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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야만에서 벗어나기
지성수  |  sydneytax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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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10월 12일 (월) 21:23:37
최종편집 : 2015년 10월 22일 (목) 00:37:55 [조회수 : 3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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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아델라이드 대학에서 은퇴한 박 교수 부부와 왕복 3,200km의 자동차 여행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비행기로 호주의 최남단 도시 아델라이드로 갔다. 목적지는 호주 대륙의 중심이고 원주민들의 성지인 울루루(인공위성에서도 보인다고 하는 거대한 바위)였다.

이번 여행의 특징은 아무 부담이 없는 여행이라는 것이다. 나는 개미같이 부지런한 박 교수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그저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신뢰하거나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런 까닭에 비록 나는 그렇지 못했지만 부모를 무조건 믿고 따를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은 행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신앙도 그런 것이다. 무조건 예수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말만 그렇게 하고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불안과 모순이 따르는 것이다.

박 교수 집에 도착해보니 개인 도서관이라고 해도 지나칠 것이 없어서 우선 반가운 것은 내가 보고 싶어 했던 책들이 모두 다 있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 내 눈에 첫 번째로 띈 책은 임미리 라는 이가 쓴 '경기 동부',라는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의 뒤표지의 소개 글을 읽는 순간 그만 가슴이 그야말로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지난해 한국의 진보진영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던 애물단지 이석기 무리들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찾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해하기 힘든 이석기 무리들에 대하여 그래도 남들 보다는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던 나조차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한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모름지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역사는 강자에 의하여 쓰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석기 무리는 '승리한 지배자의 역사가 아니라 패배한 피해자의 기억을 선택 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성남 일대에서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의 피해자로서의 민중의 경험만을 기억하는 그들의 역사관이 그들을 그렇게 스스로 주변인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피해자로서 자기의 입장을 정당화,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자세가 지나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준 사건, 그것이 이석기 무리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된다.

내 입장만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하는 것, 그것은 개인들만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데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고 생각된다. 남북문제, 한일 문제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한국은 내 입장 보장보다는 미국 입장을 더 생각하는 검은 머리 백인들이 많은 것이 문제라고 생각된다. 목사들 중에는 거의 대부분이고.

 

   
 

첫 날 800km를 달려 오팔 광산촌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영국이 7 차례나 핵실험을 했던 우메라를 지났는데 그날 밤은 인간들이 두더지처럼 땅을 파가던 동굴로 된 지하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침대에 누워서 지구를 파괴할 원자탄을 만들고 보물을 캐기 위해서 땅 속을 헤매는 인간들이 저지르는 죄악을 지구는 과연 용서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날 또 다시 800 km를 달려 마침내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울루루에 도착 했다. 오는 동안 사람은커녕 동물 한 마리도 볼 수가 없었는데 목적지에 도착하니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법적거리고 있다. 이들은 모두 우리처럼 최소한 1,000 km 이상을 달려오거나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이다. 단순하게 바위 하나를 보러.

왜 일까? 인간은 신비로운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대종교학자 엘리아데의 생각이다. 나는 무엇에서 신비함을 찾는가?

칸트는 인간의 마음에 흐르고 있는 도덕률에서 신비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영성은 신비함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부터 온다. 나는 관계로 부터 신비함을 찾는다. 그것은 마틴 부버에게서 배운 것이다.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근원어 '영원한 너'인 신과의 관계에서 부터 영성을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인간 사이에서 영성을 느끼는 것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우리들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관계들 사이에서 영성을 느껴보자는 것이다. 마치 카마수트라에서는 섹스에서 영성을 느끼듯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울루루 투어를 했다. 원주민들이 불과 100년 전까지 수 만년 동안 500억년이 된 이 거대한 바위에 은거하여 살았다고 한다. 과연 그들과 비행기와 차를 타고 온 우리들과 영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아마 그들은 자연과 , 현대인들은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주민들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영성을 느꼈듯이 현대인은 사회적 관계에서 영성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사회적 관계에서 영성을 느끼지 못하다면 영적인 야만인 일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세월호 사건에서 느끼는 바가 없다면 혹은 잘못 느낀다면 사회적 영성이 없거나 왜곡된 것일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 무관심한 한국 교회를 보면 영성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주변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슬픔과 기쁨, 고통과 환희 속에서 영성을 느낄 수 있다. 종교 안에서만 영성을 찾는 것은 영적인 장난인 셈이다.

   
 

다시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땅을 800 km를 달려 첫날 밤을 보냈던 오팔 광산촌으로 돌아왔다. 너무 덥고 비가 오지 않아 메마르고 파리만 달라붙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땅이다. 파리가 얼굴에 붙어 구멍이란 구멍에는 모두 들어가려 해서 망사천을 뒤집어 쓰지 않고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막에 사는 파리는 본능적으로 습기를 찾아 눈 코 입으로 사정없이 파고드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재미 사실은 모든 면에서 내가 따라갈 수 없는 하버드 박사 출신인 박 교수의 방향감각이 영 형편이 없어서 몇 번이나 뻔 한 길에서 헤맬 뻔 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나는 본능적으로 택시 운전사의 감각을 타고 태어났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적인 본능이라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인간에게는 영적인 본능이 있기 때문에 종교를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신이 있기 때문에 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박 교수는 사회학 전공답게 세상만사에 대하여 연구하는 자세로 접근한다. 그러므로 그의 태도는 객관적, 이성적, 가치중립적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자칫하면 남들의 시각에는 냉정하거나 교만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박 교수는 태생이 겸손한 사람이라 그럴 위험성은 없다. 그러나 부부 관계에서는 겸손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자세가 문제가 되어서 자주 티격태격은 하며 산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는 인간이 신 앞에서 겸손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욥의 경우를 보자. 욥은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는 상황에 처하자 신과 맞장을 뜬다. 즉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욥은 신에게 정직한 질문을 하고서야 신에게서 응답을 들을 수가 있었다.

60년대 큰 충격과 파문을 던져 준 로빈슨(John Robinson)의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라는 작은 책이 있었다. 로빈손은 그 책에서 한 마디로 2,000년 동안 서양 기독교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신의 개념에 대하여 의문부호를 던지며 새로운 답을 찾아야 된다고 쌍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그는 ‘저 위에 계신 신’ 또는 ‘저 밖에 계신 신’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깊은 데 있는 신’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힌트를 주었다. 로빈손은 니체가 왜 ‘신은 죽었다’고 난리 부르스를 추었는지, 마틴 하이데거가 왜 ‘옛 신은 죽었고 새 신들은 아직 탄생하지 않는 시대’라고 했는지, 마틴 부버가 왜 현대를 ‘신식(神蝕 The Eclipse of God- 달이 태양을 가리는 현상처럼)의 시대라고 했는지, 틸리히가 왜 ’신 위의 신(The God above God)'을 찾아야 한다고 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해 주었다.

인간이 절대자에게 겸손한 마음을 품는 자세가 대성전을 짓는다던지 대규모 불상을 세운다던지 하는 노력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과학과 철학은 신에게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것이 인류에게 더 도움이 되었던가?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겸손만 가르치는 종교는 한계가 분명한 것이다.

주일 아침 부인은 교회로 가고 박 교수는 우리를 공항에 데려다 주었다. 박 교수는 15세에 브라질로 이민을 떠난 후, 캐나다, 미국, 일본, 호주로 돌아다니면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영적 순례의 길도 다양하게 걸어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부인과 함께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데 유독 교회에 나가면 불편하다는 것이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앉아 있는 것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불편한 것은 기도라고 했다.

물론 나는 박 교수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신과 계산서를 주고받는 기도는 나도 질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사회학도로서 기독교적 현상도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느냐의 나의 질문에 대하여 그럴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즉 기독교가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도 기독교를 존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 말 역시 옳은 말이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고운 것'이 세상의 상식이지만 정신적인 세계 속에서는 철저히 상호존중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세상에 험하게 말을 걸어 오는 한 기독교는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요즘 교황이 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을 향하여 고운 말을 건네니 고운 말이 오고 가지 않는가?

개인이나 집단이나 저만 잘났다고 떠들면 인정 받을 수가 없는 법이다. 세상에 "너희는 다 틀렸고 나만 옳다."고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주일마다 수억의 인구가 한 곳에 모여서 "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고 우리만 옳습니다. "를 반복하고 있다면 이 보다 더 큰 코미디가 어디 있겠는가? 신의 입장에서 볼 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이 직접 내려와서 만들었다는 종교가 그것을 믿는 이들에 의해서 가장 유치한 종교가 된 것이 기독교가 아닌가? 오해도 이런 오해가 어디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신이 참으로 입장이 곤란할 것 같다. 예수가 만약에 한국에 온다면 자기가 그렇게 유명한 것을 알면 놀랄 것이다. 잘못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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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9.69)
2015-10-18 06:29:26
영성이 어디로 부터 나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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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공감 (72.196.233.169)
2015-10-16 11:30:18
모처럼 들려 아름다운 여행기 읽고갑니다.
그런 친구분과 여행을 함깨 할 수 있다는
특권(?)이 부럽기도 하고....
인도 산다싱은 배고플 때 가지고 있는 빵 한덩이를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영성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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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0
포이멘 (183.109.99.69)
2015-10-16 10:58:39
.
영성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접속하여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지배를 받을 때 나타나는 심성이 아닐까?

그리고 신약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르고 있다.


자연을 벗삼아 걸으면서 이러한 영성을 식물에게서 느낀다.

동물을 기르면서 이러한 영성을 동물에게서 느낀다.

동물에게 영이 없다고 데카르트가 말했던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 영이 없다고 누가 말했는가?

낙원에서 우리만이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영은 있으나 하나님에 접속되지 않은 영이 영성을 나타낼 수 있을까?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과 접속할 수 있는가?


영성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접속하여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지배를 받을 때 나타나는 심성이 아닐까?

그리고 신약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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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Philip Im (70.62.49.64)
2015-10-16 04:06:20
영적 야만이란
내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에 의거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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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
포이멘 (183.109.99.69)
2015-10-15 23:41:43
영적 야만의 상태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악령과 접속한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성령에 접속하지 못한 상태인가?

아마 영적 야만의 상태는 악령과 접속하거나 아니면 성령에 접속하지 못한 상태일 것이다.

성령에 접속했다면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에 접속한 사람들은 영성이 있어서 교만하거나 무례할 수 없다.

성령에 접속한 사람들은 선한 삶을 살며 예수와 같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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