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함에 있어 소리와 소리 사이에 침묵이 없다면 말의 혼잡함과 시끄러움은 얼마나 대단할까? 끊임없이 이어지며 쏟아지는 소리 속에서 말의 의미를 찾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말과 말 사이에 침묵이 없다면 말이란 것은 애당초 성립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소리와 소리 사이의 침묵이 나눠진 소리에 의미를 더한다. 이렇게 소리의 빈자리는 의미를 만드는 자리다.

빈자리는 소리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건과 물건들이 빈자리 없이 빼곡히 차있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얼마나 답답하게 보이던가. 비단 물건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만해도 그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반드시 넉넉한 빈공간이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은 가까이 있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적절한 빈 공간이 있어야 비로소 관계의 의미가 살아난다. 마치 소리 사이의 침묵처럼.

독일에서 가족으로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 집의 월세계약서를 함께 제출해야 했었다. 그리고 이때 담당공무원이 가장 까다롭게 본 것 중 하나가 바로 방의 크기였다. 단칸방에서 여러 명이 살기도 하는 우리네 문화와는 달리 독일에는 1인당 필요한 최소한의 방 넓이가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만약 계약한 집의 넓이가 가족 수에 따른 최소 넓이에 미치지 못하면 절대로 비자를 받을 수 없었다. 돈이 없어서 더 큰 집을 빌릴 수 없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았다. 주거생활에 있어서 모든 사람은 침범 받아서는 안 될 최소한의 필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책상 앞에 앉아 스탠드의 불을 켜신 후(“빛이 있으라.”) 본격적으로 일을 전개하신 처음은 바로 빈자리를 만드신 일이었다.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허공(虛空)이 생겼다. 하나님은 물과 물 사이에 빈자리를 만드셨던 것이다. 그리고 빈자리를 통해 나눠진 물들은 각각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이렇게 공간의 빈자리는 의미를 만드는 자리였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흔히 행간(行間)을 이야기하곤 한다. 행과 행 사이의 빈자리. 소중하고 고귀한 의미들은 바로 이 빈자리에 놓여 있기 일쑤다. 그리하여 글을 잘 쓰는 사람이란 바로 이 행간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빈자리로 말할 수 있는 사람, 침묵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 지혜란 이런 종류의 것이리라.

세상은 점점 빈자리가 좁아져가는 느낌이다. 말과 말 사이의 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시간과 시간 사이의 거리가, 공간과 공간 사이의 거리가 심하게 좁아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조급하고 답답하다. 친밀의 거리를 넘어 침범하는 사람들로 숨이 막혀버릴 지경인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침묵과 허공을 삶 속에 두는 연습이 필요해보인다. 그제야 삶은 의미를 지니기 시작할 것이니.

“그러나 예수께서는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 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 (눅 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