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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도 [‘오직’ 믿음]을 말한 적 없다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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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11월 19일 (목) 19:46:17
최종편집 : 2015년 11월 22일 (일) 16:33:28 [조회수 : 9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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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도 [‘오직’ 믿음]을 말한 적 없다

마12:31~37

   이번의 연구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울의 ‘오직 믿음’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말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갖고 바울이 정말로 “‘오직’ 믿음으로‘구원을 얻는다고 했는지를 살펴보면서 신약성서 전체를 통합적으로 보는 안목을 갖춘 신약성서적 구원론을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7절)?

   바울에 의하면 명백하게도 인간은 ‘믿음으로’ 의로워집니다(롬1:17; 3:22,28,30,30 etc.; 갈3장; 엡2:8; 3:12 참조).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받는 사건은 ‘믿음으로’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본문에 나타나는 이 표현은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바울의 구원론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어생활을 잘 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닌 인간의 어떤 특정한 행위로 얻는 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 보아야 할 것은 바울도 ‘오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믿음’을 강조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표현하기를 원했다면 아마도 헬라어 단어인 모노스[μόνος→(영어음역)mono]를 사용하여 ‘오직 믿음’이라고 표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약2:24 참조).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론을 말하는 헬라어 본문에는 ‘오직’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와는 달리 우리말 성서에는 ‘오직’과 ‘믿음’이 함께 묶여 표현된 구절들이 있습니다.

ㅇ롬1:17(갈3:11):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헬라어 본문에는 우리말의 ‘오직’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심지어 갈라디아서는 똑같은 합2:4를 인용한 구절인데 우리말 성서에도 ‘오직’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같은 구절을 우리말로 번역했는데 우리말 성서의 로마서에만 ‘오직’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ㅇ롬3:27~28: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우리말 성서의 27절에 ‘오직’이라는 단어가 있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루터역 독일어 성서에는 27절이 아니라 오히려 28절에 ‘오직’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물론 헬라어 본문 28절에도 ‘오직’에 해당하는 단어는 없습니다. 우리말 번역 성서에는 27절에 있고 루터역 성서에는 28절에 있습니다.

 

ㅇ롬4:13; 12:3; 빌3:9; 갈2:16; 살전5:9

  우리말 성서에만 ‘오직’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론 중에서 특이하게도 롬5:9~10은 구원을 위한 이전단계를 말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구절에 나타나는 구원은 미래시제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구원 이전에 하나님과의 화목이 먼저 이루어진 상태에서(5:1,9,10a 참조) 의인다운 믿음생활을 해야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10b).

   이것은 약2:24의 명제적 진술 및 마태복음 7장의 내용과 맥을 같이 합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상은 눅6:46,49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게 됩니다.

 

   
 

우리말 야고보서에 나타나는 ‘오직 믿음’의 의미

*약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오직 우리말 성서에만!! 강조를 위한 이 표현, ‘오직’이라는 단어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약2:24: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헬라어 본문에 우리말의 ‘오직’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를 KJV는 only로, NIV는 alone으로 번역했으며 엘버펠더역을 비롯하여 루터역과 개정 루터역은 모두 allein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에 나타나는 ‘오직’이란 표현은 ‘다른 것 말고 오로지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를 말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를 나타내는 진술입니다.

   물론 믿음이 전제되지 않은 채 믿음 이외의 어떤 다른 것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의심할 수 없게도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직’ 믿음, 그 하나로만 되는 일”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 자신이 구원을 위한 믿음 이외의 다른 요소를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롬5:9; 고전15:2; 고후7:10; 빌2:12 참조↔살후2:10; 딤전2:15 비교 참조).

 

바울이 말한 구원의 다른 요소: 믿음 이외의 것은?

   그러면 이미 정형화 되다시피 고정되어 버린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비-바울적, 비성서적 구원론 대신 신약성서 전반에 충실한 구원론을 재정립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 차원에서, 먼저 아래의 밑줄에 맞는 말과 괄호 안에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것이 맞을지 번호를 골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으로 구원을 (①얻었으매, ②얻으매, ③얻을 것이매) 보이는           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이 구절에 대해 아래에서 설명합니다).

 

바울도 말한 적 없는 “‘오직’ 믿음으로”가 정통 구원론인 것처럼 된 이유

   신약성서 헬라어 본문에 명백하게 나타나는 바울의 이 언명 및 신약성서의 다른 본문들에 기록되어 있는 ‘믿음 이외의 다른 필수요소’들이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완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는 루터에 의해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매도된 이후 격이 떨어지는 말씀으로 구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성서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인간이 인간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등급을 매기는 짓을 행한 셈입니다.

   물론 그렇게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 카톨릭과 싸울 때 믿음을 강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마틴 루터는 카톨릭의 비-성서적, 반-신학적 구원론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구원론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에 따라 그는 헬라어 본문에 단어 하나를 첨가하는 ‘본문수정 행태’를 감행하였습니다.

   마티 루터는 롬3:28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durch den Glauben)’ 라는 표현 앞에 우리말의 ‘오직’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인 ‘allein(only, alone)’을 끼워 넣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뜻을 갖게 했습니다(allein durch den Glauben). 이 단어는 현대독일어역인 엘버펠더역에 없습니다. 우리말 번역 성서에도 없습니다. 영어역 성서들에도 없습니다. 단지 루터역에만 있습니다. 개정 루터역에도 ‘오직’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 쪽에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코 로마 카톨릭을 개혁한 운동이 아니라 로마서 구절을 손상시키면서 갈라져 나간 분리주의적 분파운동이었을 뿐이라며 얼마든지 폄하시킬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도무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주창한 “오직 성서(솔라 스크맆투라, sola scriptura)”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인위적으로 롬3:28을 변개시켰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 말한 ‘믿음’ 이외의 것에 대한 설명

   그러면 이제 ‘믿음’ 이외에 바울이 말한 “구원의 또 다른 필수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ㅇ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①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를 말한 적이 없다는 확고한 사실은 위의 구절로 분명하게 자리 잡힙니다. 그는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일 뿐인 할례를 이방인들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했기 때문에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명제적 진술을 강하게 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때 대부분 ‘구원을 받으리라’고 미래형으로 썼습니다(살전5:9; 빌1:19; 롬5:9~10; 10:9,13) 물론 현재형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고전15:2-우리말 성서는 미래적으로 번역했으나 헬라어 본문은 현재형으로 써져 있음.).

   하지만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τῇ γὰρ ἐλπίδι ἐσώθημεν˙)”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과거 수동태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에 젖어버린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소망’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믿음’으로 대체하여 예수를 믿는 순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으로 생각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명백하게도 ‘믿음’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에서 ‘소망으로’와 과거형으로 표현된 ‘구원을 받았다’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주석적 이해가 달라집니다(아래 주석들 참조). 하지만 어떤 내용의 연구이든지를 막론하고 바울의 구원론을 통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그러나 ‘오직’ 믿음, 그것 하나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에 일반적인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믿음 이외의 것은 모두 ‘중간탈락 방지용’ 말씀

   그러면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무엇으로 완성시킨다는 것인지, 그리고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중간탈락의 가능성이 있다는 뜻인지에 대해 질문하게 됩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구원은 믿음으로 되지만 그 구원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들이 필수라는 주장을 바울도 했습니다(고전15:2; 고후7:10; 빌2:12 참조↔살후2:10; 딤전2:15 비교 참조). 그러므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중간탈락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교훈이 바울에게서도 명확히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롬2:6~10; 13:2; 14:10; 고전5:5; 고후5:10; 6:1; 12:21; 갈5:10,15).

   실제로 그의 제자단에서 나온 서신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든지 중간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명확하게 짚어서 말했습니다(살후1:8~9; 2:15; 딤전1:19~20; 5:12; 딤후2:16~19 참조).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길 원하십니다(롬1:16; 3:22; 10:11~13; 딤전2:4 etc.).

   믿음 안에 있다가 믿음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늘 있어왔습니다. 그래서 일반서신은 말할 것도 없고 요한문헌들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중간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히6:4~6; 약5:9 벧전1:17; 4:17; 벧후2:9; 3:7; 유15; 요5:29~30; 계20:12~13 참조.). 그래서 성서저자들은 중간에서 탈락하는 일이 없도록 믿음생활에 최선을 다해 힘쓰자고 권고하였습니다(히10:22~25,39 ↔26절~31절 대조 비교).

   그러나 중간에서 탈락하지 않고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었고 숫자적으로 마치 제한된 것처럼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롬9:27 및 11장 참조) 칼빈의 이중예정론이 나올 만 했습니다. 하지만 위의 본문내용들은 부인할 수 없게도 구원은 “‘오직’ 믿음”, 그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명백한 표지입니다.

 

“신약성서 전반에 걸친 통합적(統合的), 통전적(通典的)인 구원론을 위해”

   이처럼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구원론이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닌데도 개신교의 구원론은 “‘오직’ 믿음으로”된다는 생각에 깊이 젖어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마틴 루터가 로마서의 한 구절에 손을 대면서 주장한 ‘솔라 시리즈(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구원으로 예정된 자는 누구 하나 결코 잃어버려지지 않고 반드시 구원된다는 이중예정 교리는 ‘믿음 이외에 구원을 위한 다른 요소는 없다’고 못 박아 족쇄를 채워버리는 형국을 만들었습니다.

   이 같은 비-바울적, 비성서적인 교리가 특히나 더 우리나라에서 흥왕하게 된 이유는 대한성서공회의 ‘원문수정 행태’가 고쳐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본대로 헬라어 원문에 없는 ‘오직’이라는 단어가 우리말 번역 성서에만, 심지어는 루터조차 손대지 않은 다른 여러 구절들 안에서도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서는 여러 다양한 책들이 하나로 묶여 이뤄진 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전체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다양한 말씀들을 포용적으로 수용한 ‘구원론’을 기술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한 책 안에 들어 있는 각 책들이 주장하는 서로 다른 내용들을 모두 담아내는 ‘구원관’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서본문에 충실한 구원론을 다시 정립하기 위해서는,

①마틴 루터의 ‘솔라 시리즈’중에서 무엇이 어떻게 굴절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짚고 그에 근거하여 개신교의 구원론을 재정립해야 하며,

②성서본문을 편취하여 자신의 논리적 주장을 주입해 만든 칼빈의 이중예정론은 성서본문 전반에 대한 통합적-통전적인 시각에 의해 보편구원론으로 반드시 교정되어야 하고,

③대한성서공회는 헬라어 본문에 없는 '오직'이라는 우리말을 모두 다 빼내어 '구원은 '오직' 믿음, 그것 하나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성서적 구원론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함으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굴절된 비-바울적, 비성서적 구원론을 명확하게 바로 세워 성서본문 전반을 아우르는 구원론을 정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지금까지 굴절된 채 꼬부라져 있는 그리스도교 믿음체계가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성실한 지성에 의해 바로잡혀서 성서본문에 똑바로 선 그리스도인들의 성숙한 믿음생활을 소망해 봅니다.

 

※참조내용

롬8:24의 ‘소망으로 구원 받았다(τῇ γὰρ ἐλπίδι ἐσώθημεν˙)’에 대한 주석들

 

김동수, 로마서주석(대전: 엘도른, 2013), 542.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소망의 상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것은 믿음은 앞으로 성취될 구원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박익수, 로마서주석Ⅱ: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복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8), 69-70.

   바울은 미래에 대한 ‘소망’과 관련해서 ‘믿음’을 언급한다. 비록 이 시대가 고통과 시련의 때라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갖고 기뻐할 수 있다. 바울은 ‘고대하다’를 세 번째 사용하여 믿음을 갖는 사람들은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주실 미래에 대해 확고하고 지속적인 대망을 갖는 것과 똑같은 ‘열렬한 대망 상태’에 남을 것을 강조한다.

 

차정식, 로마서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성서주석(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70-71.

   바울은 여기서 ‘그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동시에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구원을 확신케 하는 매개체라면 소망은 그 확신을 견고하게 지속시켜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하는 지렛대라 할 수 있다.

   ‘구원을 얻었으매’는 수동태 과거시제의 표현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말한다. 여기에 붙은 ‘소망으로’라는 미래지향적 단서는 그 구원이 여전히 희망사항으로 남아 있다는 함의를 전한다. 믿음과 소망은 서로 하나이다.

 

Achtemeier, P.J. 로마서: 현대성서주석/목회자와설교자를 위한 주석(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212.

   이 본문은 하나님이 그의 더럽혀진 피조물을 원래의 선함으로 회복시키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회복의 약속이 아직은 그냥 약속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소망 안에서 믿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 소망은 이미 우리의 구원의 시작이지만 그것은 지금 현재는 시작에 머물러 있는데 그 사실은 우리에게 상당한 인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Dunn, D.G.D. 로마서(1장-8장: 38상, WBC). 김철, 채천석 역(서울: 솔로몬, 2003), 792.

   소망과 관련되는 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소망 그 자체는 구원의 완성이 아니다. 종말론적인 긴장의 ‘이미’와 ‘아직 아닌’ 간의 균형이 이 한 구절 속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Käsemann, E. 로마서: 국제성서주석(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2), 389.

   소망은 이미 구원받은 자가 완성된 구원을 향해 살아가는 상황이다.

 

Byrene, S.J. B.(edit.) D.J. Harrington. Romans:: Sacra Pagina Series vol.6(Collegeville, Minn.:Liturgical Press, 1996), 264-265.

   The mention of salvation as a reality already present is striking, since elsewhere Paul refers "salvation" to the future, eschatological deliverance heralding the arrival of the final age.... we really are already "in a situation of salvation."

 

Moo, D.J. Rom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Grand Rapids, Mich.: Zondervan Publishing House, 2000), 269-267.

   We were "saved" in this hope; that is, hope has been a part of our salvation since the time of our conversion. the very nature of hope means that we await something we cannot now see.

 

Moo, D.J. The Epistle to the Romans(Grand Rapids, Mich.: W.B. Eerdmans Pub. Co, 1996), 521-522.

  →번역서: 더글라스 J. 무. 로마서(3쇄): NICNT. 손주철 역(서울: 솔로몬, 2015. 참고.

   Hope, Paul is saying, has been associated with our experience of salvation from the beginning. Always our salvation, while definitively secured for us at conversion, has had an element of incompleteness, in which he forward look is necessary.

 

Morris, L. The Epistle to the Romans(Grand Rapids, Mich.: W.B. Eerdmans Leicester, England: Inter-Varsity Press, 1988), 324-325.

   But it is Paul's habit to speak of being saved "by faith", and hope certainly does not have the same place as does faith, though the two are closely connected. it's better to render "in hope". there is little to be said for "for hope". Salvation is often seen in the New Testament as future(5:9), and sometimes as present(1cor.1:18). But it is also past. So the aorist tense brings out an aspect of salvation which the other tenses do not. We look forward in hope to the full realization of what Christ has done for us..... the Christian salvation have yet to appear.

 

Schreiner, T.R. Romans(Grand Rapids, Mich.: Baker Books, 1998), 439.

  →번역서: 슈라이너. T. 로마서(3쇄). 배용덕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5.

   Yet even here the future dimension of salvation is not lost, for he adds the words "in hope", thereby anticipation the completion of the salvation now enjoyed. Most probably the dative is associative, signifying that hope is the companion of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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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182.222.57.168)
2016-02-27 02:11:52
오늘날 크리스천들에게 도움이 되고 도전이 될만한 주제입니다. 믿음과 행함의 조화말이죠. 또한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했을 때 얼마나 믿음에 대해 강조해야 하고 싶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당시 배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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