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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진짜 다섯기둥(2)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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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1월 29일 (금) 10:17:00 [조회수 : 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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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로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에요.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았다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된다면 좋겠지요?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도 그렇기만 하다면 너무나 좋겠어요. 과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에는 영원한 구원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그냥 구원이라고 표현되어 있기도 해요. 후자의 경우는 문맥에 의해 영원한 구원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어요. 미래형으로 기술되어 있거든요.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요. 이 땅의 신자에게는 미래의 일이지요.

영원한 구원은 믿음으로 가능하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의미예요. 효력 있는 부르심에서는 믿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었어요. 여기에서도 그런 의미라면 영접하였다면 다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겠지요. 그런데 그 의미가 아니에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신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전 인격과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뜻하거든요. 곧 예수님을 의지하는 거예요. 영접함인 믿음과 다른 의지함인 믿음이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신자에게는 양심이 아닌 선한 양심이 주어졌어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지요. 종이 아닌 자녀이기에 주어지는 특권이에요. 그 역사의 내용은 다양해요. 성경을 읽고 깨닫는 것, 설교나 가르침을 받아 깨우치는 것, 성도의 교제를 통한 깨달음, 자신에게 발생한 즐겁거나 어려운 일들이나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메시지 등이에요.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쉬지 않고 일하세요. 신자에게 주어지는 현재의 은혜이지요. 신자는 그 역사를 따라 살면 되요. 그런데 신자에게는 자신의 생각도 있어요. 육체의 욕심이라고 해요. 성령의 역사와는 정반대예요. 그래서 신자에게는 서로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와 육체의 욕심이 있게 되었어요. 갈라디아서 5장 17절의 가르침이에요. 신자는 성령의 역사를 따를 수 있어요. 이는 하나님의 현재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것이에요. 반면에 육체의 욕심을 따를 수도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지요. 신자는 고린도후서 6장 1절의 바울 사도의 권면처럼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아야 해요.

육체의 욕심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를 따르느냐 아니면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육체의 욕심을 추구하느냐. 이것은 당사자가 결정해요.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가 은혜이며 신자가 그 역사를 따르는 것이 순종이지요. 성령의 역사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의지한다는 말이기도 해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의지하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좇지요.

영원한 구원이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말은 순종으로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해요. 두 표현은 사실상 동의어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5장 9절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일반적으로 의지함인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한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0장 28절이에요. 이 구절만 보면 신자에게는 영원한 멸망이란 없다고 여겨져요. 예수님보다 더 강해서 그분의 손에서 신자를 빼앗을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에요. 그런데 이 말씀은 앞 구절을 전제하고 있어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여기에서 동사는 모두 현재형이에요. 현재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현재적으로 그분과 교제하며 현재적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지요. 이 말씀은 주 예수님이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는 히 5장 9절과 같은 의미랍니다. 그 무엇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로마서 8장 39절도 마찬가지지요. 바울 사도는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로마서 8장 13절에서 진술하였거든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사랑이란 육신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순종 다르게 하나님을 의지함인 믿음이 전제된 것이지요. 영원한 구원의 길에 관한 성경의 진술은 이처럼 의지함인 믿음 다르게는 순종을 전제하고 있답니다. 단 한 구절도 예외가 없지요.

신자는 현재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아야 해요.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곧 육신대로 살지 않아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자는 항상 그렇게 사는 가요? 그렇지 않지요. 은혜를 헛되이 받아요.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요. 육신대로 사는 것이지요.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으면 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겠지요. 그에 대해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세요. 이를 신학적으로 관계적 칭의라고 한답니다. 순종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그 신자를 의롭다고 하실까요? 만약 그렇다면 자기 자식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감싸는 너무나도 잘못된 이 땅의 부모들과 전혀 다르지 않겠지요. 그런 신자를 하나님은 불의하다고 하세요. 당연하지요. 바울 사도는 성령의 역사를 따르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이며 그 결과는 영생이라고 하였어요. 육체의 소욕을 선택하면 육체를 위한 삶이며 그 결과는 썩어진 것이라고 해요. 갈라디아서 6장 8절과 9절에서요. 썩어진 것은 영생과 대조되는 것이기에 영원한 멸망임이 분명하거든요. 이러한 경우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져요. 출애굽기 32장 32절과 33절, 시편 69편 28절, 요한계시록 3장 5절의 진술과 같아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께요.

일차적으로는 배교가 있어요. 히브리서 6장 4절에서 6절의 경우지요. 배교란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지요. 이 말은 믿음을 전제하고 있어요. 만약에 애초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배교라는 말이 성립되지를 않아요.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고 때로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에서 핍박을 피하고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믿음을 저버리는 거죠. 초대 교회가 직면했던 상황이에요. 바보이거나 미쳤다면 모르겠지만 핍박을 받아 어려움을 겪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으면서 교회 공동체에 속할 이유는 없죠. 배교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의 구속을 받았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표현이지요. 그래서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하세요. 배교해서 핍박이나 죽음을 피한 이후에 다시 믿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선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파선하는 경우도 있지요. 디모데전서 1장 19절이에요. 우리 성경에는 ‘선한’이 없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있어요. 선한 양심이란 거듭난 신자에게만 가능한 거예요.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양심이거든요. 그 양심을 버렸다는 말은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서 떠나셨다는 의미예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지요. 파선이란 항해를 하다가 어떤 이유로든지 바다에 빠져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해요. 칼뱅의 경우에는 여기에서 믿음이 구원의 믿음이 아닌 교리적 믿음이라고 풀어요. 그런데 이 믿음은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가지라고 한 믿음과 같거든요. 칼뱅의 주장을 따르면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구원의 믿음이 아닌 교리적 믿음으로 가지라고 권했다는 말이 돼요. 완전히 잘못된 풀이인 거죠. 이런 모습은 자신의 선관점을 성경에 집어넣어 끼워맞추기를 하는 것이에요. 본문에 담긴 바를 바르게 찾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요. 배교한 이가 원래부터 믿는 자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요. 이도 마찬가지죠.

예수님을 믿는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경우도 해당돼요. 마가복음 9장 42절에서 48절에 나오는데요. 예수님은 그런 사람은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지게 되는 것이 낫다고 하세요. 이 땅에서 생명이 끝나게 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빠지는 형벌이지요. 곧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이에요. 예수님을 믿는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잘못에 대한 벌이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실족한다는 것의 의미도 확인되지요. 앞의 배교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것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이에요. 실족하는 이나 실족하게 하는 이나 그 결국은 같아요. 여기에서 실족하게 한 이는 회개의 기회가 있어요.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행실을 인식하고 완전히 끊는다면요. 눈을 빼어 내버리거나 손과 발이라면 찍어 내버리는 것으로 이야기된 바예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연속되는 세 비유도 있지요. 열 처녀 비유에서 어리석은 다섯 처녀, 달란트 비유라고 하는 세 종들의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 양과 염소 비유에서 염소로 분류되는 이들이에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름이 담긴 등을 가지고 있었다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어요. 신랑이 늦게 올 때에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8절)라고 하거든요. 신랑을 맞을 자격을 함께 갖추고 있었다는 거예요. 신자라는 면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지요. 다만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고 않고의 차이가 있었지요.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돼요. 세 종들의 비유에서 달란트가 주어졌다는 것에선 차이가 없어요. 달란트는 재능에 따라 주어진 사업 자금인데,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명이지요. 사명은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이들에게만 주시거든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사명을 내팽겨치지요. 그 결과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겨나고 슬피 울게 되지요. 염소로 분류되는 이들은 양으로 분류되는 이들과 같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해요. 그 호칭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이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에요. 주 예수님께서 거부하지 않아요. 그 면에선 인정하신다는 거예요. 이는 심판의 내용에 있는 “나를 떠나”라는 표현에서도 확인돼요. 이 표현은 그때까지 주님과 함께 하였다는 것을 담고 있어요. 차이는 약한 자로 찾아오신 주 예수님을 영접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예요. 염소로 분류되는 이들은 영접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주 예수님을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게 돼요.

하나님께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윤리적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어요. 그 어미와 음행한 고린도 교인이 여기에 해당되지요. 고린도전서 5장 1절에서 8절이에요. 바울 사도는 그 사람을 출교하라고 명령해요. 출교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한 지체를 끊어내는 거예요. 예를 든다면 팔을 끊어내는 거죠. 끊어진 팔은 끝이지요. 생명과의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지요. 출교는 신자를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이에요. 이 표현은 그가 사탄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사람을 대상으로 핑퐁 게임을 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사탄에게서 데려왔다가 사탄에게 내어주고 다시 그를 데려오는 일은 없다는 것이에요. 그럴 양이면 애초에 사탄에게 내어주시지 않지요. 정당한 교회의 권징으로 출교가 이루어졌다면 출교된 신자는 영원한 구원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에요.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윤리적 범죄를 지속하는 경우도 해당돼요. 고린도전서 6장 9절에서 11절이에요. 거기에 진술된 윤리적 범죄를 지속하는 경우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해요. 효력 있는 부르심 이전에 그렇게 살았던 신자들이 있어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거든요. 이는 그러한 삶에서 불러내신 것이거든요. 그 삶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신자가 되어서도 그렇게 살아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멸시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해요. 물론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는 그렇게 살지 않았는데 부르심을 받고 난 후에 그렇게 사는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여기에서의 윤리적 범죄는 개인과의 관계에서 행해지는 개인적인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100조의 이상의 국부를 유출했다고 해요. 그의 친인척이 전국 7개 시와 도에 걸쳐 보유한 부동산은 총 팔십 오만 구천 이백 사십 삼평이고 현재 시세로 23조 이상이라고 하거든요. 그 의미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고 봐요. 국가를 상대로 도적질을 했다는 거예요. 바울 사도가 말한 윤리적 범죄엔 이런 것도 포함된다고 봐요.

지금까지 얘기한 것은 성경에 너무나도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그 내용에 대해 거부해요. 자기 자식을 절대 버리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라거나 순종의 정도에 대해 말하면서요. 전자의 경우는 성경을 바르게 읽으면 그런 소리 못하죠. 구약의 이스라엘과 야웨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 시편 89편 26절은 아버지와 자녀 관계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스라엘이 불순종해요. 선지자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시지요. 그래도 여전히 바뀌지 않아요. 결국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에 의해 멸망해요. 야웨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기에 절대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요. 후자의 경우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몰라요. 다만 기준이 제시되면 기준을 충족시킨 후에는 나태해질 수 있기에 그냥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에서 성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유추할 수 있겠지요.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날마다 죽는다고 한 것과 같이요. 예수님 십자가의 한편 강도를 반대 근거로 말하기도 해요. 그가 영원한 구원을 얻은 건 명백한데, 그는 부르심을 받고난 후에 이 땅에서 삶이 있었던 신자의 본은 아니예요. 그 생애 중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기회를 얻지 못한 안타까운 경우이고요. 일찍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그에 비해 더 큰 은혜가 주어진 것이었어요. 다만 그 은혜를 바르게 누리지 못해 멸망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도 하는 거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인 영생 곧 영원한 구원은 의지함인 믿음을 조건으로 하고 있답니다. 이는 성령을 따르는 것 곧 순종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해요. 어떤 신자들은 그 조건에서 벗어나기도 해요. 그래서 영원한 구원을 얻지 못하기도 하지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는 것이에요. 영원한 구원에서 탈락하게 되는 거죠.

잘못된 다섯 기둥들과 바른 태도예요.

교회 역사에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있어요. 지금도 그 주의를 따르는 신자들이 있지요. 많아요. 그곳에서는 정반대의 주장을 내세워요. 칼빈주의에서는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성도의 견인이에요. 성도의 견인에서 견인은 견딤, 참음이라는 뜻인데, 그 안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책임지신다는 것이에요. 선택되어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았다면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니요. 필연적으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이 성립되겠죠. 성도의 견인은 맞는데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은 아니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말은 자체적으로 모순이에요. 알미니안주의에서는 부분적 타락, 조건적 선택, 보편적 속죄,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영원한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고요. 각각 자신들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이래요. 기독교의 다섯 기둥이라는 것이지요. 4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요. 각각 논리적으로는 아주 우수한 주장이긴 하지만 온전히 성경적이진 않아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내용이 있는 반면에 성경을 잘못 읽어 생겨난 내용도 있지요. 이 경우는 앞의 언급한 칼뱅과 같이 선관점을 성경에 끼워넣는 잘못의 결과물이에요. 잘못된 내용에서 벗어나야 하겠지요. 성경의 문맥, 문장, 단어, 문법 등을 바르게 적용하여 읽으면 가능해요. 진짜 기독교의 다섯 기둥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야 해요.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요. 그렇지 않는다면 예수님 당대에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강하게 책망하셨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겠지요. 조상들의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두고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요. 이를 위해선 교단적으로 바뀌어야 해요. 시찰회에서 이 내용을 다뤄요. 노회에 안건으로 올려서 총회에 질의해요. 그러면 신학교에서 연구하여 보고하도록 할 것이고 총회에 그 결과를 알려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는 거예요. 이런 과정을 거쳐야 저처럼 교권에 희생되지 않을 수 있어요.

성경의 가르침은 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 보편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영원한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보다 상세한 내용은 도서출판 등과빛에서 나온 <닫힌 성경 열기>에 있어요. 가능하면 꼭 사서 읽어보시기를 바래요. 특히 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하는 목사로 살고자 하시는 분은 꼭 읽어보시기를 바래요. 성경의 가르침이 명백한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전통을 따르는 것은 결코 성령을 좇는 게 아니에요.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거죠. 그럼 최종적으로 썩어진 것을 거두느냐? 전 모르겠어요. 다만 분명한 한 가지는 그 부분에 있어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안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거죠. 정말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는다면 속히 돌이켜야 할 죄이기 때문에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된 신자 여러분들이 기독교의 진짜 다섯 기둥을 바르게 파악하고 그 안에 거하기를 바래요. 베푸신 은혜와 잘못된 삶으로 인해 영원한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사실, 이 둘로 인해 하나님을 친근히 여기면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면서 친근히 여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래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지요. 여기에 진정한 평강, 하늘의 평강이 있답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평강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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