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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송병구  |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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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04월 03일 (금) 00:00:06
최종편집 : 2015년 04월 04일 (토) 23:35:02 [조회수 :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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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죽음이 있던 날이다. 한 존재의 죽음이 이만큼 생생하게 전해지고, 극적으로 알려진 경우도 드믈다. 왕의 죽음이라도 무덤의 크기 정도로 기념될 뿐이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도 몇 해 못가 추억으로만 남게 마련이다. 대부분은 죽음과 함께 그 존재가 잊혀 진다. 그러나 곧 지워질 이름이라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산 사람의 몫이다.
 
  ‘스틸 라이프’(Still Life)란 영화가 있다. 같은 제목의 중국영화가 있어 구분하자면 우베르토 파졸리니 감독의 2013년 작품이다. 개봉한 지 이미 2년이나 되었으니, 영화의 스토리를 들춰내는 스포일러가 되더라도 크게 비난 받을 일은 없을 듯하다. 죽음을 다룬 영화 중에서 죽음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를 일깨워준, 이만한 영화는 없을 듯하다.

  존 메이는 영국 런던 시 케닝턴 구청에서 22년째 일해 온 공무원이다. 그가 맡은 업무는  홀로 죽음을 맞은 사람이 접수되면 가족 관계를 찾아보고, 무연고자의 장례를 치러주는 일이다. 영화 첫 부분에서 반복해 보여준 모든 장례모습은 공식처럼 집례자와 단 한명의 조문객 존 메이 뿐이었다. 그 사이에 덩그러니 관이 놓여있다. 장례는 교파에 따라 성공회 식으로, 혹은 가톨릭 식으로 치러지고 교회 뜰에 묻히지만, 무표정하다.

  더 무표정 한 것은 공무원 존 메이의 삶이었다. 그래서 제목이 ‘스틸 라이프’ 곧 ‘정지된 삶’인가 싶었다. ‘스틸 라이프’ 즉 ‘정물’(靜物)처럼 단조롭고 판에 박힌 존 메이의 일상은 늘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늘 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그 거리, 그 사무실, 매번 그 옷을 입는다. 22년째 같은 업무를 하면서 한결같이 작기 업무에 성실한 것도 똑같다.
 
  존의 성실한 일상과 반복 때문에 무연고 죽음들은 생기를 얻는다. 그는 홀로 죽어간 이들의 유품에서 단서를 발견하여, 잊고 산 가족과 연락하여 장례에 초청하는가 하면, 고인의 닫힌 생애 속에서 하나하나 의미있는 실마리를 찾아낸다. 번번이 가족을 불러내는 일은 실패하지만, 정성스런 조사가 있어 장례식은 그나마 훈훈하다. 물론 구구절절 조사를 쓰는 일은 존 메이의 특별한 몫이다.

  무연고 사망자일망정 정성스레 통과의례를 치루다 보니 치워야할 유골함은 쌓였고, 비용은 많이 들었다. 무능력한 업무처리로 실직하게 된 그날, 마침 존 메이는 자기 아파트 맞은편에 살던 빌리 스토크에 대한 처리를 맡는다. 빌리의 방을 조사하던 존은 가족 앨범이 준 힌트를 통해 빌리의 과거를 역추적하면서, 그와 관계해 온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해고를 앞둔 존은 오히려 일상의 범주를 벗어나 의욕적으로 ‘정지된 삶’을 흔들고 먼 길을 나섰다.

  존은 빌리의 생애를 따라다니며 빌리의 직장동료와 만나고, 빌리와 생사를 넘나들던 참전용사를 만나고, 빌리와 사랑을 나누던 옛 여성을 만나고, 빌리와 함께 한 노숙자들을 만난다. 존의 열성 때문에 이들은 모두 빌리의 장례식장에 불려나왔다. 영화의 크라이막스는 냉담했던 빌리의 딸이 죽은 아버지에 대한 정을 조금 회복하고, 성실한 존의 태도에 마음이 끌리면서부터다.

  빌리 스토크의 장례식은 이전의 장례풍경과 달리 열 댓 명의 인파로 북적인다. 그러나 정작 존 메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빌리의 딸은 슬쩍슬쩍 사방을 살피지만, 결국 일행에 파묻혀 지나간다. 그리고 멀리 조문객 하나 없는 장례식이 진행 중이다. 땅에 묻힌 장본인은 존 메이였다. 빌리의 딸과 만남을 고대하면서 작은 선물을 사서 가게 문을 나서다가 트럭에 치여 즉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존 메이는 단 한명의 조문객도, 단 한 줄의 조사도 없는 장례식에 홀로 누웠다.
 
  사실상 영화의 반전은 이제부터다. 빌리의 딸도 무심히 지나가고, 존의 무덤은 하나의 ‘정물’처럼 정지 상태로 남았다. 이제 영화의 자막이 오르기를 기다릴 즈음, 한 사람 두 사람 날아오듯 달려온 사람들이 존 메이의 무덤을 에워 쌓다. 이전에 존 메이가 치러준 장례식의 외로운 당사자들이었다. 사방에서 몰려든 천사 같은 그들 덕분에 존의 죽음은 더 이상 독거사도, 고독사도 아니었다. 진정한 존엄사의 모습이었다.
 
  세상에 존엄하지 않은 죽음이 있던가? 기억하는 사람,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때문에 모든 외로운 죽음은 생기를 얻는다. 세월호의 죽음은 1년이 지났지만, 그 비통함이 퇴색될 리 없다. 절차상 장례는 끝났을망정, 아직 마음의 장례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무고한 죽음을 떠나보내지 못한 까닭이다. 억울한 죽음 앞에서 정부와 대통령은 왜 그리 냉정하고, 또 비겁한 것일까? 그들의 죽음에 존엄성을 부여해야 하는 것은 공무원과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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