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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교수 “예수살기를 위한 종교개혁 3대과제” 특강예수살기 수도권모임에서 믿음, 은총, 성서 재해석
방현섭  |  racer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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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04월 21일 (화) 00:13:51
최종편집 : 2015년 04월 21일 (화) 22:50:04 [조회수 : 6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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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살기 수도권 모임이 4월 20일 저녁 7시 30분 향린교회 어린이부실에서 약 20명이 모인 가운데 이정배 교수(감신대)의 “예수살기를 위한 종교개혁 3대과제”라는 주제의 특강으로 열렸다. 다음은 이정배 교수의 강의를 요약한 내용이다. 요약하는 과정에서 강사의 의도와 다른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오늘 특강의 주제는 종교개혁의 3대 원리인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성서로만, 오직 은총으로만’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자는 의미를 담았다. 믿기를 넘어 살기로까지 나아가는 참된 신앙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년이 되는 해이고 2019년은 독립선언 100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 이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아쉽게도 2013년 WCC대회는 어이없이 끝났다. 반면 가톨릭은 2차 바티칸공의회 50주년을 맞아 내실 있게 행사를 치렀다. 50주년의 주제는 ‘교회의 복음화 없이는 세상의 복음화가 없다’는 것으로 가톨릭은 한때 개혁의 대상이었기에 자기비판을 진지하게 하였다. 내부적으로 개혁 대상이 성직자라는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개신교회는 어떤가?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성장을 자랑하려는 일단의 그룹은 10월에 대규모의 기념행사를 위해 독일 비텐베르크 일대의 모든 행사장을 싹쓸이 하여 예약하였다고 한다. 이런 움직임과 달리 종교개혁자, 종교개혁의 정신을 연구하는 움직임도 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종교개혁의 3대 명제를 비판적으로 연구하여 제2의 종교개혁을 이루자는 움직임도 있는데 이것이 예수살기 정신이 아닐까 한다.

 

종교적 개혁을 실천하였던 수많은 종교개혁가들은 대부분 바울서신, 특히 로마서를 읽다가 종교개혁의 원리를 발견하고 회심하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일단의 연구자들은 종교개혁자가 가졌던 바울신학에 대한 관점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것은 천년 이상 세상에 군림했던 중세 가톨릭교회라는 상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개신교회가 타락하고 기독교가 자본주의화하는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 당시의 관점을 그대로 차용할 수는 없다. 현대는 영적 치매(자신이 어디에서 왔는가), 영적 자폐(자기만 아는 것), 영적 방종(자본주의에 사로잡힌 것)을 극복해야 할 과제가 있다. 과도하게 자본주의화 된 현실교회를 비판하려면 바울이 로마적 정황에서 어떻게 살았고 그가 가졌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던가를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 도움을 주는 책이 울리히 벡의 ‘자기만의 신’이다. 울리히벡은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사람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을 돕겠다고 생각했다. 벡은 지옥과도 같은 아귀다툼의 현장에서 자기 속에 살아있는 하나님,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고 압제하는 이들을 인간적으로 도우려는 노력, 자기 안의 하나님과 대화하며 자기와 하나님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것을 자기만의 신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종교가 자기화의 문제라고 보았다. 근대화될수록 인간은 더욱 개인화되고 있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개인화에서 의미가 있으며 개인화는 개인적 종교성으로 꽃피고 있다고 보았다. 근대화와 병행된 고도의 성장은 사실 성장이 아니라 위기와 위험의 증가였다. 그래서 종교성이 필요하고 제2의 종교개혁을 위해서는 개인화된 종교성이 필요하다. 개인화된 종교성은 같은 것을 믿는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이들, 다른 것을 믿는 이들에게도 기꺼이 용납되는 보편적 종교성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제2의 종교개혁이 출발한다.

또 하나의 책은 테드 제닝스의 ‘데리다를 읽는다 / 바울을 생각한다’이다. 이 책은 로마서를 칭의가 아니라 정의의 책, 개인의 종교성이 아니라 사회적 불의에 대한 고발로 이해한다.

 

우선 ‘오직 믿음으로만’의 원리를 살펴보자. 루터의 맥을 잇는 키에르케고르와 본회퍼는 ‘만약 루터가 지금 살아있다면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어거스틴의 두 왕국설이다. 어거스틴 당시 로마와 합쳐진 기독교가 천년왕국인줄 알았으나 바바리안 민족의 침략을 받고 배교자의 세례가 문제가 되어 교회는 난리를 겪게 되었다. 교회는 공격을 받는 충격에 휩싸였다. 이때 어거스틴은 원죄론과 하나님이 도성 교리를 고안한다. 이전까지만해도 자율적 우월성을 말하던 창세기 1-3장은 어거스틴에 의해 타락과 원죄의 본문으로 해석되었다. 하나님의 도성은 피안의 세계로 밀려났다. 루터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가 아니라 피안의 세계로 옮겨놓았지만 본회퍼는 지금 여기에 그리스도의 현실이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초월은 이 현실에 틈을 내는 것이고 성육신은 초월(하나님)이 초월하여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세상에 갈등을 주고 그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며 기독교인들을 정신분열증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가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의 상황에 비춰서 해석해야 한다. 바울은 행위 없는 믿음을 말하지 않았고 행위 없는 믿음의 위험성을 말하였다. 당시 로마법은 누구나 돈만 있으면 누구나 종을 부릴 수 있게 했으나 기독교인은 예수를 통해 평등의 가치를 배웠다. 바울에게 있어 로마법을 당연하는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 없는 행위였고, 노예법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오직 믿음이었다. 남여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의 존재가 존중받지 못하는 시대에 바울은 여성의 자유를 인정하고 남편의 부당한 성적 요구를 거부하라고 가르쳤다. 믿는다고 하면서 로마법에 충실한 것은 믿음 없는 것이다.

두 번째로 ‘오직 은총으로만’의 원리는 그동안 자유의지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구조였다. 그래서 예정론(100:0), 신인동형론(50:50), 선행은총론(100:100) 등의 도식이 생겼다. 바울에게 오직 은총은 사실 오직 정의!이다. 바울에게서 자본주의를 뛰어 넘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율법과 은총 사이에서 갈등하였고 이는 법과 정의의 관계였다. 로마법,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킬 수 없었다. 법은 항상 가진 자의 편으로 약자를 살리는 법이었던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바울은 로마법이냐 하나님의 법이냐를 선택해야 했다.

예수님은 제각기 다른 시간에 왔던 일꾼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한 동일한 품삯을 주어야 한다고 하셨고, 되갚을 능력 없는 이를 위해 잔치를 베풀라고 가르치셨다. 이게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정의이다. 세상의 법으로는 이런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법에 대한 범법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정의는 은총이고 선물이고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를 깨닫는 것이 은총인 것이다. 그것은 순수증여하는 것이고 경제적 성령론으로도 불린다. 은총을 하나님의 정의로 읽을 때 자본주의와 맞설 수 있다. 바울 자신에게로 내려가서 로마서를 읽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오직 성서로만’의 원리를 생각해 보자 성서를 보는 세 가지 눈이 있다. 우선 신앙의 눈이다. 내가 아니라 성서가 나를 읽게 하는 것으로, 성서를 읽으면 내 삶이 보인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으로 보게 되는 위험이 있다. 이는 의심의 눈을 통해 극복된다. 성서의 세계관인 과거의 눈이 아니라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다. 간디는 힌두교인으로 나고 자랐지만 힌두교에 불만이 있었다. 그런데 후에 영국유학을 하는 중에 성서에서 산상수훈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본회퍼는 산상수훈을 이룬 최초의 사람이 간디라고 극찬하였다. 간디는 산상수훈의 눈으로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를 읽었고 비폭력저항을 실천하게 되었다. 그는 타종교의 눈으로 자기종교를 본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인 자기발견의 눈이다. 파니카는 동일한 종교권에서 탄생한 종교는 치열한 가치투쟁의 변증법적 논쟁이 필요하지만 다른 종교권의 종교와 만날 때는 다른 종교를 통해 자기종교의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울리히 벡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더욱 철저하게 개인화되어야 할 필요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다른 종교를 통해 자기 종교를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자기신앙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오직 성서로만’의 의미이다.

 

자본주의시대에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기독교가 절실히 요구된다. 모든 종교가 자본주의 앞에 속수무책인 시대이다. 2008년 BBC방송은 한국이 종교비율이 가장 높지만 오히려 욕망이 가장 많음 나라라고 보도했다. 종교비율이 높을수록 인간적 세속적 욕망이 낮아지는 것이 맞는 것이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종교무용주의가 대두된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제2의 종교개혁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종교개혁의 세 원리를 이 세대에 맞게 재해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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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2.72)
2015-04-21 10:13:35
결국 기독교의 문제는
현대는 영적 치매(자신이 어디에서 왔는가), 영적 자폐(자기만 아는 것),
영적 방종(자본주의에 사로잡힌 것)을 극복해야 할 과제가 있다.<본문중에서>

한 가지입니다. 영적 치매.
영적 자폐와 영적 방종은 영적 치매에 의한 것이므로.
기독교 스스로가 무엇인지,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헛일이지요.
예수숭배라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예수의 종교, 예수의 신앙(젤롯)으로
회심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한시라도 빨리 사라져야 할 미신일 뿐입니다.
그래도 개혁자들의 개혁이 반쪽짜리 개혁이라는 현실은 인정하는 것이
다행입니다. 사실은 반쪽이 아니라 반의반쪽도 아닌 듯 하지만...
<예수살기>, 이름이 좋지요. 예수를 알아야 예수를 살겠지만요.
<예수살기>보다는 <예수알기>가 우선되어야...
예수를 알게 되면 <예수버리기>나 <예수살기>가 선택될 듯...
<영적 치매>에서 <예수알기>로 나아가 마침내 <예수살기>로...

결국 기독교의 문제는 <예수알기>이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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