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이민자들을 위해 무료로 상담해주는 기관에서 봉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렇게 크고 밝은 달은 난생 처음 본 것이다. 역시 미국은 땅도 넓고 사람도 크다 보니 달도 크구나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던 아내가 오늘이 추석이라 보름달이 뜬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타향(공간)에 살고 있으니 추석 같은 명절(시간)이 오는 줄 모르고 사는 것이 당연하리라 여겼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왠지 섭섭하고 편치 않았다.

이민교회에서 추석을 맞아 교인들이 송편을 함께 빚었다고 하고 한인 공동체는 각종 축하행사로 추석을 맞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야 추석이 실감났다. 내친 김에 한국에 있는 식구들과 전화 통화도 했다. 공간과 장소는 다르지만 미국 하늘에도 추석 보름달이 뜬 것을 보고 추석의 풍성함을 느끼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20세기 마지막 선지자로 불리고 흑인인권운동과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 앞장선 유대인 철학자이자 랍비인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은 『현대인들을 위한 안식의 의미』라는 책에서 안식일은 “공간”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이라는 “시간”을 맛보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주장한다. 경쟁과 걱정, 염려, 불안으로 가득한 세상살이의 공간을 벗어나 영원과 사랑을 호흡하는 시간이 바로 안식이라는 것이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안식일은 공간보다 시간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장소가 예루살렘이든지 광야든지 상관없다. 헤셀은 안식일로 대표되는 “시간의 축제”를 따라가다 보면 잃었던 우리의 본래적인 모습을 다시 기억하고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간과 장소를 넘어선 “시간의 축제”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 삶이 이런 축제로 가득 찬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추석이든 안식일이든 상관없다. 추석을 마음껏 즐기지 못한 이유를 헤셀의 말에서 찾았다. 타향이라는 공간에 갇혀 추석이라는 “시간의 축제”를 망각한 것이다. 사실 한국인에게 보름달은 풍요와 축복을 상징하지만, 미국인은 보름달을 “블루문”(Blue Moon)이라고 부르고 그 의미도 다르다. 팝송에서 블루문은 슬픔이나 고독을 상징하고 보름달이 뜨는 날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가 나타나는 장면은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에게 미국 하늘에 뜬 추석 보름달은 블루문이 아니라 한가위 보름달이었다. 올해도 한국에 있는 가족과 함께 추석을 보내지는 못해 아쉽지만 한 해를 뒤돌아보면서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한가위의 의미를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