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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세 단계, 믿음의 세 단계니체의 관점에서 복음서 읽기
김종길  |  jpic19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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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10월 13일 (화) 23:10:28
최종편집 : 2015년 10월 16일 (금) 18:32:56 [조회수 : 8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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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세 단계, 믿음의 세 단계

― 니체의 관점에서 복음서 읽기 ―

김종길 / 덕성교회

 

1. 들어가는 말

청소년 시기에 나는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방황했다. 어둡고 두렵고 외로운 시절에, 나는 운명처럼 니체(F. W. Nietzsche)를 만났다. 장르(genre)가 시인지, 소설인지, 철학인지 알 수 없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차라투스트라󰡕)에 이끌렸다. 열등감과 무기력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붙잡은 나뭇가지가 니체 철학이었다. 철학에 관심했다는 것은 그만큼 내 삶이 고달팠다는 것을 방증한다. 내가 니체에 마음이 끌린 이유는 아마도 그의 불우한 삶에 공감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망치를 휘두르는 니체는 파괴와 전복의 철학자이다. 의심과 경멸을 내세우는 그가 외쳤다. “위험하게 살아라!”(Gefaehrlich leben!) 기존의 가치에 도전하고, 삶의 한복판에 자신을 던져 실험하라는 것이다.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그동안 기죽고 억눌려 살아온 나는, 비로소 나답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교회에 나가서 니체는 ‘적그리스도’ 또는 ‘불신자의 괴수’라는 설교를 들었다. 믿음에 도움이 안 되는 몹쓸 사람이었다. 내 몸에 불신과 배교의 기운이 밸까 하여 더 이상 니체의 책을 읽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당시 유행한 설교가 성서적 복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른바 “삼박자 축복” 또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보다 니체의 가르침이 성서의 교훈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본질은 집착에서 벗어나 진리와 자유로 나아가는 것이다. 소유양식의 삶에서 존재양식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시방 교회가 니체에게 돌팔매질할 자격이 있는가? ‘친미반공,’ ‘자본주의,’ ‘기복신앙,’ ‘내세신앙’으로 편향된 한국 교회는 니체의 통찰과 경고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시골에서 느리게 사는 덕분에 이 책 저 책 기웃거리다가, 오랜 만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읽어본다. “모두를 위한, 하지만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교회에서 경계하는 ‘위험한 책’을 조심스레 열어본다. 이 책에는 ‘신의 죽음,’ ‘초인(Uebermensch),’ ‘권력의지(der Wille zur Macht),’ ‘영원회귀(die ewige Wiederkehr),’ ‘운명애(amor fati)’ 등 니체 철학사상의 핵심 개념이 담겨있다. 이 글은 책의 서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 정신을 살펴보고, 이를 예수의 복음과 비교하고자 한다.

 

   
 

 

2. 니체 철학 개요

󰡔차라투스트라󰡕의 서두에서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을 찬양하는 성자와 헤어지고 나서 이렇게 독백한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살고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다!” ‘신이 죽었다(Gott ist tot)’라는 명제는 니체 철학의 출발점이다. 그 명제는 오해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신(Gott)’은 하나의 해석이다. 여기서 신은 서양문명을 이룩한 최고의 가치다. 그것은 진리를 왜곡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기존의 가치, 권위, 전통 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신의 죽음은 기존의 가치가 전도되고, 형이상학적 초월 세계가 부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선악을 판단하는 절대적 가치 기준이 붕괴되었다. 절대적 진리를 내세운다면, 그것은 인간의 탐욕과 무지가 만들어낸 우상이다. 우상의 신을 죽여야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 하나님을 넘어선 하나님(God above God)을 만날 수 있다. 신의 죽음을 선포한 니체는 참 하나님을 만나고자 거짓 하나님을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에 이어서 ‘초인’에 관하여 가르친다. 그는 신으로부터 인간에게로 관심을 돌린다. 신을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창조의지가 긍정된다. 니체는 인간을 과정적 존재로 본다. “사람은 짐승과 초인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나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여기서 독일어 ‘Uebermensch’는 일본어로 ‘超人,’ 영어로는 ‘superman’ 또는 ‘overman’ 등으로 번역되는데, 뜻이 충분하지 않고 오해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근래에는 그냥 ‘위버멘쉬’라고 표기하는 경향이 있다. 이 용어도 독일어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낯설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말로 Uebermensch를 ‘참사람’이라고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편의상 관례를 따라 ‘초인’으로 표기하겠다. 초인이란 초월적 인격이나 초능력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초인이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권력의지’를 구현하는 주체적 인간을 말한다. 그는 ‘중력의 정령,’ 곧 자기 초극을 방해하는 관습과 인과율을 극복하고 자유롭게 춤추는 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초인과 상대적인 개념으로 ‘말인(letzte Mensch)’을 소개한다.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기존의 질서에 굴종하여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니체는 말인/속인이라고 부른다. “보라! 나 너희에게 인간 말종을 보여주겠으니. (…) 대지는 작아졌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왜소하게 만드는 저 인간 말종이 날뛰고 있다.” 이러한 현존재들은 하이데거가 지적했듯이, ‘반복,’ ‘호기심’ 그리고 ‘지껄임’ 등으로 일상에 묻혀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동경도 희망도 없다. “사람이 더 이상 그 자신 위로 동경의 화살을 쏘지 못하고, 자신의 활시위를 올릴 줄도 모르는 그런 때가 오고 말 것이니!” 그들은 소유와 건강에 집착하고,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하고 외치며 눈을 깜박인다. 말인은 이 땅을 왜소하게 만든다.

신의 죽음 이후에 모든 가치와 목적이 상실된 ‘허무주의(nihilism)’가 도래한다. 신의 죽음은 기독교 이후의 사건이다. 그것은 세속화, 탈마법화, 비신화화의 사건이다. 현대는 허무주의 시대이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허무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인간은 의미를 상실한 삶을 어떻게 견디어낼 것인가? 여기에 성실과 용기라는 덕목이 요구된다. 수동적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능동적 허무주의를 선택하라. 적극적으로 무의미를 끌어안아라. 용감하게 허무를 직면하고, 절망의 심연을 직시하라. 삶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라. 주어진 삶을 긍정하고, 현실에 충실하여라.

허무에 직면하여 삶을 견디어내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권력의지(der Wille zur Macht)’라고 한다. 니체는 생명체를 볼 때마다 권력의지를 함께 발견했다. 권력의지는 모든 생명체의 본성인 것이다.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평가하는 것이 ‘권력의지’가 드러나는 방식이다. 권력의지는 생명의 원동력이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은 권력의지의 산물이다. 모든 존재자는 자신의 고양과 확장을 추구하기에, 세계의 특성은 ‘투쟁’으로 드러난다. 권력의지는 자기를 극복하여, 타자를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존재의 내적 충동이다.

니체는 헤겔의 발전사관 및 기독교의 목적론적 역사관에 반대하여 ‘영원회귀(die ewige Wiederkehr)’를 주장한다. 이 세계를 부정하고 저 세계를 추구하는 이원론에 대하여, 니체는 저 세계를 허구로 보고 현실만을 긍정한다. 영원회귀는 끝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인연생기(因緣生起)와 상통하는 개념이다. 영원회귀는 허무주의의 극단적인 형식이다. 삶은 허무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것이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동일자의 영원회귀를 선택적인 것으로 보고, ‘차이의 반복’으로 해석하였다. 영원회귀는 니힐리즘의 극단적인 형식이다. 삶에는 가치와 목적이 없다. 우연적 사건이며 생성의 과정인 삶은 무한히 반복된다. 어떻게 무한히 반복되는 삶을 견디어낼 것인가? 삶을 긍정하고, 대지(현실)에 충실하라고 니체는 조언한다. 너의 행위가 무한히 반복되어도 좋은 것이 되도록, 그렇게 행동하라. 어느 광고문에 보이듯이, 한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권력의지는 삶의 본질이고, 영원회귀는 삶의 형식이다. 권력의지는 스스로 규정한 운명을 선택한다. 양자는 ‘운명애(amor fati)’에서 통일된다. 운명애는 현실 긍정의 절정이며, 영원히 반복하는 삶에 대한 주체적 대응 방식이다. 운명은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닥쳐온다. 운명에 거역하거나 굴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필연적인 운명을 긍정하고 수용하여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하는 자가 초인이다. 운명을 사랑하는 이는 춤추는 자다. 춤은 중력을 극복하는 예술이다. 무거운 짐을 진 자는 춤출 수 없다. 삶의 짐을 벗고, 몸을 가볍게 해야 한다. 삶을 긍정하고, 자신의 약점까지 수용하라. “곱사등이에게서 곱사를 제거하는 것은 그에게서 혼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을 사랑하면 춤을 춘다. 인간의 위대함은 운명애에 있다.

 

3. 정신의 세 단계 변화

초인을 실현하려면, 정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머리말에 이어서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관하여 가르친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를 설명할 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어떻게 사자가 되며, 마지막으로 사자가 어떻게 아이가 되는지를.” 세 가지 정신을 살펴보자.

 

(1) 낙타의 정신

낙타의 정신이란 금욕과 복종의 정신을 말한다. 낙타의 정신은 복종이 내면화되어, 너는 해야 한다(You should)라는 명령에 저항하지 않는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가장 무거운 것이란 무엇인가? 낙타는 무릎을 꿇고 앉아 무거운 짐을 싣기를 기다린다.” 낙타가 등에 지는 더없이 무거운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낮추는 일,” “진리를 위해 영혼의 굶주림을 참고 견뎌내는 일,” “진리의 물이라면 더러운 물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고 차디찬 개구리와 뜨거운 두꺼비조차 물리치지 않는 일” 등이다. 낙타는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의지를 확인한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다. 이러한 낙타의 장점에는 위험이 따른다.

사유가 없는 복종은 굴종으로 전락한다. 겁이 많은 낙타는 두려움 때문에 복종한다. 그것은 노예의 도덕이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사막으로 들어간다.” 억제와 굴종은 결국 삶을 사막처럼 황폐하게 만든다. 스스로의 주체성이 상실되고 욕망이 좌절됨으로써, 낙타의 정신에는 ‘르상띠망’(Ressentiment, 怨恨)이 쌓여간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품게 되는 원한 감정을 상세하게 다룬다. 르상띠망이 자신을 향하면 ‘양심의 가책’이 된다. 다른 한편, 원한 감정이 타인을 향하여 공격적 분노로 나타난다. 낙타의 정신을 지닌 자는 타인에게 분노를 표출하여 원한을 해결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나와 다른 타자에게 배타적으로 대하고, 나보다 약한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난폭하고 잔인하게 행동한다. 겁이 많은 토끼가 뿔이나 날카로운 이빨을 갖게 된다면 아주 사나운 짐승이 될 수 있다. 그리함으로 열등감을 숨기고 보상받으려 한다. 르상띠망의 지배를 받는 자들을 니체는 ‘노예’라고 부른다. 노예가 비굴하게 복종할수록 그의 원한은 깊어간다.

니체는 기독교를 노예 도덕이라고 경멸한다. ‘원죄론’이나 ‘대속설’ 그리고 ‘칭의론’ 등의 교리는 죄의식에 근거해 있다. 기독교의 죄의식은 르상띠망의 발로이다. 원한감정은 가학적이고 공격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마녀 사냥, 유대인 학살, 십자군 전쟁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고양하려면, 원한감정을 풀고 노예 도덕을 극복해야 한다. 낙타의 정신은 사자의 정신으로 극복된다.

 

(2) 사자의 정신

사자의 정신은 용감하고 자유로운 정신이다. 그것은 인습을 비판하고 불의에 저항한다. “황량한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이곳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고, 자유를 쟁취하여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사자는 부정의 정신으로 전통 질서에 저항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정신에 사자가 왜 필요한가? (…)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고, 부과된 의무를 신성하게 부정하기 위해서는 사자가 필요하다.” 사자는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옛 주인이 되는 용과 대결한다. “사자는 거대한 용에 맞서 싸운다. 용의 이름은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이것이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가 말한다. ‘나는 하고자 한다.’ (…) 모든 용들 가운데 가장 힘센 용이 말한다. ‘사물의 모든 가치는 나에게서 찬란하게 빛난다.’” 거대한 용(중세 기독교 체제에 근거한 서양문화)은 ‘마땅히 해야 한다(sollen)’를 내세우며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강요한다. 이에 대해 사자는 스스로 ‘하고자 한다(willen)’ 하고 응수한다. 타인의 의지에 복종하는 낙타가 자신의 삶을 사막으로 만들지만, 자기의 의지를 의욕하는(I will) 사자는 자신의 왕국을 세운다. 기성 전통을 비판하는 니체의 철학은 사자의 정신을 잘 드러낸다.

그런데 사자가 자유를 쟁취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삶을 긍정하는지 알지 못한다. 부정의 정신은 긍정의 정신을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이가 할 수 있다.

 

(3) 어린이의 정신

차라투스트라는 창조적인 인간이 되려면, 정신이 ‘사자’에서 ‘어린이’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항과 투쟁에 주력하는 사자는 인생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나의 형제들이여, 사자도 할 수 없는 일을 아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어떻게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사자는 비판하고 부정하지만, 어린이는 자기와 세계를 긍정한다(I am).

어린이는 순수하고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을 상징한다. “아이는 순수이고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자 놀이이다.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이고, 최초의 움직임이며, 거룩한 긍정이다.” 어린이의 마음은 깨끗하다. 벌거벗은 임금의 몸을 있는 그대로 본다. 어린이는 변화에 적응하고, 원한을 망각한다. 그의 마음에는 상처와 독기가 서려있지 않다. 아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으로 재미있는 놀이를 발명한다.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어린이는 자신의 소원을 좇아서 행동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긍정을 통하여 아이들은 놀이를 위한 새로운 규칙과 가치를 창조한다.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homo ludens)다. 놀이는 인생의 중요한 요소다. 삶에는 춤과 웃음과 재미가 필요하다. 속담에도 있듯이,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제대로 놀 줄 모른다. 어른들은 타인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경향이 있다. 라캉(Jacques Lacan)은 “자신의 욕망을 욕망하라”고 충고하였다. 어린이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래서 놀이가 신나고 재미있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자신의 의지를 원하는 자가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초인은 어린이의 정신을 지닌 자이다.

 

4. 믿음의 세 단계

이제 니체의 관점에서 복음서를 읽어보고자 한다. 그의 도식을 성서본문에 적용하면, 믿음을 세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대화를 위한 실험으로 보고 양해하기 바란다. 마가복음 7장, 8장, 10장에 나타난 세 가지 믿음, 곧 ‘전통의 믿음,’ ‘십자가의 믿음,’ ‘어린이의 믿음’을 살펴보겠다.

 

(1) 전통의 믿음

마가복음 7장은 유대교의 특성인 전통의 믿음, 곧 율법주의에 관하여 보도하고 있다. “바리새파 사람과 모든 유대 사람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 그 밖에도 그들이 전해 받아 지키는 규례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 씻는 일이다”(7:3-4). 제2 성전시대에 형성된 초기 유대교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존을 유지하고자 제의와 율법 준수를 강조하였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제의는 형식화되고 생명력을 상실하였으며, 율법은 폐쇄적인 도그마로 전락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잘 지키면 의롭게 된다고 믿었다. 장로들의 전통은 구전으로 전승된 모세 율법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이다. 유대교는 형식적인 전통에 집착함으로써, 율법의 본의인 “정의와 자비와 신의”(마 23:23)를 버렸다. 그리하여 종교는 체제와 기득권을 유지하는 도구가 되었다. 오늘날 이러한 현상은 한국 교회의 주류를 형성한 근본주의 신앙에서도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7:8)고 비판했다. 예수는 율법을 회복하고, 죄인을 구원하러 세상에 온 것이다.

율법주의는 복종을 내면화하며 ‘르상띠망’을 축적하였다.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회칠한 무덤’처럼 위선적으로 행동하였다. 율법에 집착할수록 내면에서는 자기 분열이 일어났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 거룩한 모습 뒤에는 나쁜 생각이 숨겨져 있었다.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7:21-22). 규율을 강요하는 사회는 원한감정도 깊다. 원한을 품은 자들은 타자를 배척함으로써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한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한 증오심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다른 한편, 전통에 얽매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민중에게 무자비하였다. 공동체를 보호해야 할 율법은 도리어 민중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었다. 기존의 성전 체제는 죄인들을 대량 생산하였다. 이른바 ‘죄인’은 전통의 희생양이었다. 예수님 당시 율법주의로 굳어진 유대교의 모습을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교회 개혁 운동은 르상띠망을 씻어내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2) 십자가의 믿음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는 장로들의 전통 대신에 ‘십자가의 믿음’을 제시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였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8:34). 예수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했다.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다. 틸리히(Paul Tillich)에 따르면, 속죄론에서 ‘대속’의 개념이 ‘참여’의 개념으로 바뀌어야, 구속의 참 의미가 드러난다. 제자들이 지는 십자가는 자기 부정과 현실 비판의 정신을 상징한다. 십자가의 믿음은 헛된 욕망에 집착하는 자신을 부정하고, 기존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기를 거부한다. 블로흐(Ernst Bloch)는 저항과 반역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해방신학, 흑인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은 십자가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유대교의 카발라(Kabbalah) 운동에서 보듯이, 전통에 저항하는 믿음이 때로는 신비주의(mysticism)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수님의 저항정신은 십자가 사건으로 귀결되었다. 로마 황제를 하나님으로 숭배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예수는 결국 신성모독과 체제전복의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새롭게 해석한 바울은 십자가의 믿음을 강조하였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18). 바울은 에둘러서 정통 유대교를 비판하고, 로마 제국에 저항하였다. 그는 십자가 사건을 묵시적으로 해석하였다. ‘복음,’ ‘신앙,’ ‘정의,’ ‘평화’ 등 로마 제국의 정치적 용어들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여, 반제국적인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믿음,’ ‘그리스도의 평화,’ ‘하나님의 의’ 등의 용어는 바울신학의 키워드가 되었다.

구약성서로 거슬러 올라가, 욥에게서도 십자가의 믿음을 찾아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욥은 인내와 순종의 인물로 인식되지만(약 5:11),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욥은 도발과 항변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욥 23:2-3). 욥기는 인과응보를 강조하는 정통신학을 거부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급진신학을 표방한다. 욥에게서 도발과 항변은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새로운 세계를 실현하는 희망의 언어다.

 

(3) 어린이의 믿음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는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 당시 사람들은 어린이를 과소평가하였지만, 예수는 어린이를 소중히 여겼다. 어린이들이 접근하는 것을 제자들이 막자 그가 분노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0:14-15).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는 구원의 표상이다. 예수의 말씀에 따르면, 어린이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어린이와 같이”라는 구절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킨다. 어린이의 특성은 무엇일까? 어린이는 무능력하기에 부모에게 온전히 의존한다. 시편 131장에서 아기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 뗀 아이와 같습니다”(시 131:2). 젖먹이 아기는 엄마 품에서 즐거워한다. 신앙이란 어린이(小我)가 어머니(大我) 품에 안기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경지를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는 “절대의존감정(schlechthinige Abhaengigkeitsgefuehl)”이라고 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다. 나도 비고 하나님도 비어있다. 예배하는 이와 예배받는 이가 둘 다 비어있기에, 기도(祈禱)가 온전하게 소통된다. 축의 시대(axial age)에 해당하는 포로기에, 이스라엘의 영성은 보다 깊어졌다. 신명기에서 ‘야웨를 두려워하라’는 명령은 “야웨를 사랑하라”(신 6:5)는 권면으로 바뀐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랑으로 바뀐다는 것은 관계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의 관계는 이웃으로 확장된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레 19:18; 마가 12:31). 예수는 르상띠망을 잊고, 원수까지 사랑할 것을 역설했다(마태 5:44). 신명기법전(신 12-26장)의 서두에서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는 명령이 반복하여 나타난다(신 12:7, 12, 18).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는 것은 예배자가 어린이처럼 되라는 뜻이다.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rancesco)는 어린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사랑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어릿광대라고 하였다. 단순한 믿음으로 기꺼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다른 한편, ‘어린이’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 나라는 어린이처럼 무력하고 시시하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다는 정답을 찾아낸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 가운데 아무도 그리스도를 경배하러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은 베들레헴의 외양간보다 헤롯의 궁전이 더 좋았던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헤롯 대왕에 비하여, 동굴 속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는 초라하다 못해 비참하였다. 가치의 전환으로, 별 볼일 없는 하나님 나라를 소중히 여기기. 이것이 어린이의 믿음이다. 순수한 믿음의 눈으로 볼 때, 보잘것없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발견된다.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막 9:34)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는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에, 그를 껴안아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9:37). 천국을 사모하는 이들은 자신을 낮추고 천한 자들과 동일시하고,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9:35).

 

5. 맺는 말

중국 송나라 진종 경덕(景德) 원년(1004년)에 기록된 󰡔전등록(傳燈錄)󰡕에 나오는 말이다. ① 산은 산이다(山是山). ② 산은 산이 아니다(山不是山). ③ 산은 역시 산이다(山祗是山). 이 명제는 선불교의 핵심을 보여준다. ①은 세간 중생이 살아가는 속계(俗界)의 상황이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앞에서 언급한 ‘낙타’의 정신(You should)이다. 그가 비판한 것은 낙타의 수준에 머물러있는 기독교 신앙(노예 도덕)이다. ②는 속세를 부정하는 출세간을 가리킨다. 비판하고 부정하는 ‘사자’의 정신(I will)이다. 예수님이 짊어진 십자가는 자기 부정과 세상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③은 부정을 통한 대긍정의 경지다. 삶을 긍정하는 ‘아이’의 정신(I am)이라 할 수 있다. 가장 깊은 믿음의 경지는 하나님 앞에서 신나게 놀며 춤추는 삶이다.

니체와 기독교는 서로 어긋난다고 알려져 왔다. 교회는 니체를 경계하고, 니체를 연구하는 이들은 기독교를 경멸한다. 과연 양자는 만날 수 있는가? 필자는 양자가 대화하며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성 질서에 저항하고 가치의 전복을 시도한 니체는 포효하는 사자이다. 니체가 󰡔거짓 그리스도󰡕에서 평가하듯이, 예수는 어린이의 순박한 마음을 품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니체와 예수를 연결하기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니체의 철학과 예수의 종교는 상이하게 보이지만, 근본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두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귀 속의 귀로 목소리 속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니체 철학을 어떻게 기독교에 적용할 것인가? 우선 니체의 기독교 비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으나, 궁극적 실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가 뒤틀려진 기독교를 비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다. 교회의 제도와 도그마를 공격했지만, 성서적 진리를 파괴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자폐적 독선을 극복해야 한다. 노예도덕과 원한감정에서 벗어난 성숙한 기독교는 허무주의 시대의 중요한 과제이다.

(金宗吉 / jpic19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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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203.226.192.94)
2015-10-14 00:06:01
합니다.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읽었습니다. 니체의 주장을 해석한 책들을 접해서 대략 알고 있었지만, 참 훌륭한 요약입니다.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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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9
포이멘 (183.109.99.69)
2015-10-14 10:19:48
원복

자유의지에 따른 자랑

실락원

그래도 자랑

또 다시 원복

그래도 율법을 따른 자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복

성령의 새로운 피조물 성도

가장 깊은 믿음의 경지는 하나님 앞에서 신나게 놀며 춤추는 삶이다.

순례하는 교회의 성도는 이러한 삶을 2000년 동안 살아왔다.


순례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이를 복마전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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