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
예수님보다 더 진전된 계시의 전달자 바울 사도
박창진  |  5016park@paran.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5년 10월 02일 (금) 13:01:12 [조회수 : 2629]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기독교는 2000여 년 동안 바울 신학을 추종해왔다. 그리고 이것을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며 온 세계에 전파했다. 바울 신학은 예수를 유대민족이 대망(待望)하던 메시아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수가 창출한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을 곁길로 오도하였다. 그리고 다윗 왕조가 섬기는 일개 민족의 신을 유일신이라며 앞으로 올 메시아왕국이 온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메시아왕국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자처했다. 바울의 기독교 신학은 어처구니없는 민족주의의 결과이다.” 문동환 박사가 그의 저서 <예수냐, 바울이냐>에서 주장한 내용이라고 한다.

정당한 근거를 갖추고 있으면 당연히 그 주장은 수용되어야 한다. 과연 그런가?

위와 같은 평가를 할 때에 사용되는 주 자료는 무엇인가? 성경(서)이다. 그렇다면 그 안에 적힌 내용을 바르게 살펴야 한다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성경(서)가 예수님을 유대민족이 대망하던 메시아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복음서를 읽으면 확인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너무나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공생애에서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불문가지이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말은 어떤가? 여기에서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며 그 관계를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 삶 이후에도 지속되는 경우에는 영원한 구원이라고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분과의 관계를 누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냥 이 땅에서 바르게 살기만 하면 되는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아도 양심을 따라 바르게 살기만 하면 되는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온전히 추구하기만 해도 되는가? 성경(서) 어디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단호하게 자신이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라고 선포하셨다(요 14:6).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다윗 왕조가 섬기는 일개 민족의 신? 예수님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이야기한 신과 다윗 왕조가 섬기는 신은 다른가? 그렇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이다. 성경(서)의 내용에 의하면 이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신은 언약의 신이다. 그 언약은 역사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변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포로 후 회복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었다. 그 신이 그의 경륜 가운데 역사적으로 이 땅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다가 한 사람 아브라함에게로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다시 온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다윗 왕조는 그 경륜 가운데 한 부분이다. 그 경륜의 일차적인 완성이 바로 예수님을 통한 구속역사이다. 다윗 왕조가 섬긴 신과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얘기하신 신은 동일한 존재이다. 예수님은 따른다면서 다윗 왕조가 섬기는 일개 민족의 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생명문화공동체운동. 예수님의 구속 역사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 다만 “무엇이 생명이고 무엇을 생명문화라고 하며 생명문화공동체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개념에 따라 수용하느냐 수용할 수 없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생명이라고 하셨을 때에 그 생명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이다. 부모를 통하여 태어나는 것 자체를 가리키진 않는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를 의미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 땅에서 이전과는 다르게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하는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그분의 외침에 담긴 내용이었다. 그 외침이 주어진 언약의 시점으로 인해 그 선언의 대상은 유대인들이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때에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이방인에게 가지 말라고 하셨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다.

그 생명은 그 생명을 부여받은 이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바르게 누려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이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만큼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실패하기도 하고 뒤로 처지기도 하지만 포기하거나 중단하지 않고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사실에 대한 진술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 대상은 유대인들로 한정되었다. 죽으심을 앞두신 시점에서 기도 내용(요 17장)도 그 대상이 제자들이다. 좀 넓게 생각한다고 하여도 유대인인 신자들이다.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서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을 언급하셨던 것이다. 땅 끝은 바다와의 경계선이다. 성경에서 땅은 언약의 백성, 바다는 이방인들에 대한 상징으로 쓰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나아가서 목격한 바를 전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방인에게 가지 말라고 하신 공생애 때와는 다른 변화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언급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부분은 예수님과 직접 생활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충분하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주목하고 그 의의를 진술한다.

바울 사도가 진술한 십자가와 부활의 의의엔 만유의 통일과 충만이 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곧 만유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엡 1:10). 독생자 하나님이셨는데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심은 만유를 충만케 하려하심이라고 했다(엡 4:10).

이러한 진술은 공생애 때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비교할 때에 너무나도 확실하게 진보한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때에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며 그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사실 중심으로 말씀하셨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유대인 신자들을 넘어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그 의의를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바울 사도보다 지식이 뒤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이 언약의 시점에 따른 한계 안에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고려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 곧 예수님의 한계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듣는 이들의 한계로 인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바울 사도는 언약이 더 진행된 상황에서 얘기했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지 못하였던 부분까지도 말할 수 있었다.

만유의 통일과 충만. 만유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일되고 하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시간만 지나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가? 결코 아니다. 시작과 과정과 끝이 있다. 시작은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졌다. 과정을 거쳐서 끝에 이르게 된다. 그 과정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교회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말이다. 교회는 만유의 통일과 충만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만유를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이었던 것이다(엡 1:23).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서로 사랑함으로 가능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며 친근히 하시면서 동시에 두려워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셨다. 그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이 살아야 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 요청의 수용과 실천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실천할 때에 하늘의 생명으로 충만해진다.

여기에서 사랑이란 공의의 구현이라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사랑은 상대방을 그냥 좋게 여기고 잘 대해주는 것이 아니라 선을 포상하고 악을 징벌하는 것을 포괄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이 받아야 할 악에 대한 징벌과 그 징벌 후에 사람을 생명으로 이끄심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지체를 위하여 예수님과 같이 목숨까지 주는 사랑이란 선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징벌을 통하여 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한다. 선을 행하는 것이다(갈 6:10). 전도지 들고 다니면서 예수 구원을 외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율법을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 가난한 심령,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이 청결함, 화평하게 함,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음.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 신자들이 율법 준수에 머무르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를 다른 복음이라고 강력하게 정죄하였다. 완전하게 된 율법 곧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준수를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다.

바울 사도는 교회 또는 각 지체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을 권했다(엡 4:13). 예수님을 온전히 닮으라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팔복을 구현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팔복의 완전한 구현자이시기 때문이다.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것을 위해 삶을 드렸던 그가 교회를 향하여서는 단 한 번도 자신과 같이 전도자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는 철저하게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에 대해 집중하였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면 만유를 충만하게 만들 수 있다. 교회가 생명문화공동체인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교회다움과 동떨어져 있다. 교회 또는 신자가 마음이 가난한가? 약자가 더 고통을 받는 이 땅의 현실에 대해 애통하는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옳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그것의 구현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가? 어려움과 애매히 고통 받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가? 마음이 청결한가? 화평하게 하기는커녕, 분열자의 대명사이지 않은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기는커녕 강자의 편에 서서 부와 권력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물음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가 심히 곤란한 상태이다. 만유의 통일과 충만이라는 하나님의 계획과는 너무나도 멀리 이탈한 상태이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만유의 한 부분인 사회인들에게 걱정거리인 상태이다. 부끄럽기 그지없다.

여기에는 신학의 부재가 정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기성 교회의 신학 부재는 정말 심각한 상태이다.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기에 더욱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다. 초반부에 언급한 경우도 오십보백보라고 생각한다. 엉뚱한 곳에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오늘날의 문제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에 있지 않다. 그는 예수님보다 더 진전된 계시의 전달자였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한 사람이 아니다. 문제의 원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보다 더 진전된 계시인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거나 이해하기는 했더라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바른 이해와 동떨어져 있고 실천하지도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애매히 엉뚱한 사람을 잡지 말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충실한 사도였다. 언약의 시대적 한계로 인해 그 가르침에 한계가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가르침을 온전히 밝힌 하나님의 종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바울 사도의 가르침은 조금도 상충하지 않는다. 온전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더 진전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 몸의 지체인 신자는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책임이 있을 뿐이다. 만유의 통일과 충만을 구현하기 위한 길이다. 유일한 길이다.

 

박창진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224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3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박창진 (113.130.235.221)
2015-10-04 16:21:17
무지 자랑은 그치면 좋으련만
예수보다 위대한 바울?

내 글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진전된 계시의 전달자라고 했다고?
이게 얼마나 무지한 소리인 줄 좀 알고 살면 좋으련만.
위 글을 읽은 사람들이 당당뉴스에서 말고 적지 않은데 그런 소리한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왜 그럴까?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알 지도 못할테니, 친절한 내가 설명을 해주어야지.

창세기의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의 씨, 모세와 같은 이, 다윗의 자손, 야웨의 종.
무엇에 관한 진술인 줄 아는감? 메시야에 대한 것이여.
시간이 흐르면서 그 내용이 신약의 예수님의 실체와 점점 더 가까워지거든.
이를 신학적으로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혀.
계시의 점진성. 기억 좀 하고 살어.
신학에 관해 뭔 말을 하려면 말이여.
뒤의 기록자가 앞의 기록자에 비해 위대하고 말할 수 있을까? 없어.
그냥 하나님께서 그 시점에서 그 사람을 통하여 계시를 더 밝게 나타내신 것일 뿐이여.

진전된 계시를 전달했다는 말이 더 위대하다는 뜻이 아니란 말이여.
몰상식도 아니지롱.
제발 기초적인 공부는 좀 하고 글을 적으라고.
그렇게 나댈 실력이 안 된다니깐.
그런 기초도 안 되어 있으면서 되도 않은 글을 적는 것이 몰상식이라니껭.

개독교라?
성경의 가르침을 밝힌다고 개독교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면 듣지.
그거 뭐시라고?

앞에서도 적었지만 짜집기와 해석의 차이 정도는 알고 살면 좋겠는데, 왜 그렇게 자신에게 약이 되는 소리는 무시하는지 모르겠네.
하긴 평양감사도 지 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내 말이 맞는지 틀린지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어.
가르쳐줄 테니깐 잘 듣고 확인해 봐아.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만유의 통일과 충만에 대한 진술이 있는 지를 밝히면 되는겨.
그럼 위의 내 글이 틀렸다고 밝혀지는 것이지.
더 진전된 계시가 아니라 이미 얘기된 것을 반복한 것일 뿐이니.
그러니 기초가 안 되어 있는 그대가 그대가 가진 자료를 다 활용하여 제시하랑께.
앞에서도 말했지만 근거는 없고 선동만 하는 그런 유치한 태도에서 벗어나서 말이야.

하기사 뭐가 뭔지 구분이 안 되는데...
기대난망이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여서리.
난 내가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면 좋아하는 사람이걸랑.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니께.
제발 좀 그런 복을 누릴 수 있게 해주삼. 꼭 꼭 꼭.
리플달기
0 2
무릇돌 (218.38.162.72)
2015-10-03 09:10:12
개독교의 수호성자인 척하는 창진형에게
창진형, 내가 그래도 형을 보통 사람인 줄 오해하였오.
형은 수호천사-개독교의 수호성자이므로 사람은 아니야!
성경의 기록(문자)이 그대로 하.느.님.의.말.씀.으로 믿는
형에게 무슨 인간의 말이 필요하겠오.
그냥 그 몰상식한 미신(교리와 신앙)에서 장렬하게 산화할,
개독교의 수호성자님에게 무슨 사람의 말이 가당하겠오?
제목부터 예수보다 위대한 바울을 당당하게 따르겠다는
그 불타는 투지, 완벽한 몽매함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오.

이게 머 창진형만의 일이 아니야.
여기 게시판의 대언자, 무등산... 다 비슷한 류의
미신숭배자들이며 미신수호성자들이지.
그래. 이젠 징징거리지 않겠어.
내가 착각했었지. 영계의 수호신을 사람인줄로!
그럼 안녕! 창진형 안녕!
창진형이란 이름도 이 돌멩이의 환영이었어.
개독의 수호신이시여, 영생불멸하시라!
아, 그 이름도 영생불멸의 ㅂㅊㅈ님이시여!
리플달기
3 3
무릇돌 (218.38.162.72)
2015-10-03 06:40:24
어찌
하룻강아지 당당봉사께서
진실을 알겟는가?
그저 성경은 일점일획 오류없는 계시의 책이니
그 문자를 제 입맛에 나열하여
하느님도, 예수님도, 구원도, 천국도 노래해야지.

이런 이차원적 사고는 문화지체, 영적지체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인데...
현금기독교가 개독교가 된 것은 이런 류의 영적지체,
문화지체에서 발원하여 꽃피운 것이니...

아주 바울이 예수보다 진전된 계시를 운운 하는
이 몰상식의 극치.
리플달기
2 2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