이 성도의 견인이다. 이성호 교수는 구원 이전과 구원의 시작이 철저하게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근거한 것처럼 구원 시작 이후와 구원의 완성도 삼위 하나님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 교리가 옳다며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불변성이다. 이는 세 가지 곧 하나님의 사랑, 작정, 그리고 언약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1.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분의 본성 중에 하나인 사랑에 적용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 달리 변하지 않으신다. 이 변함없는 사랑이 우리를 끝까지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하신다.

평가. 이는 사랑의 개념에 대한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성경에서 사랑은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의이시라는 표현은 없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고 공의는 그 본질의 한 부분이다.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죄에 대해 용납하실 수 없으셔서 인간의 죄에 대한 값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취하셨다. 이는 공의라고도 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부르시고 죄를 용서받고 그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는 긍휼, 인자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양 손 중의 하나가 아니다. 양 손 모두 사랑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기에 그분께로 나오는 모든 것이 사랑이다. 그 당대 사람들의 범죄로 인해 물로 심판하셔서 죽이는 것과 그 중에 노아 가족들을 살리시는 것 모두가 사랑이다. 곧 죄에 대한 죄 값 지불이라는 엄위와 죄를 용서하는 인자라는 두 요소를 갖추고 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란 이처럼 엄위와 인자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이다(롬 11:22). 인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사랑이시기에 그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사랑이다. 엄위와 인자는 하나님께 나오는 것으로 사랑의 두 요소이다. 하나님은 사랑에 있어 불변이시다. 엄위와 인자에 있어서 불변이시다. 인자에 있어서만 불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한 것일 뿐이다.

2. 하나님의 불변성은 작정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결정은 그 성격상 바뀔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정하신 것을 바꾸지 않으신다. 아니 바꾸실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혜롭지 못한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의 구원이 매우 위태롭게 된다.

평가. 하나님은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다(삼상 15:29). 이 말씀은 사울 왕에게 선언된 심판이 엉터리나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이전에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더라면 그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삼상 13:13).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곧 하나님의 작정이었다.

이 사건에 비추어 작정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도출할 수 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그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시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이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 결과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이는 작정이 바뀐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작정대로 행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한 성도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신다고 작정하셨다면 그대로 될 것이다. 반면에 사울 왕과 같이 어떤 조건을 두셨다면 조건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영원한 구원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그 근원이 되신다고 하였다(히 5:9). 영원한 구원과 관련하여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인 믿음과는 다른 믿음이다. 의지함인 믿음은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인다. 그분의 뜻을 따른다.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한 구원과 관련하여서 의지함인 믿음 다르게는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실에 있어서 불변이시다.

3. 하나님의 불변성은 또한 약속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결정도 바꿀 수 없지만 자신이 한 약속도 바꿀 수 없다. 성부는 성자에게 피로 구속받은 모든 신자를 구원하기로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어떤 경우에도 변경될 수 없다.

평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한 번 구원받기만 하면 영원한 구원을 반드시 얻게 된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런 약속을 한 곳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 그 문맥을 잘 살피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곧 믿음 다르게는 순종을 전제하고 있다. 이성호 교수가 인용한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다는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롬 8: 38-39)을 생각해보자. 이 구절은 1절부터 연결되어 있는데, 바울 사도는 13절에서 신자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했다.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 안의 하나님의 사랑이란 신자가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육신대로 살아도 신자는 죽지 않는가?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이다. 거짓말로 성도를 협박한 거짓 사도일 것이다. 성도는 육신대로 사는 일은 없는가? 그렇다면 이 또한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가 되는 것이다. 성도는 육신대로 사는 일이 없는데, 육신대로 사는 것을 성도에게 말하면서 죽는다고 했으니 말이다. 공갈이고 협박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가 육신대로 살지 않도록 해주시는가? 만약 그렇다면 역시나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가 된다. 하나님의 역사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쳤으니 말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한 번 구원받기만 하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된다고 약속하신 내용은 없다. 그런 약속을 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지 않은 것을 약속했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언약에 있어서 불변하신다. 언약이란 창세기가 기록될 때의 시대에 사람들에게 통용되던 말이다. 상호동맹을 가리킨다. 종주권 언약과 동등 언약으로 구분되는데, 성경의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동맹으로 종주권 언약이다. 이 언약은 강자가 약자를 향해 베푼 은혜, 그에 기초하여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명령, 그 명령을 따를 때에 주어지는 약속과 어길 때에 주어지는 보복인 심판을 내용으로 한다. 약속은 언약의 한 부분이지 약속 자체가 아닌데도 많은 이들이 둘을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성호 교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은혜의 내용은 한 번 구원이다. 구약에서는 출애굽이 여기에 해당된다. 구약 성경은 지속적으로 출애굽을 구원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십계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울 사도는 그들이 홍해를 건넌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이고 광야에서 신령한 식물과 신령한 음료를 마셨는데 신령한 반석 곧 그리스도께로부터 마신 것이라고 했다(고전 10:2~4). 곧 생명수를 마신 것이다. 성도의 견인론자들은 이상하게도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도 어떤 제한도 두지 않으셨는데도 하나님이 그들 모두를 구원하신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들이 모두 만나를 먹었고 신령한 물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게 말할 권리가 그들에게 없다. 이 땅의 그 누구에게도 없다.

하나님께 구원받고 하나님께 세례를 받고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신령한 식물과 물 곧 생명수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멸망을 받는다. 우상 숭배, 간음, 주를 시험, 원망 등으로. 바울 사도는 그것이 신약의 교회에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된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새 언약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언약 관계가 민족적으로 맺어졌던 구약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맺어진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명령이 있다. 그 명령을 따를 때에 주어지는 약속과 어길 때에 주어지는 심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경우를 기술하고 있다(고전 6:9~11). 각 지역에서 하나님의 받은 사람들을 전제하고서 말이다. 당사자들의 죄로 인해 사탄에게 내어주는 경우도 있다(고전 5:6, 딤전 1:20). 이 표현은 사탄의 편이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사울 왕에게 사무엘이 올라와서 한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이 되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예수님의 연속되는 세 비유(마 25장)에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 바깥 어두운 데 내어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는 것 등도 마찬가지이다.

성도의 견인의 두 번째 근거는 그리스도와의 분리될 수 없는 연합과 신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라고 한다. 전자의 근거로 로마서 8장의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 안의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하고 후자의 근거로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제시한다.

평가. 앞의 근거는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연합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신자가 육신대로 살지 않는 전제 하에서 분리되지 않는 연합이다. 대제사장적 기도는 우리의 반응과 무관하게 항상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주 예수님은 신자 부부가 삼위 하나님의 연합을 닮아 하나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이 기도에서 예외인 신자 부부는 없다. 그렇다면 모든 신자 부부는 그 기도대로 되는가? 하나 되어 사는가? 결코 아니다. 하나 되어 사는 신자 부부가 있는 반면에 하나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혼하는 신자 부부도 있다. 주 예수님은 한 번 구원을 얻은 신자가 영원한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신다. 그렇다면 신자가 다 기도대로 되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신자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기계적이지 않다. 자동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기도를 신자가 바르게 인식하고 그 기도 안에 거할 때에 이루어진다. 주 예수님의 기도를 이루시기 위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데, 신자가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성령의 역사를 거스를 수 있다. 성령을 위해 심지 않고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을 수 있다. 물론 육체의 욕심을 거스르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따를 수도 있다. 성령을 위하여 심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 반면에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어 자기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기도 한다(갈 6:7~8).

견인의 마지막 근거는 성령님의 내주인데, 성령님은 한 번 우리에게 내주 하시면 절대로 떠나시지 않는다고 한다. 성령님은 우리의 기분이나 믿음에 따라 우리 안에 들어 왔다가 나갔다가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고 한다.

평가. 내주하신 성령님은 절대로 떠나지 않으시는가? 그렇다면 너무나 좋겠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앞에 언급한 사울 왕은 그 표본이다. 그는 처음에 겸손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않겠다고 했다. 하나님이 그에게 다른 마음을 주셨다. 삼상 10:9에 쓰인 새 마음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마음이다. 그리고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가 순종한다면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토록 그의 후손들에게 주실 계획이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성령은 그에게서 떠나셨다(삼상 16:14).

다윗 왕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그 범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선언하셨다. 그대에 그가 한 기도의 한 내용이 주의 성령을 자신에게서 거두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시 51:11). 만약 원천적으로 성령이 다윗에게서 떠나는 일이 없다면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기도가 될 것이다. 그의 기도는 성령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약에서도 이는 다르지 않다. 에베소 교회에 대해 촛대를 옮기겠다는 말씀이나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토하여 내치리라는 말씀은 모두 성령이 떠나신다는 의미이다. 그뿐 아니라 바울 사도는 직접적으로 신자들에게 그것을 기술하였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 소멸한다”로 번역된 헬라어(스벤뉘미)는 “불을 끄다, 끄다, 꺼져가다, 꺼지다, 소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불씨가 완전히 사라진다(마 12:20), 등불이 완전히 꺼져서 불을 전혀 밝히지 못한다(마 25:8), 불이 완전히 꺼져서 불이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막 9:48). 그리고 믿음의 방패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막는 것(엡 6:16)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다. 불화살 자체가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목적과 기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땅에 떨어진 화살의 모양은 있지만 없어진 것과 같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자명하다. 성령님을 없애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님은 물질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이나 뜻대로 없애거나 만들거나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없앤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신다는 의미이다. 성령님께서 주도적으로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신다는 뜻이다. 다만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 성령님을 떠나가시게 하기에 성령님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이 가능한 것이다. 성령님은 한번 선물로 주어지면 기계적으로 죽을 때까지 당사자 안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다. 몸 안에서 장기와 같이 어떤 요소로 존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은 그 주권으로 어떤 사람에게서는 떠나신다. 그분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는 분이 아니다. 성도는 그 사실을 인식하고 성령님이 떠나가시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내주하신 성령께서 절대 떠나지 않으신다는 말은 신자의 귀를 즐겁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성령은 함께 계시지 못할 상태라고 판단하시면 그 신자에게서 떠나신다. 그렇기에 신자는 성령이 떠나지 않으시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이 떠나실 수밖에 없는 상태로 나아가지 않아야 한다. 배교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배교는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다. 원래부터 믿지 않은 사람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행위이다(히 6;6). “다시 욕을 보인다”는 말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었기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성호 교수는 견인 교리를 성도들이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성화장에서 신자가 거룩한 행실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다고 하고 있다.

그는 견인 교리가 은혜의 상태로부터 부분적인 그리고 일시적인 타락을 부정하지 않는데,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참된 신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들을 은혜의 상태로 회복시키신다고 한다.

평가. 그것을 말하는 성경 구절은 없다. 성경은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회개하게 된다거나 회개하게 만드신다고 말씀하는 곳은 없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에서 확인된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계 3:20). 주 예수님은 문을 두드리시기까지 하신다. 문을 여는 것은 회개하여야 할 신자의 몫이다. 주 예수님께서 문을 열지 않으신다. 성경은 일관되게 회개하라고 하시지 회개하게 된다거나 회개하게 만드신다고 한 곳이 없다. 그 명령에 바르게 반응하여 회개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그 명령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전자를 보고서 하나님께서 회복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온전히 옳은 것이 아니다. 당사자가 회개하였기에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호 교수는 성도의 견인 교리가 무엇보다 박해와 고난 속에서 믿음의 싸움을 하는 참된 신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죄와 전투하는 교회(militant church)로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가장 강력한 위로가 되는 복음이라고 한다.

평가. 그렇다. 그 교리는 큰 위로, 가장 강력한 위로가 된다. 신자의 입장에서는 최상의 내용이다. 선택된 것만 확실하다면 영원한 구원을 절대적으로 보장해주니깐 말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만 확실하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온 위로가 아니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위로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위로는 그런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 선택되어 그분의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감격 그리고 그 자녀로서 이 땅에서 오직 그분을 의지함으로 다르게 말하자면 순종함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됨에 대한 두려움을 토대로 한 위로이다. 감사와 감격 그리고 두려움 곧 경외로 인한 위로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신자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개인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면 두려움이 있을 이유가 없다. 두려움을 없어야 한다. 두려움은 그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같기 때문이다. 결코 버려질 리가 없는데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불신일 뿐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잘못된 교리가 생겨난 원인은 성경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근거로 제시되는 성구의 문맥에 담긴 전제 곧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곧 의지함인 믿음 다르게는 순종을 간과한 잘못이다. 다른 하나는 한 번 구원에 대한 성구를 영원한 구원의 근거로 삼는 잘못이다.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한 엡 2:8~9이 대표적이다. 바른 교리는 결국 성경 해석의 문제이다. 바른 해석에 기초한 교리는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지만 잘못된 해석에 기초한 교리는 장로의 유전일 뿐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에 내포된 신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아닌 신은 우상인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지 간에 사람이 보기에 좋다고 여겨져서 만든 우상이다.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송아지 형상으로 자신들을 구원한 신을 만들었던 것과 원리적으로 같다. 삼박자 축복이나 오중 복음 등의 기복 신앙에서 이야기되는 신도 마찬가지이다. 그 신이 좋다고 붙잡고 놓지 않고서 그 신을 열심히 전하는 것은 우상 숭배이다. 당사자들이 인지하고 있든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든지 간에 말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일 수 있다. 신자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그렇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렇다. 반면에 한 번 구원이지만 영원한 구원은 아닐 수 있다. 신자였는데 배교한다면 그렇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멸망의 길을 간다면 그렇다. 한 번 구원 받았지만 영원한 구원에서는 탈락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번 구원받았기에 감사와 감격 가운데 영원한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 신자에게 중요하다. 하나님을 친근히 여기면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면서 친근히 여기는 것 곧 경외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주장에 내포된 신은 우상인데도 끝까지 붙잡을 것인가? 우리 조상이 그렇게 해왔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이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우상을 붙들고 그것을 전파하는 삶의 위험성을 인지하기를 바란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그 우상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과감하게. 이 글을 읽는 이들이 하나님을 친근히 여기면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면서 친근히 여기는 경외가 그 삶에 있기를 소망한다.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의지에 있어서도.

추신 1, 인간적인 논리에 의하면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성도의 견인이 한 쌍이고 가항력적인 은혜와 영원한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주장이 한 쌍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성경의 진술은 그러한 논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추신 2, 나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밝히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누구든지 그 생각을 밝혀주시기를 바란다. 단 방식에 있어서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는 교리에서 주장하는 바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위 글의 내용에 대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다고 주장을 밝혀주시기를 바란다. 그 주장이 타당하다면 언제든지 내 생각을 포기할 것이다. 성도의 견인론을 배우고 성경적으로 생각하며 가르치며 살았던 내가 지금과 같이 바뀌었던 것과 같이.

추신 3. 한 번 구원과 영원한 구원에 대한 것 외에 부르심을 받기 전 인간의 상태, 하나님의 선택, 에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글 곧 구원론의 다섯 소주제에 대한 전체 글은 http://cafe.daum.net/BCRestoration/Nigm/631 에 있다. 좀 더 상세하게 그 내용을 살필 의사가 있는 분은 <닫힌 성경 열기>(박창진, 도서출판 등과빛)를 읽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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