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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 견인론과 거짓선지자의 주장 비교 분석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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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10월 14일 (수) 13:53:38
최종편집 : 2015년 10월 14일 (수) 13:55:53 [조회수 : 2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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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인 견인론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영원한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이론입니다.

여기에는 이중선택사상-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별도로 적었습니다-이 가장 중요한 기초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선택(개인적 선택)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은 자가 바벨론을 통한 멸망에서 보호를 받아 멸망하지 않은 것을 그 실현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포로되었다가 돌아오는 것은 새 언약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영원한 구원에 대한 예표도 아닙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은 이스라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서 조상들의 하나님에 의해 멸망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직면하게 되고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방 민족이 일으키는 전쟁으로 방편으로 하는 멸망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평강을 약속하였습니다(렘 14:13-14). 이스라엘은 예레미야가 아닌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받아들였고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무조건적인 견인론은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멸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삶을 살 수도 있는데 그러한 경우에는 돌이키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회개하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회개하게 만드신다는 말이 됩니다. 그럴 것이면 뭣 땜에 회개하라고 하십니까? 그냥 다 회개하게 만드시지요.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신이십니다. 언약에는 그 자체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시하신 명령이 있습니다. 그 명령을 순종하면 누리는 복과 불순종하게 주어지는 화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언약에 신실하다는 것은 언약에 담긴 내용 전체에 대해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순종에 대한 복을 집행함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불순종에 대한 화를 집행함에 있어서도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견인이나 거짓선지자의 주장은 이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결과입니다.

무조건적인 견인론과 거짓선지자의 주장은 내용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조건적인 견인론을 주장하면 거짓선지자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판단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다만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거짓선지자의 주장과 내용적으로 같은 말을 하는 것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하루 속히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의 위험성을 인지하여야 합니다. 거짓선지자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깊이 인식하여야 합니다. 동기가 순수하거나 의도가 좋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짓선지자도 그 면에서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이 자기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말하고자 하는 충심의 결과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과 다른 잘못된 메시지는 그 모든 것을 아무 의미 없게 만들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앞 뒤 문맥에서 심는 것은 명백하게 삶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느냐(갈 6:2) 하지 않느냐 다르게 말하자면 성령을 위하여 심느냐 아니면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느냐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고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자기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둔다(갈 6;8)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썩어진 것은 영생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영원한 멸망이 분명합니다. 이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무조건적인 견인론은 여기에 정확하게 부합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어 그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는 일은 없다고 하는 것에서부터 말입니다.

신자 앞에 놓은 가능성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입니다. 성령을 위하여만 심게 되는 한 가지가 아니라 성령을 위하여 심느냐 아니면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느냐는 두 가지입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영생을 거둘 수가 있고 썩어진 것을 거둘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렵고 떨림이 있습니다. 특별한 선택을 받은 이들이 있어서 그들은 반드시 성령을 위하여 심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만 되는 일이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두렵고 떨림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 곧 경외입니다. 무조건적인 견인론은 경외를 약화시키거나 없애버립니다. 경외가 밑바탕이 된 감사이어야 하는데, 경외가 약화되거나 없어진 감사만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경외와 함께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그 역사를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영접함인 믿음을 토대로 하여 의지함인 믿음과 그 열매인 순종으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한 일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가 그 열매를 맺는 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칼뱅의 이중선택사상 비판

칼뱅의 이중선택사상은 무조건적 견인론의 가장 중요한 기초이면서 거짓선지자가 출현하는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중선택사상이란 하나님의 선택이 이중적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 선택(또는 민족적 선택)과 특별한 선택(또는 개인적 선택)입니다. 일반적 선택 안에 특별한 선택이 별도로 있다는 것입니다. 또는 민족적 선택 안에 별도의 개인적 선택이 있다는 말입니다. 칼뱅의 전자의 근거로는 항상 구약 성경의 선택에 관한 진술을 제시하고 후자의 근거로는 신약 성경의 선택에 관한 진술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성경의 남은 자들입니다. 성경에서 남은 자는 다양하게 나오는데, 대표적인 경우는 이사야서와 로마서의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사 10:21-22).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11:5).

이사야서는 남 유다의 멸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합니다. 바벨론을 통한 멸망입니다. 그런 중에 어떤 사람들은 죽지 않고 포로로 잡혀갔다가 정한 기한이 차자 돌아오게 됩니다. 남은 자들입니다.

유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며 출애굽의 은혜를 입은 언약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는데 특정한 사람들은 보호를 받았습니다. 유다 전체가 하나님의 선택 안에 있었는데 그 중에서 멸망하지 않고 보호받는 남은 자는 별도의 선택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칼뱅은 이런 상황에 대해 일반적 선택(민족적 선택)과 특별한 선택(개인적 선택)으로 구분하여 말한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그의 구분은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유다 땅에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자기 백성이란 이스라엘 백성 곧 유대인들을 뜻합니다.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들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과 맺은 언약 정확하게는 직접적으로는 그들의 조상과 맺었고 그들에게 여전히 유효하였던 언약을 공적으로 끝내기 전에 받아들일 사람들은 다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 사도가 말한 은혜로 택하심을 따른 남은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기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이 특별하게 은혜로 택하심을 따른 남은 자로 구별되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맺은 언약을 공적으로 완전히 끝내기 전에 복음으로 초청을 받아 예수님이 완전하게 하신 새 언약의 백성으로 살게 됩니다. 전체 가운데 부분으로 구별됩니다. 칼뱅이 말한 일반적 선택(민족적 선택)과 특별한 선택(개인적 선택)에 해당됩니다. 표면적으로 이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칼뱅과 같은 구분이 옳은 것일까요?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이는데 실제로 그러한 것일까요?

성경은 언약의 책이고 그 내용은 언약에 관한 것이기에 언약적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그분의 경륜을 따라 갱신하셨습니다. 아담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포로 후 회복 언약인 새 언약, 예수님을 통해 완전하게 된 새 언약입니다. 한 언약의 시대의 마지막 즈음에 새 언약의 시대를 펼치시는데, 그때에는 새 언약의 시대에 참여하여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새 언약 시대에 참여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단절됩니다.

이사야서는 모세 언약 시대에서 포로 후 회복 언약인 새 언약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포로 후 회복 언약인 새 언약 시대에서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새 언약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가 그 배경입니다. 각각 이전 언약의 시대에 속한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심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방 민족의 침략을 통한 멸망이 심판의 방법입니다. 전자는 바벨론을 통한 멸망이고 후자는 로마를 통한 멸망입니다. 후자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멸망과 돌 성전 파괴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남은 자는 이전 언약에 속하여 있다가 이후 언약인 새 언약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서의 남은 자는 모세 언약에 속하여 있다가 포로 후 회복 언약인 새 언약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로마서의 남은 자는 포로 후 회복 언약인 새 언약에 속하여 있다가 그것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님의 새 언약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기 이전과 이후가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이전 언약에 속하여 있었지만 그 이후의 언약 새 언약에는 속하지 못하였습니다. 부르심을 받음으로 새 언약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곧 옛 언약에 속하였지만 새 언약에 속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의 관점에서는 언약의 백성이지만 새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언약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하여 새 언약의 백성이 됩니다.

그 이전의 출애굽을 생각하면 더 쉽습니다. 애굽 땅에 살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관점에서는 언약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고자 하십니다. 언약의 시대를 진전시키는 것입니다. 모세 언약 곧 가나안 언약입니다. 그 언약은 출애굽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출애굽 이후에 출애굽한 이들이 그 언약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은 모세 언약에 참여시키는 하나님의 부르심 곧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출애굽 이전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의 관점에서는 언약의 백성이지만 모세 언약의 관점에서는 언약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을 통하여 새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여 모세 언약 관계에 들어갔습니다.

모두가 원리에 있어서 똑 같은데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모세 언약은 출애굽 이전 모두에서 출애굽 이후 모두였습니다. 포로 후 회복 언약은 포로되기 전 모두였지만 이후에는 남은 자였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완성된 새 언약에서도 이전은 모두였지만 이후에는 남은 자였습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전 언약에서 이후의 새 언약 안으로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 모두입니다.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온 모두입니다. 이전 언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부와 남은 자라는 특별한 부분으로 구분되지만 새 언약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없습니다. 그들이 바로 모두인 것입니다. 새 언약의 시점에서 그들은 모두이지 그 안에서 어떤 특별한 부분이란 없습니다. 일반적 선택(민족적 선택)과 특별한 선택(개인적 선택)을 말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포로 후 회복 언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새 언약으로 들어오게 되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알곡입니다. 그리고 알곡 안의 알곡이란 없습니다. 가라지는 하나님의 부르심 곧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새 언약 안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와는 애초에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곧장 새 언약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역시나 알곡입니다. 그들 중에서 별도의 특별한 알곡이란 없습니다. 칼뱅의 이중선택사상이 옳다면 이방인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아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온 이들 가운데서도 일반적 선택을 받은 자들과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들의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새 언약은 마지막 언약입니다. 그 이후 언약은 없습니다. 이 시대에는 그 새 언약 안으로 부르심을 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와 그 부르심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비신자입니다. 신자 안의 신자는 없습니다. 신자가 아니면 비신자일 뿐입니다.

칼뱅의 이중선택사상은 성경을 표면적으로 읽은 잘못으로 나타난 성경적이지 못한 주장입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제가 쓴 책, <닫힌 성경 열기> 70~78쪽에 있습니다..

 

사족1.

거짓선지자의 주장과 내용적으로 같은 말을 하는 삶에서 돌이키십시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을 생각하여 하루라도 속히 말입니다.

사족2.

남은 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알미니안주의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외침에 응답하지 않고 멸망의 길을 가는 이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저항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옛 언약에서 불순종에 대한 심판으로 멸망당하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과 연관시켜 읽은 것입니다. 칼뱅과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오십보백보입니다. 돌이켜야 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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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2.72)
2015-10-17 22:37:02
창진형에게
아울러 부탁 하나 더.
형, 허설 제작에 힘빼지 말고
여기 당당뉴스에 메인으로 올라온
<한국교회와 하느님나라>란 칼럼 좀 읽어 봐.
형의 설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따져 봐.
적어도 주제는 알아야 할 것 아니야?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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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121.134.210.15)
2015-10-17 08:49:58
어차피
철이 나기에는 어려워 보이는 창진씨,
어느 노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기독교 교리를 논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짓이요.
기독교 진리가 무엇인지 그걸 궁구하여 설하지 못한다면
손가락에 자물쇠를 잠그고 입에는 재갈을 물어야 할 거요.
어차피 제멋대로 살겠지만....

창진형, 부탁이 있어.
예수님께 여쭤봐.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시느냐고?
나는 여쭤봤는데 아는바 없으시대.
그게 뭔 소리냐고 하시던데?
그게 인생살이에 무슨 도움이 되는
견설이냐고 물으시던데?
창진형이 직접 여쭤보면 어떨까?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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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5-10-15 03:23:02
판단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맞는 말씀하셨습니다.
무조건 견인이든 조건적 견인이든
판단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이런 일에 너무 애쓰지 마시고
믿지 않는 자들이 믿음의 길로 들어가도록 애쓰시지요.
무조건 견인을 주장한다하여 마음대로 살라하지 않습니다.
조건적 견인을 주장한다하여 제대로 살지도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달렸고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에 의지합니다.
요즘은 사람이 만들어낸 책 속의 예수를 믿는 자들도 있지만 그마저도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내가 지켜야할 신앙 양심은 예수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요 주님이십니까? 그러면 되는 겁니다.
어디까지 선한 양심을 지키고 성령의 법대로 생활해야 구원을 이루는지 모르신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몫으로 맡기신다면 예수를 믿으라고만 외치십시오. 사람이 쓴 책의 예수가 아닌 예수를 외치십시오.
그리고 팁으로 선하게 살라고 외치십시오. 선한 일을 위하여 너희를 불렀다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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