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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들을 향한 비난에 춤을 추는 사람들예수에게 미쳐라!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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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3월 27일 (일) 18:42:59
최종편집 : 2016년 05월 07일 (토) 11:25:59 [조회수 : 4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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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가지되 거기에 빠지진 말라?

 

사람들은 흔히 종교는 가지되 거기에 깊이 빠지지는 말라고 말한다. 종교는 대개가 선을 지향하고 도덕과 윤리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니 그러한 종교 중 하나를 가지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에 깊이 빠진다 해도 나쁠 건 없을 터인데 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일까.

물론 무엇인가에 ‘마음을 빼앗겨 거기에 말려들거나 헤어나기 어려운 처지에 드는 것’을 가리켜 ‘빠진다’고 하는 것이니, 표현 그대로라면 안 될 일이긴 하다. ‘선을 지향하고 도덕과 윤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종교인데, 그런 것을 부정적 의미의 ‘빠진다’는 말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도 하다. 정확한 표현으로 말하면 ‘깊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들어간다’ 해야 할 것이다.

어쩌다 보니 말장난처럼 되어 버렸는데, 이 같은 식의 말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 필자는 이 글의 제목을 “예수에게 미쳐라!”라고 했다. 그런데 ‘미친다’는 것은 ‘정신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가 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니 정신병자를 가리켜 미친 사람이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미친다’고 하는 말은 ‘무엇인가에 관심을 보이는 정도가 정상적인 경우보다 지나치게 심하거나 비정상적으로 열중하는 경우’에 비유적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꼭 그러냐 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그는 요즘 도박에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다’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기는 하지만, ‘예술가는 자기가 하는 일에 미치지 않고서는 될 수가 없다’와 같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빠지다’라는 말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빠지다’가 됐건 ‘미치다’가 됐건 지나치거나 비정상적으로 열중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에 온 힘을 다 쏟아 올인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국가가 아닌데도 이제 종교라고 하면 신‧불신을 가리지 않고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기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이 땅에서도 그만큼 중심적 종교로 자리매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그러니 ‘종교는 가지되 거기에 깊이 빠지지는 말라’는 말은 기독교에 그리하지 말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런 경향이 다분히 있다.

 

신앙생활은 교회를 중심으로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를 그 같이 이중적인 시각으로 보게 된 것일까. 도덕과 윤리를 포함한 선을 소중히 여긴다고 하는 면은 누구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이구동성으로 기독교를 비난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야 간단하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본령(本領)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생활의 중심은 교회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교회당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소위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 중에는 교회당에서 살다시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엄마의 손을 한창 필요로 하는 아이를 가진 주부가 교회당에 가서 살다시피 한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럼에도 목사나 교인들은 그런 사람을 보고 신앙이 좋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옳고 그름은 차치하더라도, 신앙생활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 중심에 예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예배라는 생각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배만은 거르지 않고 참석하려 기를 쓰기도 한다. 몸이 아프면 기어서라도 가 참석하려 한다. 오랜 세월을 기다려 온 백수 청년에게 모처럼의 취직 기회가 주워졌는데도 주일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그것을 포기하고 마는 사례도 없지 않다. 그러면 목사나 교인들은 그런 사람들이 마치 신앙의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극찬을 한다.
 
필자는 몸이 아플 때면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예배를 드린다. 찬송 한 장 부르고, 성경 한 구절 봉독하고, 기도하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끝으로 마친다. 그럴 때면 짧은 시간이지만 교회에서 여럿이 같이 드릴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 온몸을 적신다.

주일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직장 일로 교회에 가지 못했다면 적절한 시간을 찾아 혼자서 예배드린다 해도 안 될 건 없다. 그마저 시간이 없다면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드리면 된다. 그런 예배라고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겠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다 같이 드리는 예배가 됐건, 가정이나 직장 같은 데에서 혼자 드리는 예배가 됐건, 가시적인 것만이 예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예배가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 하시고, 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4:23) 하셨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배에 장소와 때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인 과거의 예배는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분께서 오신 ‘곧 이 때’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돌로 지은 성전은 이미 2천년이나 전에 사라졌으니 말할 것도 없고, 교권주의자들이 성전이라 부르는 교회당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다 예배처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니 이 세상 어디가 됐건 다 거룩하다.

 

하나님께서 힘이 모자라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하라 하시는가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몸’이란 단순한 육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육이 다 포함된 인간 개개인의 전존재를 말한다.

이 말씀과 전술한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생각하면, 참된 예배란 나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구약시대의 제사에서는 희생의 제물을 드렸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같은 제사를 단번에 끝내 버리셨다. 그러니 희생의 제사는 두 번 다시 필요치 않게 되었다. 나를 대신하여 그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 즉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어떻게? 삶을 통해, 생활을 통해 드려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영적 예배’이다.

한국뿐 아니라 지구촌의 많은 교회들이 쇠퇴해 가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삶을 통한, 생활을 통한 예배를 등한히 해 왔기 때문이다. 교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는 주일을 지켰다며 마치 신앙인으로서의 할 일을 다 했다고 하는 식의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예배는 하나의 종교의식일 뿐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형식을 갖추어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로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일상과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생활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라고 호6:6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사회적 소외계층에게로 향한 자비와 사랑이 결여된 제사는 참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삶이, 생활이 신앙적이지 못한 가운데 드리는 예배 또한 참되다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신앙적인 삶이요 생활일까.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일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 앞에 나가 감동적인 신앙상의 연설로 청중을 사로잡거나, 베스트셀러 급 책을 써 기독교 신앙에 대해 증거를 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은사를 받아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 주거나 예언을 하는 것일까.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아니면 자기 자식들이 하나님의 큰일하기를 바란다. 바르게 살기도 바라나, 그보다는 큰일하기를 더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무리 큰일이라 해도 그것을 바른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작은 일만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힘이 모자라 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일을 하라 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모르셔서 기도하라 하시지 않는 것처럼, 당신과 자녀인 우리의 관계가 더욱 깊고 견고해지게 하기 위해 일을 하라 하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것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는 일을 그것이 아무리 큰 것이라 해도 작은 것만 못한 것이다.

 

목사들을 향한 비난에 좋아라 춤을 추는 사람들


가장 큰 하나님의 일은 크리스천답게 사는 일상의 삶이요 생활이다. 그런데 그 같은 일상이 어려운 것이다. 직장에서 성실히 일하고 가정에서 가족으로 사는 일, 아파트의 공동현관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데에 떨어진 종이조각 하나라도 줍는 일, 좁은 인도를 둘이서 나란히 가다가 마주 오는 사람에게 길을 터 주는 일, 양보의 미덕으로 매너 있게 운전하는 일, 만원 버스이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일 등등, 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하나님의 큰일로 실천이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때와 장소의 가림이 없이 정직하고, 누구의 앞에서도 자신을 평등한 존재로 여기는 일이 하나님의 큰일이다. 장사하는 사람이 좀 더 나은 이익을 얻기 위해 정직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불신앙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 앞이라 할지라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며, 사회적 약자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큰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소해 보이거나 당연한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큰일이고, 실천이 어렵다. 그냥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극히 어렵다. 그러기에 그때그때의 단순한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이 몸에 배도록 체질화시키지 않는 한 예기치 않을 때 불쑥불쑥 나타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일상에서의 사소해 보이는 과오이다. 그러니 인격을 믿음의 것으로 변화시킬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가장 큰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믿음의 것으로의 인격변화, 말은 쉽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에게 미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필자가 “예수에게 미쳐라!”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 자기는 크리스천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이들도 크리스천임을 부정할 순 없다 해도 크리스천답다는 면에서는 아니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5-16)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사도 요한에게 주신 계시를 통해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이를 나에게 울려 주신 예수님의 경종으로 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목사들을 향한 비난에는 좋아라 공감을 하면서도 자신에게는 관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목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 나에게는 내가 목사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나 목사나 천하보다 더 소중한 존재임이 틀림없지만, 나에게는 내가 우선이다. 그러니 목사를 비난하기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앞서야 한다. 그것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이요, 그것이 천하보다 귀한 나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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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9.69)
2016-03-27 22: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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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입니다. 그러나

비난과 비판에 대해 연구가 필요할 듯 합니다.

그리고 예수에 미친 사람들은 비난 받을 짓을 하지 않는 다는 사실 입니다.

그리고 미친 척 하기에 비판 받는다는 사실 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자들은 비난을 받아도 싸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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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5
삼청교육대 (202.14.90.168)
2016-03-28 18:03:01
박근혜를 향한 비난에 춤을 추는 사람들
그런데 우리는 박근혜를 향한 비난에는 좋아라 공감을 하면서도 자신에게는 관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박근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 나에게는 내가 박근혜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나 박근혜나 천하보다 더 소중한 존재임이 틀림없지만, 나에게는 내가 우선이다. 그러니 박근혜를 비난하기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앞서야 한다. 그것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이요, 그것이 천하보다 귀한 나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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