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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돈 교수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의 글을 읽고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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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07월 20일 (월) 12:48:02
최종편집 : 2015년 07월 20일 (월) 23:33:21 [조회수 : 3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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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돈 교수님이 페이스북에 쓴 ‘칭의와 성화’(김세윤 교수 저)에 대한 평(2014. 1. 8)을 뒤늦게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에 별도로 정리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제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하였습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바의 진수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느냐입니다.

한 자연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듭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 곧 신자가 되었습니다. 법정적 칭의가 주어졌습니다. 그럼 이 칭의는 그가 어떻게 살든지 불변인가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살아도요? 여기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분들의 사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체 성경을 어떻게 읽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화를 절대적으로 책임지신다고요? 그렇기만 하다면야 인간의 입장에서 최고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다는 것일까요? 전 까막눈이 아닌데 그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제가 읽는 성경은 박 교수님이 읽는 것과 같은 것인데 말입니다.

성경은 너무나 분명하게 거듭나면 영적 갓난아이가 된다고 합니다. 젖을 잘 먹으면 자라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잘 자라도 아니 성숙한 자가 되었어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라도록 일하시고 넘어지지 않도록 일하시지만 그 은혜를 헛되이 받아 자라지 않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성화가 절대적으로 보장된다는 주장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한 거짓이기에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고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자기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둔다는 바울 사도의 진술(갈 6:8)은 서로 다른 두 사람 곧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한 사람 곧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갈 1:2) 곧 갈라디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두 양상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동시적으로 그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주장으로 인해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화를 절대적으로 책임지시니까 말입니다. 성경의 진술과 상관이 전혀 상관이 없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커트라인에 대한 얘기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잘못된 논리일 뿐입니다. 성경이 커트라인에 대해선 진술하는 바가 없으니 말입니다. 커트라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고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가 없기에 그것을 논증에 끌어오는 것 자체가 잘못인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에 관한 가르침이 구약과 신약에서 차이가 있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에스겔서를 읽으면 너무나 분명하게 나옵니다(겔 18:20-30). 여기에서 이야기되는 이들은 출발이 같습니다. 하나님의 옛 언약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남자라면 모두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의인은 그 바탕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고 악인은 반대입니다. 그 의인이 불순종하면 죄와 허물로 인해 죽을 것이고 그 악인이 순종하면 죽지 않고 살 것입니다. 이 원리는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칭의는 법정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순종할 때에 주어지는 칭의도 있습니다. 법정적인 칭의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불순종하면 하나님은 불의하다고 하시지 법정적 칭의 때문에 의롭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개혁주의 칭의론은 성경에서 얘기되는 칭의가 둘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반쪽자리일 뿐입니다.

한 가지를 추가하면, 개혁주의에선 거듭남이 위로부터 나는 것이고 인간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너무나도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거듭났는가를 결정하는 근거로는 뭘 제시하는가? 순종을 제시합니다. 순종하면 거듭난 것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도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출생과 출생 이후의 삶은 전혀 별개입니다. 제 아들은 제 아내가 280일을 품었다가 태어났습니다. 이 사실은 제 아들이 아버지인 제 생각을 잘 이해하고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잘 따를 수도 있고 잘 따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잘 따라도 제 아들이고 잘 따르지 않아도 제 아들입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남은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과 행위는 절대적인 연관관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한 번 출생했으면 그 신분이 불변인가?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엔 버림에 대한 경고가 가득합니다. 식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돌이키는가? 이 또한 전혀 아닙니다.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하는 얘기가 수두룩합니다. 사람도 자기가 낳은 자식에 대해 그가 어떠하든지 버리지 않는데, 하나님은 더욱 그렇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으십니다. 경고가 주어질 때 돌이키지 않으면 그 경고와 함께 주어진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의 경우에는 별도의 경고가 없이 곧장 버리시기도 하십니다(고전 5:1-5).

교리로 성경을 읽지 말고 성경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입니다. 곧 태어나는 것은 택함받은 자에게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견인은 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곧 의지함인 믿음이 조건입니다. 다르게는 순종이 조건입니다. 거듭남에 있어서 믿음 곧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인 영접함인 믿음은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견인에 있어서의 믿음 곧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순종과 동전의 양면입니다.

개혁주의 칭의론, 성화론 나아가 구원론에서 성경적인 부분은 더 온전하게 하고 성경적이지 않은 부분은 하루라도 속히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부분을 개혁주의라는 이름 아래 성경의 가르침인 양 말하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선 명백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전통이라는 우산 아래에서 안주하며 지속적으로 잘못된 교리를 고수하며 살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어찌하시려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알미니안주의라는 우산 아래에서 동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입니다.

 

박영돈 교수님의 글 요약

김세윤 교수님은 전통적인 구원론에서는 칭의 다음에 성화가 이 단계적으로 이어지므로 윤리 없는 구원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치우친다고 주장합니다(『칭의와 성화』, p. 81). 이에 대해 박영돈 교수님은 종교개혁의 입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해라고 반박하며 칼뱅의 관점을 제시합니다.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 칭의와 성화가 비록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 누구도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만을 체험할 수 없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성화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동시적으로 그를 거룩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는 결코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기까지 하였다. 구원의 전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영합하여 병행된다.” 칼뱅의 관점은 김세윤 교수님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김세윤 교수님이 제시한 성경적인 대안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김세윤 교수님의 논리에 의하면 칭의는 실제 의롭게 되는 성화가 진전됨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행되다가 종말에 가서야 완성된다는 것이 됩니다. “우리 구원의 현재 단계를 의인됨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고, 성화에 있어서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다”(『칭의와 성화』, p. 189). “칭의가 최후 심판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했다(『칭의와 성화』, p. 192). 박영돈 교수님은 이에 대한 칼뱅의 관점을 제시하며 반박합니다.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끈으로 하나로 엮어져있지만, 이 둘은 논리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칭의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불완전한 의로움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외래적인 의로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리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의로움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영 단번에 내려진 은혜로운 법적 선언이다.”

이어서 “우리는 구원받은 후 칭의에서 바로 성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칭의의 바탕 위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다. 이 반석 위에서만 감사와 확신과 자유함과 계속되는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진정한 성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종말론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칭의를 기독론적-종말론적 관점에서 “이미와 아직도(already and not-yet)"의 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종말론적으로 유보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되었고 종말론적으로 최종 확증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내려진 선언과 앞으로 내려질 선언의 근본 내용은 동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에는 변동이 없다”고 적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칭의가 우리가 이룬 거룩함에 어느 정도라도 근거한다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거룩함의 커트라인은 어느 정도인가? 만약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신앙 생활한다면 교인들은 하루도 구원의 확신을 누리며 살 자신이 없을 것이다”는 논지도 전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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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4.36.120.130)
2015-07-24 22:46:56
아직도 칼빈이라니....
한국 교계의 한계입니다. 칼빈이라는 분 때분에 우시는 분도 있지요.
똑똑한 머리로 맨날 자기의 생각과 사고는 버려두고,
맨날 기독교 강요나 읽고 있는 분들 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엠무원, 칼빈, 엠식스틴, 케투, 케원....
세상은 점점 바뀌는 아직도 신학은 변한게 없으니....
아무튼 신학자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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