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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배반자들의 특징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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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2월 27일 (토) 00:16:01
최종편집 : 2016년 03월 01일 (화) 22:23:49 [조회수 : 6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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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에게 입맞추는 가롯유다

 

예수 배반자들의 특징

당신은 진정으로 예수의 참 제자인가?

마13:51~52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들은 그 분의 “모든 가르치심을” 다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참 제자는 모든 가르치심을 분명하게 “깨닫는 자”입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당신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가르치심을 깨우치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진정한 제자일 수 없기 때문에 참다운 제자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미혹자가 나타나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때에 우왕좌왕 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24:4~5, 23~26). 유혹당한 결과는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부패한 것이나 찾아 날아다니는 독수리같은 존재가 되거나 아니면 부패한 것이 되어 독수리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기 때문입니다(24:28).

   따라서 말씀을 “깨닫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통해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1.마가복음이 보여주는 제자들의 모습

 

[1]도무지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자들

   마가복음이 전하는 제자들은 말씀을 깨닫는 일에 몹시 더딘 자들로 나타납니다.

   4:13  말씀을 쉽게 설명해 줘도 잘 깨닫지 못하는 자들

   6:51~52  말씀을 쉽게 깨닫지 못하므로 쉽게 겁먹고 두려움에 떨므로 도대체 믿음이

       있는 자들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담대한 모습이 없는 자들(4:40비교 참조)

   8:15~17  말씀에 깨달음이 없으므로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해도 동문서답식으로 반응하는 자들

   8:18  백날 보와 모르고 백날 들어도 말귀를 알아듣지도 못하고 기억도 못하는 자들

   8:21  경험했던 사건을 지적해주면서 설명을 해도 그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하는 자들

   9:32  깨달음이 없어 질문도 못하는 자들

    마가복음 저자가 그리는 이와 같은 답답한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4:13에 인상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깨닫는 수준이 답답함의 경지에 이를 만한 수준이었기에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4:33).

   하지만 예수와 함께 동거동락하는 제자들의 깨닫는 수준은 시간이 흘러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꽉 막혀 버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못지않게 그 깨닫는 수준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율법주의 울타리에 둘러쳐진 채 꽉 막혀버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수준에 맞먹는 답답함의 극치에 오른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7:18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8:17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이 정도로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제자들은 무지했고 깨닫는데 둔했습니다. 물론 마가복음 저자가 보기에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일 뿐만이 이날 기억도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8:18).

 

[2]믿음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자들

   이처럼 깨달음이 없는 답답한 제자들은 그저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믿음이 좋은 제자들이라고 할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저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9:19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이 구절은 열두 제자들이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답답해하시며 탄식할 정도로 믿음이 없는 갑갑한 자들이었음을 보여주는 ‘예수의 탄식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자기들 이해방식에 따라 ‘오해’하는 자들

   이렇게 무식하고 둔하며 답답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당하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대해 세 번이나 말씀하셨음을 마가복음이 보여줍니다(8:31; 9:31; 10:33~34). 셋이라는 수는 상징적으로 완전수이므로 ‘가르치는 쪽에서 완벽하게 가르쳤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유대교 경전인 히브리 성서에 따라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온 구약성서적 메시아관에 매여 있었습니다. 더구나 마가복음이 전하는 내용에 의하면 예수께서 처음에 수난당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에 ‘붙들고 항변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에 의하면 ‘항변했다’는 단어는 ‘꾸짖었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었다는 단어와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감히 베드로가 주를 향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꾸짖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에 대해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제대로 된 답변을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29절) 최종적으로 베드로 역시 잘못된 메시아관념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사탄’이 되고 말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8;33).

   열두 제자들이 갖고 있던 메시아관이 잘못되었음에 대해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이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그들은 그렇게 잘못된 메시아관을 갖고 예수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권력욕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이 마가복음의 지적입니다(10:35이하 참조).

   그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말씀을 올바로 깨닫지 못했기에 잘못된 메시아관을 수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무슨 말씀을 들을지라도, 어떤 일을 경험했을지라도,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잘못된 소망을 갖게 하는 동인으로 기능하도록 했을 뿐입니다. 그 결과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적으로 출세하는 것만 꿈꾸는 제자들이 되고 말았음을 보여줍니다.

 

[4]결국 배신한 자들

   이렇게 둔하고 깨달음이 더딘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깨달음이 더딘 무식하고 어리석은 제자들이 초래한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줍니다.

   14: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4:50  깨닫지 못한 열두 제자들이므로 결국 모두 도망하거나 부인함(66절~72절 참조)

    이들은 왜 그토록 추종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했던 것일까요? 지금까지의 흐름에 의하면 그들은 도무지 ‘깨달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간단히 배신하고 도망하였습니다. 깨달아 알지 못하는 둔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이 마가복음 저자의 지적입니다.

 

2.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모습

 

   마태복음 저자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비유(막4:1~9)와 그 비유의 설명(10절~20절)을 13:1~9와 10절~23에서 전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두 부분을 잘 비교해 보면 제자들이 긍정적으로 기록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1]잘 깨닫는 제자들

   무엇보다도 막4:13에 나오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답답해하심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서는 마가복음의 ‘잘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생략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그 자체로 복 있는 자들이라고 선언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쉽게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비유로 이야기를 해도 못 알아듣는 자들과는 달리 잘 알아듣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께 ‘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느냐’고 묻자(13:10) 예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안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11절).

   이 말씀대로라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셔야 합니다. 다른 자들에게는 어차피 말해도 모를 것이므로 천국의 비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비유라는 것은 알아듣기 쉽게 하는 것에 우선적인 목적을 두는 문학적 방법이므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의미는 다른 각도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제자들은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선택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다 잘 알아듣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당대의 일반적인 대중과 비교하여 나타낸 것이 13:1에 배경적으로 나왔습니다. 선택받은 제자들은 일반대중들을 가르치고 길러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더 깨달음이 빨라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일반대중들과는 달리 천국의 비밀에 대해 잘 알아들어야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자들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왜 굳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이 있었던 겁니다. 모든 것을 다 잘 알아듣는 깨달음의 사람들인 제자들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의 사람들인 열두 제자들은 봄으로 복이 있는 사람들이며 들음으로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13:16). 그 복이 어느 정도이냐 하면....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보고 싶어 했던 것, 그러나 보지 못한 것, 듣고 싶어 했던 것, 그러나 듣지 못했던 것을 열두 제자들은 보았고 들었습니다(14:17). 그처럼 열두 제자들은 복 있는 사람들인데 깨닫는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마태복음 저자의 주장입니다.

 

[2]제대로 경배할 줄 아는 깨달은 믿음의 제자들

   마태복음 저자에 따르면 예수의 열두 제자들은 말씀을 잘 깨닫는 자들이기 때문에 마가복음에서와는 달리 예수를 제대로 알아보고 경배할 줄 아는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깨달음이 둔한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를 보고 심히 놀랐습니다. 그리고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해졌습니다(막6:51~52).

   하지만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 제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를 보고 유령이라면서 호들갑을 떨었으나 예수의 음성을 듣고 즉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베드로가 즉시 자기도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거절하지 않으시는 주께서는 오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가 예수께로 갔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제대로 걷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베드로도 물 위를 걸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갖고....베드로와 함께 주께서 배에 오르시자 배 안에 남아 있던 나머지 제자들은 마가복음에 나타난 제자들과는 전혀 다르게 ‘예수께 절하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절했다’는 말은 신 숭배를 가리키는 용어로 신께 경배드렸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와 같이 깨달음이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깨달음이 있는 제자들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아보고 제대로 된 경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3]진전된 메시아관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마태복음의 깨달은 제자들

   마태복음도 예수께서 세 번 수난당하실 것을 미리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 자신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대목이 나오는데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이 그때 있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것과는 다르게 되어 있고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칭찬은 유별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신앙고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해 주신 것”임이 강조되어 나타납니다(16:17).

   마가복음에서처럼 마태복음에서도 베드로가 예수께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문맥의 흐름을 보면 깨닫지 못해서 들은 소리가 아닌 것으로 그려집니다. 오히려 ‘사람의 일에 너무 치중해서’ 나온 인간의 건방짐 정도로 그려지고 있습니다(16:22~23).

   그에 따라 마가복음에는 깨닫지 못한 둔한 자들이 예수께 나와 권력욕에 휘말려 예수께 좌우의 자리를 직접 부탁했던 것으로 나오는데 마태복음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예수께 나와서 인간적인 차원에서 요청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20:20).

 

[4]배신했던 제자들은 깨닫지 못해서 아니라....

   마가복음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준 배신은 ‘깨닫지 못한 자의 무지한 행동’이라는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그의 무식한 행동에 대제사장들이 좋아라하며 ‘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돈이 탐이 나서 먼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막14:10~11).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가룟 유다가 인간적으로 돈 욕심을 내서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흥정하는 것으로 나옵니다(마26:14~15). 이것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따른 것이 매우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배신의 이유도 극히 인간적인 연약함의 차원에서 발생했던 일이라는 인상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그가 금전거래를 통해 예수를 넘겨주기로 했다는 것은 일종의 ‘말씀 성취’와도 상관이 있습니다. 그가 은 삼십을 주고 스승을 팔기로 했다는 것은 슥11:12의 반영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27:9 비교참조).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는 달리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소행이라는 차원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첫 장에서부터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며 ‘예언의 말씀과 성취’라는 도식 속에서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제자들은 말씀과 깊이 상관있는 깨달음의 사람들’로 그려지게 됩니다.

   그에 따라 제자들의 배신행위도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가 아니라 말씀에 깨달음이 있는 자들의 행위였음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유다의 배신조차도 구약성서적 근거에 행태의 근원을 둔 행동이라는 관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27:9참조).

   그러므로 제자들이 모두 다 도망했다는 기록에 있어서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에 대해 둔하고 깨달음이 더뎠던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과 상관없이 도망간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막14:49~50).

   마태복음은 예수의 체포 장면을 마가복음과 달리 길게 쓰면서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사실상 두 번 했습니다(26:54,56).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도주한 이유도 “말씀의 성취”라는 의미에서 보게 됩니다. 그에 따라 제자들이 모두 도망간 것은 예정된 구원의 여정 속에서 말씀에 따라 된 일이라는 그림이 그려지게 됩니다.

 

3. 마가복음의 깨달음이 둔한 제자들과 마태복음의 잘 깨닫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보는 교훈

 

   잘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자기 욕심을 중심으로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안목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이 오거나 어려움이 오거나 어떤 사건을 만나게 되면 두려움에 떨면서 도무지 말씀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합니다. 나아가 무식하고 용감하게 인간적으로 배신을 합니다. 그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기껏해야 양심에 찔려 자기의 잘못에 대해 미안하고 송구하여 훌쩍거리는 정도로 마감하고 맙니다(막14:72)

   그러나 마태복음의 경우, 말씀을 잘 깨닫는 자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어떤 메시아인지, 왜 그리스도인지, 무엇 때문에 말씀을 주시는지 등에 잘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합니다. 혹 예수를 배신했을지라도 곧 돌이켜 심히 통곡합니다(26:75).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태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27:3). 가룟 유다의 죽음이 사도행전은 사고사로 나오는데(행1:18), 마태복음의 가룟 유다는 배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뉘우친 후 죄 없으신 예수의 고난에 대해 책임지는 차원에서 자살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27:3).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자신의 행태에 책임질 줄 안다는 것은 참 제자의 반열에 있는 진정한 제자라는 인상을 갖게 합니다. 비록 처음 제자들에게 인간적인 실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심히 통곡하는 모습, 자살하는 모습을 통해 깨달은 자의 모습이 마가복음과는 현격하게 다르게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말씀을 깨닫고자 힘씀으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입니까?

   가룟 유다처럼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차원에서 자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심히 통곡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칠 줄 아는 깨달은 자의 모습, 참 제자의 모습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예수 따르미의 진솔한 행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깨닫는 자 되어 자신의 행태를 바라볼 줄 알고 마치 자살하는 것처럼 인간적인 육욕에 가득 찬 자아를 죽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고전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베드로처럼 심히 통곡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도 진심으로 반성하여 자숙하는 강력한 자기절제의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가복음의 깨달음이 둔한 무식하고 어리석은 제자상에서 마태복음의 깨달음이 있는 믿음의 제자상으로, (여기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누가복음의 칭찬받는 제자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도록 함께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 시대의 증언자들이 될 수 있도록 힘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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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 (122.62.216.125)
2016-05-02 10:02:11
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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