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든 말하시오. 내가 모두 들어주겠소.”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찾아와 말했다. “대왕이시여, 나는 지금 햇볕을 쬐고 싶은데 대왕이 가로막고 있으니 한발만 옆으로 비켜주세요.”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항상 남루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디오게네스에게 마을사람이 빈정거리듯 물었다. “사람들은 거지는 동정을 하지만 철학자는 동정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철학자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거지가 될 가능성은 있지만 철학자가 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라오.” 오늘은 두 번째를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한항공의 소위 ‘땅콩회항 사건’을 보도하며 일부언론들은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갑(들)의 이런저런 횡포를 소개하며 이 기회에 을(들)이 각성하고 단결하여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정작 이의 발단이 되었던 대한항공의 을들은 단결은커녕 피해를 당한 동료를 협박하며 왕따시키고 있다니 말 그대로 갑질보다 더한 을질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여운진 상무도 조현아의 을이다.)

나 역시 지난날 조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윗사람을 모셔도 보았고 아랫사람을 거느려도 보았다. 그러니 상사의 지시를 거역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일인지 잘 안다. 때로 부당한 일을 지시 받곤 몇 날을 고민했던 기억도 있다. 한번은 상사가 내게 아랫사람을 내보내라고 지시했는데 그 이유가 황당했다. 미혼인 여직원의 애인이 실업자라는 말을 들었단다. 돈을 만지는 경리일을 하는 여직원의 애인이 실업자라면 금융사고를 낼 가능성이 크니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상사의 지시에 나는 정말 난감했다. 정당한 사유도 아닌데다가 여직원의 가정 형편을 보아도 실직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나는 연대보증이라도 서겠다며 타협책을 건의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상사는 인척을 채용하기 위해 그 여직원을 내보내려 한 것이었다. 나는 상사의 지시를 거부했다. 내 손으로 해고기안서를 올릴 수는 없다고 버텼다. 그런데 그 뒤로 내가 당했던 수모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나는 조직에 위해를 가할 위험인물로 낙인이 찍혔다. 심지어는 여직원과 불륜을 맺었다는 소문도 퍼졌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동료들이 나와 함께 식사하는 것도 눈치를 보며 꺼려했다. 너무도 힘들고 절망스러워 내가 사표를 낼 작정을 했을 때 마침 그 상사는 부당한 거래에 연루되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자 금세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결코 굴하지 않고 더구나 부하직원을 끝까지 책임지는 모범적인 중간관리자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 상사의 자리에 부임한 다른 상사는 내 말이라면 무조건 신뢰하며 대신 전결권을 주기도 했다.

위의 일이 내 자랑으로 들릴까봐 부득이 고백을 해야겠다. 당시 수모를 겪을 때 나는 여직원을 내보내지 않은 것을 무척 후회했었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그 상사에게 사정을 하고도 싶었다. 사표를 던질 생각을 하자니 너무나 억울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 일의 시종의 기간이 별로 길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지금도 안도를 느낀다. 아무튼 그 때 나는 세상인심의 조석변이를 절감했고 한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절망스러운 일인가를 체험했다. 사람들은 집단범죄에는 죄의식도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몇 년 후 내가 미국이민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꼴’이 난무하는 조국의 현실이 싫었던 이유도 있다.)

앞의 얘기로 돌아가자. TV를 통해 박창진 사무장의 고백을 들으니 나도 눈물이 났다. 나는 소위 갑의 눈치만 살피며 목을 매는 을의 비겁함에 연민보다도 분노를 느꼈다. 동료가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으면 말 그대로 같이 죽을 수는 없겠지만 앞장서서 떠밀지는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더구나 여운진 상무가 박창진 사무장에게 조현아의 불법행위에 대해 거짓진술을 강요하는 내용의 녹음을 들었을 때엔 ‘이런 인간이 있나’ 적개심마저 느꼈다.

박창진 사무장의 사건은 이 땅의 을이라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피해이다. 그러니 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진실과 정의의 편에 서야만 한다. 이것은 선의도 동료애도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의 당위이다. 갑의 불법을 감싸주고 아부하며 아무 잘못도 없는 동료를 왕따시키는 을이 있는 한 갑질은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