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있던 날 아침 마을 회관에 온 가족이 함께 갔습니다. 50가구가 전체인 조촐한 마을이지만 선거를 진행하는 형식은 서울에서와 똑같았습니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은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 주고 마을 사람들이 선거 후 함께 서서 담소를 나누는 풍경이었습니다. 큰 아이는 저와 함께, 작은 아이는 남편과 함께 투표장에 들어갔습니다. 엄마는 누구를 찍었는데 아빠는 누구를 찍었느냐며 큰아이가 물어보았습니다. 남편이 선거는 가족끼리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자 큰 아이는 왜 그런 것이냐며 의아해 했습니다.

   투표를 마치고 함께 속초 병원에 들렀다가 점심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악박물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항상 바쁘게 지나다니기만 하다가 모처럼 여유롭게 박물관에 들어가 보니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두 아이는 박물관에서 무료로 체험할 수 있는 스포츠 클라이밍 강습을 예약하고 긴 시간을 기다리느라 전시관도 둘러보고 함께 박물관 뒤 산책길도 내려가 보았습니다.

    산책길에는 두 분의 관리사 분들이 열심히 꽃을 심고 물을 주고 계셨습니다. 아이들이 다가가자 한 분이 “이 꽃 이름이 뭔 줄 알아?”하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도 잘 모르는 꽃이었습니다. “이건 바로 며느리밥풀꽃이야”하고 말씀해 주시자 두 아이가 꽃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엄마 정말 이거 밥풀 붙은 것 같이 생겼어요.”하고 붉은빛 꽃 사이의 흰 꽃잎을 보고 말합니다. 학명은 금낭화인데 시집 온 며느리를 미워한 시어머니가 밥을 짓다 뜸이 다 들었는지 먹어보던 며느리를 몽둥이로 구타해 그만 죽게 되었고, 이 며느리를 묻어준 무덤가에 돋아난 꽃이 바로 며느리밥풀꽃이라는 슬픈 전설이 있는 꽃입니다.

  며느리밥풀꽃을 관찰하고 다시 넓은 산책로를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발견한 것은 할미꽃이었습니다. 할미꽃이 그렇게 많이 모여 핀 것은 저도 처음 보았습니다. 아마 관리사분들이 심어서 돌보고 계신 것이겠지요. 두 아이는 할미꽃을 살펴보고 손으로 쓰다듬어 보기도 하며 신기해했습니다. 함께 사진도 찍고 꽃 봉우리 크기도 비교해 가며 흰 수염이 있어서 할머니꽃이라고 하기도 하고, 수염 때문이면 할아버지꽃이어야 하지 않느냐며 실랑이를 했습니다.

   할미꽃은 젊은 시절 남편을 여의고  세 딸을 혼자 길러 모두 시집보낸 후 딸들이 보고 싶어 첫째, 둘째, 셋째 딸의 집을 방문하던 할머니가 첫째, 둘째딸의 집을 들린 후 섭섭한 대접을 받아 셋째 딸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셋째 딸의 집으로 가는 길에, 셋째 딸의 집이 보이는 고개를 넘다가 그만 추위에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한 자리에 돋아난 꽃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할미꽃은 무덤가에 핀다고 제가 어린 시절에 무덤가에 핀 할미꽃을 보고 친정어머니가 말씀해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야생화를 공부하던 중 담임선생님께서 할미꽃은 귀한 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덤가에 핀 할미꽃 세 송이를 꺾어다가 담임선생님께 가져다 드렸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귀한 꽃을”하며 교탁 위에 작은 유리병을 놓고 할미꽃을 꽂아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게 바로 할미꽃이야”하고 알려 주셨습니다.

   민들레, 꽃마리, 앵초, 양지꽃, 씀바귀, 마타리, 석잠풀, 애기똥풀, 오이풀, 여뀌, 참나리, 뚱딴지, 쑥부쟁이 등 어린 시절 친정집 뒷산에는 항상 야생 꽃들이 넘쳐났습니다. 그 중 제가 제일 좋아하던 꽃은 쑥부쟁이와 진달래, 조팝나무였습니다.  쑥부쟁이는 국화처럼 생겨서 소나무 숲 사이에 천지로 피어났고, 진달래가 피는 시절에는 산에 올라가 진달래를 따서 먹기도 하고 화전도 부쳤습니다. 조팝나무는 향기가 얼마나 좋은지 꽃이 피면 길게 늘어진 줄기를 뚝뚝 잘라다가 집에 꽃아 두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국어 전공의 교생선생님은 실습을 끝내고 떠나시던 날에 저희 반 모든 친구들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은행씨앗에 손글씨를 쓴 것이었는데, 제가 받은 은행에는 “나팔꽃처럼 활짝 웃는 지향이에게”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제가 나팔꽃처럼 웃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의미 있는 말 한마디는 백 마디 훈계보다 오래도록 가슴에 남습니다.

   두 아이와 박물관 뒷길을 걸으며 야생화의 추억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회상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은 때로는 아픈 것도 있지만, 때로는 이처럼 아름답게 삶의 행복을 담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어 박물관으로 돌아가 스포츠 클라이밍 교육을 받고 인공 암벽을 올랐습니다. 무서워하던 작은 아이도 제법 몇 발자국 올라갔습니다. 큰아이는 조금 더 수월하게 중간정도 올라갔다가 내려왔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올라갔습니다.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 정신이 바짝 긴장을 하고 위기 극복을 위한 최대의 에너지를 방출해 주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동산 오르기 쯤으로 오기를 부려보았습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고 지혜를 얻으라며 하신 말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미시령 옛길에 버들강아지와 진달래가 피고, 조팝나무에 흰 꽃이 조롱조롱 매달린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오늘의 괴로움으로 족하니 내일을 염려하지 말고 조팝나무의 꽃들처럼 주님의 나뭇가지에 조롱조롱 매달려야겠습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땅에 떨어지기까지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족합니다. 오늘 하루 이 은혜가 흘러넘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