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리스-5

거지에게 예물을

선교지에서 종종 문화충격을 느낀다.

이들의 성품을 이해하기에 가끔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어떨 땐 이들보다도 못한 성정인 것 같아

스스로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그는 거지가 아니었다.

내가 그를 거지로 여길 뿐이지

이 곳 사람들은 그 아이를 거지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여러 가지 정황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 곳 사람들에게 그 아이는 정신병자 모친에게서 태어난

불쌍한 정신 저능아로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어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홈리스 아이일 뿐이었다.

이들은 절대로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지 개념으로 그를 이해하지 않는다.

하여 경찰서에서도 그 아이가 오면

옷을 빨아 입지 않아 더러운 냄새가 나도

빈 유치장에나마 재워주고 식사 때면 같이 밥을 먹는다.

보건소는 물론 그 아이가 맘 놓고 자기 집처럼 드나든다.

해산을 앞둔 산모들이 사용할 대기실에 들어가

흙 묻고 때 묻은 더러운 냄새나는 옷을 걸치고

하얀 시트위에 누어 낮잠을 곤하게 자도

누구 하나 그를 깨워 내 쫒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난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이들을 이해하기가 혼란스럽다.

이들은 평소에 그렇게 고상한 윤리의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문을 꼭꼭 채우고 다닌다.

내가 보기엔 별로 중요한 것이 없는 데도 꼭꼭 채운다.

함께 지내는 간호사나 조산원들이 일을 하고 있는데도

잠시 자리를 비울 때는 반드시 자기 사무실을 걸어 잠그고 다녀온다.

아마 이들의 관습에는 방문을 잠그지 않으면

모든 걸 가져가도 좋다는 의미가 담겨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인지, 내가 한국에 다녀오면

내 부엌에 쓰던 세간이 모두 없어지고 없다.

누가 가져갔는가 물어 보았자 쓸데없는 일이다.

물론 심중에 누가 가져갔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꼭 집어 잡아 낼 수는 없는 일이다.

심지어는 생수통이나 LPG 가스통 까지 들고 가 보건소에서 다 써버린다.

그리고 사다 준다고 하고는 절대 사다 준 적이 없다.

이렇게 윤리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이들이

거지 아이를 거지 아이로 취급하지 않고

한 가족처럼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자의 것은 탈취해도 좋고

가난하고 불쌍한 자는 돌보아야 한다는 불문율이라도 있는 것인가?

시청의 각 부서마다 성탄준비를 위해 바쁘다.

보건소도 예외는 아니다.

요번에 우리 보건소 직원들이 공연할 연극은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출산’하는 장면이다.

마리아 역으로는 실제로 임신 8개월 중인 사무원 체리가 맡았고

아기 예수는 거지 아이에게 맡겨졌다.

이것만도 나의 마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보건소 직원 자녀들도 얼마든지 많은데 연극의 주인공으로

자기 자녀를 택하지 않고 거지 아이를 택하다니!

그러나 이들이 무슨 신학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거지 아이를 아기 예수로 정한 것 같지는 않다.

의사는 산부인과 의사 역을 맡고,

물론 그는 평소에 산부인과 일도 본다.

간호사들은 그대로 간호사 역을 맡고,

물론 조산원들은 그대로 조산원을 맡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무대로 데리고 나와

모두 함께 춤추며 성탄의 기쁨을 온 세상에 알리는 거다.

그 때 택한 음악은 “강남 스타일”이다.

‘강남 스타일’과 ‘젠틀맨’은 이곳에서 별난 행사를 할 때

어른들이나 아이들에게 항상 들어가는 고정메뉴이다.

50세 중반이나 되는 의사 가우덴쇼우씨가 상당히 익살스럽게 춤을 잘 춘다.

평소에도 개그맨처럼 잘 웃기는 사람이다.

양쪽 다리를 교대로 들먹거리며 팔을 앞으로 펴고 강남스타일 춤을 추자

참석한 모든 공무원들이 폭소를 터트린다.

나는 아기 예수에게 예물을 가져다 준 동방의 세 박사 중 하나로

예물을 드리는 역을 맡았다.

얼마 전에 배운 마술로 장미꽃을 만들어 아기 예수에게 받쳤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거다.

오늘 나는 엉겁결에 거지 아이에게 예물을 바치는 역을 맡았다는 거다.

겉으론 내색을 안 하지만

속으론 늘 지저분하다고 더러워 슬슬 피하던 거지아이에게

여러 사람이 바라보는 대중 앞에서

그를 아기 예수님으로 정중히 모시고 예물을 바쳤다는 거다.

내가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장미꽃을 만들어 내자

실내체육관에 앉아 있는 약 100여명의 공무원들이

모두들 놀랍고 신기하다는 듯 환호성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난 그 장미꽃을 경건하고 축복하는 마음으로

아기 예수 역을 맡은 거지에게 바쳤다.

평소에 거지를 쌀쌀맞게 대하던

나의 자비롭지 못한 성정으론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내가 그 더러운 거지 아이에게 선물을 바치다니!

이는 분명 나의 의지가 아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형편없는 성정을 가진 나를

구원하고 싶으신 하나님의 섭리가 임하신 것 같다.

아! 하나님에게는 거지가 없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은 모두가 존중받아야 할 존재들이었다.

부자도 가난한자도 귀한자도 천한자도 없었다.

오직 동등한 인격체를 가진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었다.

하나님에게도, 필리피노들에게도

그 아이는 거지가 아니고 오직 홈리스 아이일 뿐이었다.

이 곳 사람들은 그를 ‘루벤’이라 불렀다.

그는 버젓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이 불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매번 그를 ‘거지’라고 불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거지 아이나 나나 홈리스 신세는 마찬가지다.

이방인으로써 내 일신에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그보다 내가 더 의지할 때 없는 외로운 처지가 된다는 것을 생각도 못하고

나는 주제파악도 못하고 그를 더러운 거지로만 여겼다.

아, 나의 성정이 이 정도란 말인가!

이 우매하고 불민한 자가 어찌 용서 받을 수 있을까!

이번 성탄절,

아기 예수는 나를 구원하러 오셨던 것이었다.

이제 루벤과 인간적으로 좀 더 가까이 지내야겠다.

그런데 그가 더러운 손으로 나를 만지는 것을 어떻게 참아내야 할까!

2014년 12월 22일

실내체육관에서 있은

시청직원 성탄행사를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