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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밤 친구에게최명희의 <혼불> 중 '인연'이란 글을 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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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5년 07월 08일 (금) 00:00:00 [조회수 : 3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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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학교 친구들과 찾아간
이학원 은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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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환아, 자네가 올린 최명희의 《혼불》중 '인연'이란 글을 읽고 내 넋두리를 늘어놓아 보련다.
"인연이 그런 것이란다. 억지로는 안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고잉. 지금 너한테로도 누가 먼 길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서는,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겄지. 물 한 모금 달라고."
한번 읽어 봐야지 하면서도 최명희의 혼불을 당 못 읽어 본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을까마는, 그 잉~하는 사투리에 홀려 나의 모태어인 남도의 말들이 가슴에서 효모를 넣은 밀가루 반죽 마냥 몽울몽울 부풀어 오르지 뭔가.
인연, 사람이 사람과 만나는 것이 어디 인연 없이 되는 게 있을까? 그 중에서도 남녀가 연인으로 만나는 인연은 정말 더 그럴 거야. 다섯째 고개를 넘기까지 수많은 사람과 여인들을 만나 봤지만, 인연은 최명희 말처럼 작위적인 노력만으로도 한계가 있나 봐.
난 호남에서 전후에 태어나 약 7년을 그 땅에서 보고 자라다가 1961년 여름에 서울살이를 시작했어. 출생지는 전남이지만 1962년 해방촌에서 이태원국민학교에 입학한 후로 내 고향은 서울해방촌이 되고 말았지. 처음엔 그 사투릴 쓰다가 1, 2 년 후엔 거의 잊어 버렸어. 아니 잊으려고 노력을 했을 거야. 내 무의식 속에 호남 태생이란 신분을 숨기고 싶었거든. 내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만큼 호남인에 대한 평판이 좋지 못함을 일찍 터득했나 봐. 가능한 빨리 서울사람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중학교 졸업장에까지 그 본적이란 꼬리표가 뒤따라다니더군. 드디어 경기도로 본적을 옮기고 나서, 결혼과 동시에 분가하여 서울 마포로 본적지를 바꿀 수 있었다네. 거기서 7년도 채 못 살어서 였을까? 당시엔 왜 그렇게 '전라도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이 싫었는지 몰라. 한 번은 내가 대광고에서 사귄 국(鞠)이라는 성을 가진 광주 출신 친구가 얼마나 넉살좋게 광주 사투리를 구사하던지 그 놈에게 푹 빠져 버린 적이 있었어. 한편은 그가 부럽기도 하고 한편은 내가 미웠어. 그 친구에게서 호남의 자존심과 애향심을 배우긴 했지만, 항상 호남에 대해서는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아.
그것은 우리 가족의 몰락을 인한 서울이라는 새로운 환경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국씨 친구처럼 오랜 세월 호남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면 나도 전라도 사투리를 버리지 못했을 것이고, 호남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남았을 테지. 전후에 산업 기반이 무너져 버려 온 국민이 절대 빈곤에 허덕이던 시절, 농경사회의 소작농으로 살던 호남의 서민층은 가난의 정도가 더 심했을 것 같아. 가세가 기울어져 무작정 서울로 먼저 상경하신 아부지를 찾아, 10여 명의 일가가 신천지로 이불 보따리를 둘러메고 올라왔어. 당시엔 피난민의 행렬과도 같은 빈민들이 무수히 탈 호남을 택했었지.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던 말이 돌던 으시시한 서울에서 호남 사람들이 적응하기 위해 얼마나 악착 같고 모질게 살았을까? 기존에 터를 잡고 살던 서울 사람들이나 다른 지방 사람들 눈에 전라도 출신들이 밉보이는 짓을 허다하게 해 왔을 것이 분명해. 인정하겠어. 특히나 박정희 군사 정권 밑에서는 호남인들이 경상도 사람들에게 더 차별을 많이 받았을 거야.
내가 1980대 초에 결혼 후 선교단체에 속하여 때마침 동교동 김대중 씨 집 고개 너머에 살면서 그가 신군부 헌병대에 잡혀가는 것을 목격했어. 호남 지도자들에 대한 군사정권의 보복 정치를 절실히 느꼈지. 어디서든 압박을 받는 민족이나 부족은 자체적으로 응집력이 강해지는 법이지. 호남사람들이 그랬던 것 같아. 그러면 따돌림을 받기십상이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선 뭉쳐야 했을 것 같아. 나역시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김대중 씨를 밀지 않을 수 없었어.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수많은 공과가 있지만, 그가 아직까지도 호남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있다면, 나는 그가 호남인들로 하여금 이 사회에 당당히 자신을 커밍아웃 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심어 주었기 때문일 것 같아. 나역시 그 점에서는 호남에서 대통령이 나온 것을 동서화합 차원에서라도 천만다행으로 생각할 정도야. 자네가 내 기분을 알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호남사람이면서도 나는 그들을 선택적으로 지지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어. 내 조부모와 부모, 형제자매가 호남인이요, 친척들 대다수가 호남인이라, 그 정서를 거스리기 어려웠지. 하지만 내가 내 인생 대부분의 세월을 서울에서 교육 받고 직장을 가졌으며, 서울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내 출생지 호남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말았지 뭐야.
남자들은 각 도를 불문하고 고루 사귀었지만, 여자들은 호남사람과 사귀어 본 적이 없었어. 그 이유가 뭘까 돌이켜 보니, 자석이 같은 극끼리는 서로 밀어 내는 성질과 비슷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아야 하는 혈연의 여인들은 다 호남 사람이야. 그들의 말투나 억양, 끈기와 억척스러움이 내겐 너무나 편하고 익숙해서였는지, 호남 여자들이 맘에 안 끌리더군. 교대에서 공부할 때 같은 학과에 호남 명문여고 출신 여학생들이 꽤 많았는데 그 중 한 여자도 눈에 안 들어오더군. 오히려 내가 좋아했던 여학생들은 마산이나 수원 출신이었어.
내 초등학교 은사님이신 하정자 선생님이나 이학원 선생님 사투리의 리드미컬한 목소리가 경상도 문둥이들을 좋아하도록 세뇌시켰을지 몰라. 나는 그렇게 믿고 싶어. 호남 여자들의 구성진 목소리는 판소리나 육자배기, 남도창을 들을 적 외엔 별로라는 생각을 해 왔어. 자네 눈엔 내 편견이 좀 이상하겠지. 들적지근하고 엉겨붙는 듯한 잉 소리도 싫어지고 자꾸 그런 끈끈한 육성에 정을 떼고도 싶었거든. 호남 여인들이 나에게 삿대질하며 배신자라고도 따지겠지만, 뼛속까지 스민 그 정한에 대한 그리움이 어디 가겠는가 싶어. 남도창을 접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청아하고 구슬픈 소리에 끌려가 그리움에 빠져들곤 하거든. 모순도 이런 모순이 있을까? 아무리 그들을 부인할지라도 어느 날엔가는 호남 여인하고도 홀연히 사랑에 빠져들지도 몰라. 찰떡 같이 끈한 정에 끌릴 것만 같아. 허허.... 문득 엄니 생각이 난담 말이시.
이봐, 일환이! 그녀는 죽었지만 최명희 씨도 얼굴 형이 갸름한 호남 미인일 것 같아. 호남 여인은 목소리를 들으면 단번에 드러나지만, 이목구비만 척 보아도 직감으로 알아차릴 수 있어. 내가 청년기 때는 이대에 다니던 호남 미녀가 내게 관심을 보인 적이 있었지만, 그 땐 호남인들을 하나같이 외면하고 있을 때라, 청춘 사업이 이루어질 수 없었지 뭔가. 쩝.
최명희 씨의 말처럼 인연을 다시 생각해 보았어.
'인연이 그런 것이란다. 억지로는 안 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고잉.'
하지만 나는 그녀 말을 살짝 비틀어 보고 싶어. 인연이란 과연 억지로는 안 되지만, 안 된다고 그냥 내버려 두는 사람에게는 결코 안기지 않는 법이라고 말야. 먼 길에 우연처럼 다가와 토방에 앉아 물을 달라고 청하는 그 사람이 나의 인연일지 아닐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인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기초적인 능력을 내친김에 한 마디로 표현해 보겠어. 그것을 좋게 말하면 용기요, 나쁘게 말하면 뻔뻔함이라 말해 주고 싶네. 용기가 없는 사람은 덩굴째 굴러 들어오는 호박일지라도 안을 순 없을 거라고 말야.
허접한 넋두릴 꺼내어 미안하네. 하지만 자신감이 충만하던 나역시 북한산 암벽도 뽑아들 것 같던 기력이 서서히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고, 이젠 원욕조차 사그라들 조짐을 보이니, 정말 52세라는 나이가 실감이 나지 뭔가.
여보게. 일환이! 빗소리 시원한 이 밤을 자넨 어떨게 보낼 셈인가? 달그락 달그락 이 자판 두드리는 소리와 장마 빗소리가 정말 잘 어울린다네.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정감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저 끊임없는 푸른 빗소리에 섞여 날 불러내는 듯 하이. 자르락자르락..작작작... 빗소리 자장가 삼아 오늘 밤, 홀로 잘 자게.. 친구야.
2005-07-08, 23:24
일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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