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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크로산의 성서 독법
김종길  |  kimzongg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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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4월 20일 (수) 00:36:25
최종편집 : 2016년 04월 22일 (금) 13:31:42 [조회수 : 6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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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산의 성서 독법
―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

김종길(구약학)

 

I. 서언

 

전통적인 그리스도교는 헬라 철학 및 이방 종교의 영향으로 실체론(substantialism)과 이원론(dualism)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소위 정통신학의 인간론은 인간의 전적 타락에 기초하고, 구원론은 대속 은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신의 주권과 예정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신학에서 인간의 양심과 책임이 위축됩니다. 축자영감설 및 성경 무오설을 내세우는 성경의 문자주의는 성서의 진리를 왜곡하고, 하느님의 폭력성을 정당화합니다. 성서의 오용과 잘못된 철학에 근거한 교리로 교회는 소유와 권력을 강화하여 왔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와 물량적 성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건전한 교회를 세우는 데에 올바른 성서 읽기가 요구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서를 읽는 행위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서를 어떤 눈으로 읽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성서에 접근하는 방법에 따라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인습적인 신학/신앙의 폐쇄성을 지양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서 읽기를 권합니다. 성서해석학 내지 성서독법으로 분류되는 그의 저서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How to Read the Bible and Still Be a Christian)는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걸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폭력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합니다.

크로산의 책을 읽으면서 독서를 위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물음은 깊이 있는 읽기로 이끌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질문은 나중에 토론을 위한 논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 고대 근동 제국들은 성서 저자들의 하느님 이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 하느님의 폭력적인 심판과 보복을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 가나안 정착 과정에서 정복 전쟁 및 ‘헤렘’(진멸)은 정당한가?
- 성서 자체는 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계속 부정하며 또 전복시키는가?
- 성서의 하느님은 문명의 정상성을 보다 선호하는가?
- 성서가 가르치는 진짜 원죄는 무엇이며, 교회는 원죄를 어떻게 오해했는가?
- 복음서의 비폭력적 예수와 계시록의 폭력적 예수 중에 누가 참 메시아인가?
- 바울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계승했으며, 어떻게 로마제국을 변화시켰는가?
- 위기에 봉착한 인류가 성서에서 배워야 하는 지혜는 무엇인가?
- 성서에서 폭력적인 본문을 무조건 임의대로 배제할 것인가?

 

   
 


II. 크로산의 성서 독법

 

1. 문제제기 및 연구방법

성서의 난제

크로산은 성서 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하느님의 이중성, 곧 분배적(distributive) 정의를 시행하는 비폭력적인 하느님과 보응적(retributive) 정의를 시행하는 폭력적 하느님의 모습이 성서에서 함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내용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서의 결말이 야만적인 하느님에 대한 찬양인가요? 성서의 결론은 계시록의 재림 예수가 군마를 타고 심판하는 대량학살인가요? 스퐁(John Shelby Spong)이 성경과 폭력(The Sins of Scripture)에서 지적하듯이, 성서에는 폭력적이고 불합리하며 몰상식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폭력성을 극복하는 것이 신학의 일차적인 과제입니다.

위에서 지적한 난제를 포함하고 있는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크로산은 열린 마음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성경을 읽기를 권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량의 금을 함유한 금광석처럼, 성서에는 참 계시와 거짓 계시가 섞여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는 옥석을 가려서, 성서 안에 있는 참 계시는 수용하되, 거짓 계시를 거부해야 합니다. 성서에 내재한 난제를 푸는 해결책으로 저자는 세 가지 과정과 두 가지 열쇠말을 제안합니다.

성서에 접근하는 방법

크로산은 성서해석 과정에 모체, 은유 그리고 의미를 제시합니다. 첫째로, 모체(matrix)란 텍스트가 근거하고 있는 컨텍스트를 말한다. 성서에 있는 이야기들은 히브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는 본문에 나타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 등의 역사적 배경(background) 및 성서를 기록한 정황, 곧 본문이 형성되고 활용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로, 성서 탐구는 세 단계의 발굴로 진행됩니다. 저자는 각 단계에서 급행열차, 심장박동 및 성화의 초점이라는 은유(metaphor)를 사용합니다.

① ‘성서의 급행열차’는 독자를 궁지에 빠뜨리는 성서의 양면성을 말합니다. 열차가 복선 철로 위를 달리듯이, 성서에는 하느님의 양극성(폭력과 비폭력)이 함께 나타납니다. 복음서에서 나귀를 탄 평화로운 예수가 나오고, 계시록에는 군마를 탄 심판자 예수가 등장합니다.

② ‘성서의 심장박동’이라는 은유는, 성서가 하느님의 급진성과 문명의 정상성이 변증법적 긴장을 이루며 투쟁하는 원형경기장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비폭력적 분배 정의라는 급진성이 주장된 후에 문명이 정상으로 간주하는 폭력적인 보복적 정의에 의해 전복된다.”다시 말하면, 성서 안에서 긍정과 부정, 주장과 전복의 율동이 교대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발생합니다.

③ ‘성서의 성화 초점’이라는 은유를 통하여, 저자는 성서의 내용을 시각화하고, 성서의 중심에 초점을 맞추도록 권합니다. 성서를 통전적으로 보기를 제안하는 크로산은 성서의 결말보다 성서의 중심을 중시하고, 성서의 중심은 역사적 예수임을 역설합니다. “그리스도교 성경의 규범과 기준은 성경의 그리스도이지만, 성경의 그리스도의 규범과 기준은 역사적 예수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가 성서에 우선합니다. 역사적 예수에게 계시된 비폭력적인 하느님이 참 하느님인 것입니다.

셋째로,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찾아낸 성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을 올바르게 알고 섬기는 것입니다. 성서의 전통은 분배 정의와 비폭력을 가르칩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정의와 자비의 하느님입니다. 정의는 자비의 몸이며, 자비는 정의의 얼입니다. 양자는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미는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여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성서를 푸는 열쇠말

히브리 성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유래한 이야기를 차용하고 각색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발생한 수메르 문명 및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가져온 재료들을 토착화하여 고유한 사상을 형성하였습니다. 원역사(창 1-11장)에 실린 이야기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궁극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인간의 타락과 원죄 대신에 인간의 양심과 책임을 강조합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시사하는 바는 인간은 불멸적 존재가 아니며 선악을 아는 도덕적 존재라는 것이지요. 저자는 창세기 4장에 있는 카인과 아벨의 설화에서 인간의 원죄를 해설합니다. 죄란 문명 속의 결함이며 문화 속의 단점입니다. 죄는 공동체와 폭력에 관한 것이지요. 성서가 말하는 죄는 확대되는 폭력을 가리킵니다. 확대되는 폭력은 불가피한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인과응보, 곧 인간의 행동이 초래한 귀결입니다. 크로산은 원역사의 설화를 재해석하여 찾아낸 양심(conscience)과 폭력(violence)을 성서를 풀어나가는 열쇠말로 설정합니다. 따라서 독자가 성서에서 주목할 주제어는 세상의 폭력과 인간의 책임입니다.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성서에 나타난 왜곡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구약성서에 나타난 왜곡

(1) 히브리 성서와 언약

야웨 신앙은 율법 전통, 예언 전통, 지혜 전통, 묵시 전통 등 다양한 지류가 모여 하나의 강을 이룬 것입니다. 크로산은 위에서 제시한 방법론을 통하여 다양한 전통으로 구성된 히브리 성서를 언약(covenant)이라는 범주에서 분석합니다. 언약은 종교-정치적이고 종교-사회적이며 종교-경제적인 결단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고대 근동에서 통용된 종주국과 봉신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treaty)으로부터 유래하였습니다. 히타이트의 종주권 조약은 다음과 같이 6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① 전문(preamble): 주권자의 이름과 족보를 소개하며, 위엄과 권능을 묘사합니다.
② 역사적 서언(historical introduction): 과거에 종주국이 종속국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상기시키어, 종속국의 절대 충성을 유도합니다.
③조약규정(stipulations): 종주국이 종속국에게 부과하는 구체적인 의무 사항들을 진술합니다.
④ 문서의 공탁과 낭독(storage and periodical reading): 신전에 조약문서를 보관하고 주기적으로 낭독하도록 합니다.
⑤ 증인이 되는 신들의 명단(list of gods as witness): 조약의 증인으로서 신들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⑥ 저주와 축복(curse and blessing): 종교적인 차원에서 조약 규정의 이행을 강요합니다. 히브리 성서는 조약의 틀을 변용하여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크로산에 따르면, 조약 구조 가운데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히브리 성서에서 ‘언약상의 분열’이 나타납니다. 성서를 구성하는 다양한 전통들이 법(조약규정)을 기준으로 역사(역사적 서언)와 상벌규정(저주와 축복)으로 양분됩니다. 법은 현재의 충성을 강조하고, 역사는 과거의 은혜에 감사하게 하며, 상벌규정은 미래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제사 문서 전통과 지혜 전통은 역사 쪽에 자리하고, 신명기 전통, 예언자 전통, 시편 전통, 그리고 묵시 전통은 상벌규정 쪽에 위치합니다. 하느님의 분배적 정의와 인간의 책임으로 이루어진 언약은 세속적인 가치와 타협하고 변질되어갔습니다.

(2) 언약의 변화

창세기 1장과 9장에 나타난 제사문서 전승에는 창조와 재창조에 관한 상벌규정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었고, 사람이 만물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창 1:26-28). 홍수 심판 이후에 하느님은 인간과 언약을 세우면서, 강제와 처벌을 언급하지 않습니다(창 9:8-17). 그런데 아시리아의 제국신학이 이스라엘의 언약신학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신명기 전승에서는 상벌규정이 강화되어, 저주가 강복보다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28장 1-14절에서 복을 다루고, 27장 15-26절과 28장 15-68절에서 저주를 선포합니다.

신명기의 인과응보적인 신학은 예언자 전통으로 이어집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언약상 최상의 법을 최악의 상벌규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사 1:24).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렘 1:10). “주님은 질투하시며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원수를 갚으시고 진노하시되, 당신을 거스르는 자에게 원수를 갚으시며, 당신을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하신다”(나 1:2).

용서와 자비를 간청하는 시편 전통은 야웨 하느님의 진노와 처벌을 반영합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말아라. 주님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 모든 병을 고쳐 주시는 분,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해 주시는 분, 사랑과 자비로 단장하여 주시는 분(시 103:2-4).” 시인은 원수를 두고 날선 저주의 기도를 올리기도 합니다. “그가 살 날을 짧게 하시고, 그가 하던 일도 다른 사람이 하게 하십시오. 그 자식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게 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십시오”(시 109:8-9).

지혜 전통이 역사를 회고하는 반면에, 종말론(묵시) 전통은 미래를 소망합니다. 두 전통 역시 변질됩니다. 지혜 전통에서 분배 정의에 대한 급진적 주장은 분배적 자선에 의해 약화되었습니다. 잠언도 정의와 공평을 훈계합니다. “주님께서는 정의와 공평을 지키며 사는 것을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반기신다(잠 21:3).” 기득권자의 입장에 있는 그는 사회의 급진적인 변혁보다 회복적 자선을 말합니다. “옛날에 세워 놓은 밭 경계표를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아라(잠 32:10).”

묵시 전통에서 불순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향한 열망이 축소됩니다. “그러나 심판이 내려서,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멸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단 7:26-27).”이러한 메시지는 ‘정의를 통한 평화’와 ‘승리를 통한 평화’가 타협한 것이지요.

이제 신약성서로 넘어가서 예수와 바울이 어떻게 변모되어 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3. 신약성서에 나타난 왜곡

   (1) 예수의 경우

하느님나라가 임박함을 예언하는 묵시종말론자인 세례 요한은 하느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기대하고, 인간의 준비와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예수는 세례 요한의 프로그램을 개조하여 하느님나라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세례 요한은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금식하고, 예수는 현재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벌렸습니다(막 2:18-20).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눅 17:21)고 선언했습니다. 임박한 하느님나라가 현존하는 하느님나라로 바뀐 것은 하느님의 일방적인 개입으로부터 하느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바뀐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없이 일하지 않으며, 우리는 하느님 없이 일할 수 없습니다. 예수가 가르친 구원의 길은 초자연적 기적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이 협력하는 구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신-인 협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하느님나라를 떠안거나 그 안으로 들어갈 때만 하느님의 나라는 도래한다.” 그 나라는 쌍방적이며, 참여하고 협력하는 나라이며, 언약적 프로그램이다. 세례 요한과 같이 예수도 비폭력적이었습니다. 악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하느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마 5: 44-45).”

그런데 역사적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로마제국 문명의 영향으로 폭력성을 띄게 되었습니다. Q복음에서 세례 요한과 아울러 예수는 폭력적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유대인 및 이방인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복음서 기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예수의 입에 담아서 상대방을 반격한 것이지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에게 저주를 선포하는 마태복음 23장에서 보듯이, 비폭력적인 역사적 예수는 복음서에서 언어폭력을 쓰는 그리스도로 바뀝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는 그리스도로 등장합니다. “그들이 어린양에게 싸움을 걸 터인데, 어린양이 그들을 이길 것이다”(계 17:14).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칼이 나오는데, 그는 그것으로 모든 민족을 치실 것입니다. 그는 친히 쇠지팡이를 가지고 모든 민족을 다스리실 것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하신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것입니다”(계 19:15). 힘없이 도살당한 어린양이 무자비하게 도살하는 어린양이 되었습니다.

   (2) 바울의 경우

바울 사상의 불일치와 보수화 경향에 관하여, 혹자는 후대에 등장한 소위 ‘바울 학파’의 탓으로 돌립니다. 혹자는 바울이 애초에 역사적 예수를 묵시적 메시아로 오인하고, 생명문화 공동체를 재림대망 집단으로 변질시켰다고 봅니다. (문동환, 예수냐 바울이냐참조) 이러한 의견에 대하여 크로산은 바울을 로마 제국과 대결한 진보적 사도로 평가합니다. 그는 복음서들과 바울의 서신들을 치밀하게 해부하여, 바울이 어떻게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에 도전하고 로마제국을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줍니다.

다른 한편, 제국의 폭력성이 어떻게 하느님 이해에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바울을 왜곡하였는지를 밝힙니다. 저자는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13편의 서신을 ① 급진적 바울(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② 보수적 바울(데살로니가후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③ 반동적 바울(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등 세 부류로 구분합니다. 첫째 집단만이 원래 바울의 기록이며, 나머지 두 집단은 바울 사후에 기록된 것이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내용상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저자는 급진적 바울이 문명의 정상성에 의해 보수적인 바울을 거쳐서 반동적인 바울로 변해갔다고 진단합니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로마 제국과 유대교에 도전하고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급진적 바울은 가부장제, 노예제도, 위계질서, 폭력적 승리 등 로마제국의 가치에 반대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29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모두 평등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통하여 그는 노예제도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몬 1:8-20). 그런데 사후에 기록된 서신들에 의해 바울의 원래 메시지가 변질되었습니다. 보수적 바울은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수용하고(골 3:18-19; 엡 5:22-33), 노예들이 그들의 주인들에게 순종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골 3:22-23; 엡 6:5-8). 더 나아가 반동적 바울은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고(고전 14:34),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거나 가르칠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딤전 2:11-14). 그리하여 바울의 급진적인 주장은 위조된 바울에 의해 전복되어 탈급진화되고 재로마화되었습니다.

 


III. 논평

 

크로산의 공헌

성서 읽기에 ‘샤아르(רעשׁ, 관조하다)’와 ‘라함(םחר, 동정하다)’이 요구됩니다. 통찰의 눈과 긍휼의 마음이 없이 성서를 읽으면, 도리어 성서의 진리를 왜곡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게 됩니다. 성서에 있는 거짓 계시를 맹목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이나 테러를 자행하는 이슬람 국가에서 보듯이, 성서의 내용을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크로산은 성서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참된 계시와 거짓 계시를 구분하고, 인류 문명이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을 보복과 폭력의 하느님으로 왜곡시킨 역사적 과정을 규명합니다. 이 책은 성서 읽기에 다음과 같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① 성서에서 하느님의 선한 계획과 의지를 동일한 하느님의 이름으로 부정하고 있다. 성서에 참된 계시와 거짓 계시가 공존한다. 거짓 계시는 인간의 문명에 깃든 폭력과 보복의 산물이다.
② 성서의 규범과 기준은 비폭력적으로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며 하느님 나라 운동을 전개한 역사적 예수이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신화적, 묵시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③ 성서에 나타난 야웨는 정의와 자비의 하느님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예수가 보여준 하느님의 성품에 근거해야 한다.

크로산은 탈육신의 종교에서 성육신의 길로 나아가기를 제시합니다. 성육신이란 예수를 신격화하고 숭배하는 탈육신의 신앙에서 벗어나 ‘예수 살기,’ 곧 하느님의 현존인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려면 이제 주체적인 성서 읽기가 요구됩니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폭력과 위기는 하느님의 처벌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불의와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서, 우리가 양심을 따라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성서를 읽는 목적입니다. 사영리 신학과 삼박자 축복을 복음으로 선포하고 ‘육체 부활’과 ‘사후 천국’을 신앙의 척도로 삼으며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에 동조하는 한국 교회에게, 이 책은 이제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임을 깨우칩니다. 크로산의 성서 독법에서 성서를 통찰하는 ‘샤아르’와 민중의 고난에 공감하는 ‘라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서 해석과 작은 교회 운동의 관계를 고려하면, 이 책은 물량적 교회 성장을 지양하고 질적 성숙을 추구하는 ‘한국적 교회 세미나’의 기대와 부합된다고 봅니다.


비판

저자의 탁월한 고견에 수긍하면서도,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성서에서 폭력적인 본문을 무조건 임의대로 배제해야 할까요? 사람이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하고 배제하기보다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할 때, 상처 입은 내면에서 정화와 승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상대방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시편 109편이나 137편처럼 복수를 구하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되는가요? 셀류쿠스 왕조 안티오쿠스의 박해에 대항하여, 유대 공동체에서 한편으로 마카비 혁명이 발생했고, 다른 한편으로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문학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평화적인 묵시 운동은 옳고, 무력을 쓰는 혁명은 그른가요? 일제 강점기에 홍범도의 무력 항쟁은 이승만의 외교 전략보다 열등한가요?

바울은 복음, 정의, 평화 등 황제와 관련된 용어들을 차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정립함으로써 에둘러서 로마 제국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는 교회로 하여금 폭력적인 방식으로 맞서지 말고,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바울의 비폭력적인 저항은 신생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생존의 선교전략입니다. 로마 제국에 대항할 만한 힘이 교회에 있었다면, 바울이 동일한 방식으로 선교하였을까요?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폭력적인 내용을 무시하고 배제할 것인가요? 묵시문학은 피압박 계급/민족의 생존 전략입니다. 복수와 심판은 묵시문학의 요소입니다. 탄식과 부르짖음은 인생 막장으로 내몰린 민중의 ‘저항언어’입니다. 따라서 독자는 성서에서 귓속의 귀로 목소리 속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묵시문학에서 폭력을 묘사하는 장면을 읽을 때, 고난받는 민중의 한숨과 눈물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끝으로, 크로산은 인습적인 교회의 원죄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고, 원죄를 문명의 폭력으로 대체합니다. 그리고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양심과 책임을 강조합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렘 17:9)이라는 말씀이나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본성과 죄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죄성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가 요구됩니다.

 

(* 졸고는 생명평화마당에서 주관하는 ‘한국적 교회 세미나’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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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동산 (115.137.206.230)
2016-04-21 14:30:59
크로산의 성경읽기는 참으로 지당한 해석입니다,우리나라 근본주의로는 더이상 발전이 없습니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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