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

서울 선한 사마리아인의 길, 윌리엄 스크랜턴길

▲ 아현감리교회 스크랜턴 흉상 ⓒ촬영 이동훈 연구원

대한제국 시절, 당시 권력의 중심이던 경복궁과 덕수궁 주변에는 서구 열강의 지식인들과 외교관들이 모여들었다. 그곳이 바로 정동이다. 현재 정동길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건축물을 비롯한 역사의 현장은 대부분 이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 교육이 시작된 곳, 처음으로 신식 결혼식이 거행되었던 곳(정동제일교회에서 1890년 교인이었던 박신실과 강신성의 결혼식), 처음으로 서양 악기가 연주되었던 곳, 처음으로 활자에 기름을 묻혀 책을 박아낸 곳, 처음으로 순한글 신문을 발행하여 근대 언론의 문을 연 곳(독립신문), 처음으로 여성 전용 병원이 설립된 곳(보구여관), 처음으로 국왕이 케이크와 커피를 맛보았던 곳(손탁호텔), 처음으로 ‘파티’라는 연회가 열린 곳 등 훗날 ‘근대화’라 이름 붙여진 사회 변화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정동이다.

또한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곳도 정동이다(《개화와 선교의 요람 정동 이야기》 참고). 정동은 격동하는 역사의 주 무대였기에 그 시대의 역사를 대면할 수 있는 길거리 역사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2년 2월,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어 미국 공사 푸트가 정동 10번지에 공사관을 마련한 이후 덕수궁을 끼고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공사관들이 자리를 잡게 됨으로 정동은 자연스럽게 외국인들의 ‘치외 법권’ 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변을 보호받을 수 있는 정동 주변에 집을 마련하고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정동은 ‘문화의 이방 지역’이 되었다. 치외 법권 지역이라 성역으로 구별되는 곳, 문화의 이방 지역인 정동에서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정동에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이름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정동에 발을 디디고 일본에 있던 그를 정동으로 불러들여 개신교 역사를 시작하게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한국명 시란돈)이다.

의사였던 윌리엄 스크랜턴이 이곳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자기 집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 일이었다. 후에 고종이 사액현판을 내렸는데 그 이름이 ‘시병원’(施病院)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시병원은 지금의 정동제일교회 문화재예배당 자리에 있었다. 윌리엄 스크랜턴길의 출발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정동 시병원터

▲ Dr 윌리암 스크랜튼 목사와 정동병원(시병원,1885) ⓒ 당당뉴스DB

윌리엄 스크랜턴의 한국 선교는 세계 선교 역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특별하다. 그는 아내와 어린 딸, 그리고 어머니 3대가 함께 선교를 위해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하셨을 때 주저 없이 길을 떠난 아브라함(창 12:1)과 같은 출발이었다.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은 당시 53세의 고령이었다. 그녀는 아들 선교사를 따라 그냥 길을 나선 것이 아니라 미 감리회해외여선교회(WFMS)로부터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온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다.

1885년 5월 3일 서울에 들어온 윌리엄 스크랜턴은 6월 15일 미국 공사관 건너편에 한옥 기와집을 구하여 이사한 후 9월 10일부터 진료했다. 환자들이 늘어나자 1886년 6월 한옥을 추가로 구입한 뒤 환자들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있는 곳 어디에도 내가 의사라는 것을 알리는 표식이 없습니다.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 말을 듣고 찾아오는데 서양 의술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시설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나는 병원 출입문에 간판을 만들어 붙이기로 했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자니 내 어학 선생이 자기에게 맡기라면서 나와 상의도 없이 이렇게 적어 왔습니다. 한문과 한글로 ‘미국인 의사 시약소’(American Doctor’s Dispensary)라 적은 것을 한쪽 기둥에 걸고 다른 기둥에는 경고문처럼 ‘남녀노소 누구든지 어떤 병에 결렸든지 아무 날이나 열 시에 빈 병을 가지고 와서 미국 의사를 만나시오’라고 써 붙였습니다”(“윌리엄 스크랜턴의 연례보고서”, 1886).

▲ 옛 정동교회ⓒ 당당뉴스DB     ▲ 현재의 정동교회 ⓒ 당당뉴스DB

정동에서 시작한 병원은 환자들이 몰려들어 환자 수가 처음 1년 동안에는 1,937명, 그 이듬해에는 4,930명에 이르렀다. 같은 의료 선교사였던 알렌(Horace Allen, 한국명 안련)이 고종황제의 특혜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중원을 세운 것과 달리, 선교사의 순수 투자로 설립된 스크랜턴의 병원에는 돈 없고 가난한 계층들이 몰려들었다.

1886년 “윌리엄 스크랜턴의 연례보고서”(275-276p)를 보면, 이 병원에서 처음으로 치료한 환자는 풍토병에 걸려 서대문 성벽 아래 버려졌던 여인이었다.

“어느 날 오후 도성을 따라 걷고 있을 때 나는 그렇게 버려진 한 엄마와 딸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들은 단지 가마니 한 장은 깔고 또 다른 가마니 한 장을 덮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구걸에 의지했습니다. 남편은 그들을 거기에 버려두고 시골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 그날 밤 아주 큰 추위에 빠졌을 때 나는 막노동꾼을 불러 그 여자에게 다시 가게 되었고 그녀를 병원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 세 주간이 흐른 후 그 여자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신이 기뻐할 만큼이나 밝고 행복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불행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보람이 있는 일입니다. 그 여자가 앓고 있던 이 질병은 이 계절에 한국에서는 대단히 자주 일어나는 회귀열이란 병으로 아주 무서운 질병 중의 하나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날 밤 들것에 실어 여인을 병원으로 옮긴 짐꾼들의 입을 통해 스크랜턴의 ‘착한 일’은 소문으로 퍼져 나갔다. 죽어 가는 환자를 치료해서 3주 만에 살려냈다는 소문이 나면서 스크랜턴의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이 늘어났다.

조선 시대 기관이나 건물이 국가로부터 가장 확실하게 인증을 받는 방법은 국왕이 이름을 지어 보내는 작명하사였다. 스크랜턴의 병원에 내려진 이름은 ‘시병원’(施病院)이었다. ‘베풀 시(施)’ 자를 붙인 것으로 고종황제와 백성의 희망이 담겨 있었다. 훗날(1901년) 한국 교인들은 스크랜턴의 시병원 사역의 내용과 의미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시란돈 장로[스크랜턴]끠…셔 나오시던 해에 대정동에다 병원을 설시하여 대한에 잇는 병든 불상한 사람 보시기를 시작하셧난대 우리나라 대황제 폐하끠…셔 이를 아시고 깃버하사 시 장로사의 대한백성 사랑하심을 치하하신 후에 그 병원 일홈을 시병원이라 하라 하시고 시병원이라 쓴 현판을 사급하시샤 시병원 문압헤 걸게 하시니 시 장로사끠…셔 이래 이 일에 대단히 주의하야 밤낫으로 괴로옴을 생각지 아니하시고 여러 병을 곳치셧시며 죽을 처지에 잇난 사람을 만히 구워하셧나니라. 그 병원에 단이어 병 곳친 사람의 수효는 도합 오만 명가량이 되어슬듯 하더라”(“시란돈 장로사와 그 대부인 귀국하심”, <신학월보>, 1901. 8).

그런데 이때 윌리엄 스크랜턴은 안전하고 편리한 정동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정동은 거주하거나 활동하기에는 편리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찾아오기에는 어려운 곳이었다. 경운궁, 경희궁 등 궁궐이 근처에 있고, 양반 집과 외국 공사관들에 둘러싸인 정동은 귀족들이나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곳이지 가난한 사람이나 격리 치료가 필요한 전염병 환자들은 감히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성문 밖에 버려져 죽어 가고 있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다.

“한국에서는 집 안에서 운명하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불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인 같은 사람들이 회생 불가능한 병이 들거나 전염병에 걸리면 성 밖으로 추방되어 짚으로 만든 움막 안에서 혼자 살도록 버려지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집조차 제공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버림을 받기 때문에 사망률이 더욱 높아진 것으로 확신합니다. 한국에는 이런 환자들을 돌볼 만한 자선기관이 거의 없는 형편이라 환자들이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서울 성문 밖 어느 곳을 가 보던지 언제나 이처럼 버려진 환자들을 수백 명씩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이처럼 전염병이 창궐한 특별한 지역에 집 한 채를 마련해서 이런 환자들을 위한 수용 시설로 꾸며 치료와 함께 필요한 땔감과 음식을 제공하고자 합니다”(윌리엄 스크랜턴이 레이드 박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87).

윌리엄 스크랜턴은 성문 밖으로 눈을 돌려 그곳으로 병원을 옮길 계획을 세웠고, 그 병원을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이라 했다.

“그것이 나에게는 참된 의료선교 사역의 극치에 놓인 일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병으로 괴로워하는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하며 그러한 친절한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에게 명령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생명들을 구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나는 그러한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을 시작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윌리엄 스크랜턴이 레이드 박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87. 8. 13).

결국 본부의 승인 아래 스크랜턴은 1888년 12월에 애오개 시약소, 1890년 10월에 남대문 시약소, 1892년 동대문 시약소를 열었다. 이렇게 정동에 있던 시병원은 ‘여리고 골짜기’ 같은 곳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병원이 떠난 자리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예배당인 지금의 문화재예배당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아현교회

▲ 아현교회 구예배당 ⓒ촬영 이동훈 연구원

광화문에서 서대문을 지나 신촌과 마포로 갈라지는 사거리 오른쪽에 아현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도 그 옛날에 지은 높다란 붉은 벽돌의 고딕 양식의 예배당이 보이는데, 그 옆으로 이 교회의 설립자인 윌리엄 스크랜턴의 흉상과 기념비가 서 있다. 아현교회 역시 1888년 말 윌리엄 스크랜턴의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 계획에 따른 시약소로 출발했다.

‘아현’이라는 명칭은 ‘애고개’라는 토박이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애기 고개’, ‘작은 고개’라는 뜻으로 죽은 아이를 내다버리는 곳이었다. 또한 조선 시대 전염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던 ‘서활인서’가 있었던 곳이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던 곳, 장사꾼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 무덤이 있어 울음소리와 무당 푸닥거리가 끊임없던 곳이었다. 이 사실을 안 윌리엄 스크랜턴이 이곳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손길인 시약소를 세워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윌리엄 스크랜턴에 이어 시약소를 맡게 된 윌리엄 맥길(William McGill)에 의해 시약소가 위축되면서 결국 시약소는 사라지게 됐다. 다행히 프랭클린 올링거 선교사와 메리 스크랜턴을 통해 복음전도와 교육사업이 이어졌고, 이어 윌리엄 노블(William Novel) 선교사 부부가 사역을 이어 가면서 교회는 100명이 모일 정도로 부흥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94년 청일전쟁과 노블 부인의 건강 악화로 인한 귀국, 애오개 천주교인의 방해로 교인 2명으로 2년간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신병 치료를 마치고 노블 선교사 부부가 돌아왔지만 사역지가 평양으로 바뀌는 바람에 교회는 목회자가 없는 상황에서 폐쇄의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1909년, 첫 한국인 목사가 부임한 이후 죽었던 교회가 다시 살아나면서 스크랜턴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지 28년 만인 1916년 기독신보에 아현교회의 한 교인을 “모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는 기사가 등장했다.

“고양군 아현교회 내 김운호 씨는 부가 자뎨로 예수를 밋고 죄를 자복하고 거듭난 후 성경을 열심히 보고 긔도를 쉬지 안코 하며 그 부친의 핍박이 자심하되 동씨는 깃븜으로 그 부모를 간하며 외인의게 젼도하고 또한 동씨의 발긔로 매 토요일마다 긔도회를 시작하엿는대 자미가 만타 하엿스며 또는 최희태 씨는 새로 밋는 청년인대 그 모친을 주압흐로 인도하야 쥬를 밋게 하며 그 부인은 언문을 아지 못하여 셩경을 닑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더니 불과 일삭에 능히 언문을 통하여 셩경과 찬미를 어렵지 안케 본다 하엿더라”(1916. 2. 26).

당시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이 출석하면서 청년 교회로 소문이 났고, 당시 ‘음악 형제’로 유명했던 안사영, 안기영, 안신영 삼형제가 주축이 되어 일류 음악가들이 함께하는 음악 예배가 이어졌다. 음악회 자체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당시 동아일보 기사가 말해 준다.

“셔문밧 아현에 잇는 아현교회는 거금 삼십 년 전에 창설한 이래 오랫동안 정신 사업에 로력하여 오든바 근래에 니르러서는 재정이 군색하야 매우 곤난한 상태에 잇슴으로 그 교회 안에 있는 엡윗청년회에서는 사회의 동정을 구하기 위하야 금 이십일 하오 칠시 반에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음악회를 개최한다는데 출연할 악사는 시내의 일류 음악가들이라더라”(1923. 11. 20).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24년 이후에는 교인이 200명을 넘어서며 급속하게 성장했고, 주일예배는 소문난 음악 예배가 되었다. 신앙으로 똘똘 뭉친 청년들은 야학을 운영하며 문맹퇴치와 민족계몽운동을 하였고, 방학 중에는 농촌 봉사를 통한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이 전통은 1985년 부목사로 부임한 유승훈 목사에 의해 청년 농촌봉사활동으로 이어졌고, 지금은 ‘아현미션’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또한 아현교회는 유학을 다녀온 목사가 많은 교회, 감독을 배출한 교회로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현교회는 외형만 유명한 교회가 된 것이 아니었다. 스크랜턴 선교사의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 계획으로 세워진 교회이기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정신’을 실천한 교회였다. 한국전쟁 당시 아현교회의 목사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성도와 피난민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많은 목사들이 피난을 가거나 ‘기독교민주동맹’이라는 어용 단체에 강제로 가입되어 인민군 환영 대회에 참여했지만 아현교회의 김유순 감독과 조상문 목사는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김유순 감독은 자택에서, 조상문 목사는 교회에서 납북되어 현재까지 그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쟁이 났는데, 전쟁이 터진 지 사흘째 되는 날 새벽 일찍 이군혁 권사님이 저희 집에 오더니, ‘목사님, 방금 한강 다리가 끊어졌습니다. 빨리 피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며 피난하기를 권하셨어요. 그러자 아버님은 ‘교인들이 아직 남아 있는데 어떻게 목사가 먼저 피하겠습니까? 저는 3.1운동 때도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하시면서 피난을 거절하셨어요”(조상문 목사의 딸 조병규 권사의 증언).

“나중에 이군혁 장로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이 장로님이 다시 찾아가 피하시기를 강권했답니다. 남아 있던 교인들도 자꾸 피하시기를 권하니까 목사님도 한 번은 결심하시고 교회를 나섰는데 공덕리까지 가셨다가 이내 돌아오셨답니다. ‘교인을 두고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돌아왔다’고 하시더랍니다”(전쟁 직후 아현교회를 담임했던 김성렬 목사의 증언).

현재 세워져 있는 고딕 양식의 예배당 건물은 1986년 입당하였고, 그 뒤쪽으로 교회 창립 120주년을 맞이하여 기존의 교육관을 헐고 예배당을 건축하여 ‘스크랜턴기념예배당’이라 이름 붙였다. 2015년 아현고가도로가 철거되어 신촌이나 마포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길목에 랜드마크처럼 자리 잡고 있는 애오개 언덕 위 아현교회 자리는 128년 전 윌리엄 스크랜턴에 의해 세워져 어지러운 세상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들을 위해 교회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상징적 좌표다.

▲ 스크랜턴기념예배당 내 ⓒ촬영 이동훈 연구원     ▲ 아현감리교회 스크랜턴 기념예배당 ⓒ촬영 이동훈 연구원     ▲ 아현교회 구예배당 ⓒ촬영 이동훈 연구원

상동교회

▲ 상동교회

숭례문에서 한국은행 방향으로 300m 정도 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에 빌딩이 보인다. 멀리서 보면 교회 십자가가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쇼핑센터 간판 및 복잡하게 들어선 가게들만 보여서 교회가 어디인지 놓칠 수 있다. ‘왜 이런 시장 한복판에 교회가 있나?’ 하는 의문도 든다. 그 의문은 교회 7층에 마련되어 있는 자그마한 역사자료전시실을 둘러보면 해결된다. 역사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곳에서 쉽게 만나는 이름은 전덕기와 윌리엄 스크랜턴이다.

윌리엄 스크랜턴이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 계획을 수립하고 성문 밖 세 곳에 시약소를 개설한 것은 의료시설을 넘어 교회 설립까지 내다본 것이었다.

“이 모든 시약소에는 장차 예배당으로 사용할 부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런 목적을 갖고 부지를 매입하였습니다. 이처럼 시약소를 많이 세우는 목적은 이들 시약소가 삼림 속에 들어가 벌채하는 역할을 해서 미래의 목적에 사용되도록 땅을 개간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10년 안에 이들 부지를 예배당 용도로 넘겨주고 우리 의사들은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지역에 들어가서 병원을 세우는 것입니다”(“윌리엄 스크랜턴의 선교보고서”, 1889. 9. 3).

스크랜턴은 세 곳의 시약소에 의약품만이 아니라 성경과 전도책자도 비치해 놓고 남녀 전도인을 상주시켜 환자와 주민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1893년부터 정동 시병원의 시설과 장비를 옮겨 1895년 봄부터는 상동에서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하였다. 또 부지 안의 한옥 한 채를 예배실로 꾸며 주일 집회도 시작하였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1895년 4월, “상동교회에 100명의 교인이 출석하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장차 1천 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1896년 여름에는 출석 교인이 300명에 이르렀다.

▲ ⓒ당당뉴스 DB

이런 부흥과 성장은 스크랜턴 모자 선교사의 선교와 목회의 결과였지만, 이들의 선교와 목회를 도운 토착 전도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도인들 가운데 전덕기의 개종과 전도사역은 상동교회 초기 부흥의 원동력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남대문시장에서 숯장수를 하는 삼촌의 양자로 자랐고, ‘영아소동’(외국인들이 아이들을 사서 잡아먹는다는 헛소문이 돌았던-편집자 주) 때 사람들과 함께 정동의 선교사 거주 지역으로 가서 돌을 던질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그는 삼촌의 소개로 스크랜턴 가정의 일꾼으로 들어간 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스크랜턴 가족들은 일꾼으로 들어온 그를 가정예배에 함께 참석하게 했고 식사도 함께 했다. 그들에게 감동한 전덕기는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경과 교리서 등을 읽으며 스크랜턴의 집에 일꾼으로 들어간 지 4년 만인 1896년 스크랜턴에게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의 입교인이 되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윌리엄 스크랜턴 목사님을 만난 뒤 나는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전덕기는 상동교회 속장, 권사, 전도사를 거쳐 1905년에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스크랜턴의 뒤를 이어 상동교회 제6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전덕기는 전도사 시절 엡윗청년회의 회장으로 거리 전도활동을 펼쳐서 남대문 밖 한강 나루터까지 교인들이 생겨났고, 기독교 민족운동의 요람인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했다. 초대 교장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5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기독교인이 된 이승만이었다.

이외에도 김구, 이필주, 유동열, 양기탁, 안태국, 이회영, 이시영, 주시경, 이준, 이상설 등 ‘상동파’로 불리던 이들이 모두 상동교회 청년회에 모인 민족운동가들이다. 상동파는 구국기도회로부터 항일 무장투쟁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상재와 윤치호가 이끌던 황성기독교청년회,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서북 지역 민족운동 세력과 연합한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에도 참여하였다. 이들의 민족운동은 모두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이라는 활동 무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 중심에는 전덕기 목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전덕기 목사의 영향력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 사회에서도 인정받았다. 그는 을사조약 무효상소운동, 헤이그밀사사건, 신민회 창설 등 모든 민족운동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공옥학교와 상동청년학원을 통하여 민족 교육에도 힘썼다. 그러던 중 1912년 일제가 신민회를 와해시키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는 전덕기 목사를 죽였다는 소리를 피하기 위해 그를 방면하였지만, 전덕기 목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14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떠났으나 상동교회 청년들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어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민족 대표 33인 중 최석모, 오화영, 이필주, 신석구 등 4명을 배출했다.

상동교회는 지금도 윌리엄 스크랜턴이 중요시했던 엄숙하고 거룩한 예배 의식을 전통으로 이어 가며,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이웃과 함께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을 유업으로 이어 가고 있다.

▲ 1890년에 남대문진료소로 건립한 상동병원 ⓒ당당뉴스 DB

▲ 상동교회터 ⓒ당당뉴스 DB

▲ ⓒ당당뉴스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