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으면 가난하기도 어렵다."니 무슨 소리인가? 모순이 아닌가? 돈이 없으면 가난한 법인데 어렵다니?
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했던 예수의 어법이다.

현실적으로 표현하자면 바라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적은 것에 만족한다는 뜻일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의자를 새로 사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쓰는 회전의자는 30 년 전에 친구가 사업을 시작하려다 망해버려 사무실 문을 닫으면서 얻어온 의자이었다. 그러니까 돈을 주고 산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새 것이라는 의미이다.

방 2개짜리 연립주택에 사는 처지라서 내 서재가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회전의자가 자리를 제법 차지했었다. 3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앉아 있는 것에는 불편이 없다.

거리를 지나다가 의자가 버려진 것을 보게 되면 내 의자 보다는 모두 최신형이다. 물론 그 의자들은 어딘가 망가져서 버린 것들이었을 것이다. 또 대형 가구점에 가보면 좋은 의자가 많이 나와서 의자를 바꾸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래서 내 년에는 반드시 의자를 바꾸기로 했다. “얼마나 산다고 의자 하나 못 바꾸고 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즉 최소한 나에게 새 의자를 살만한 돈 정도는 있다는 것이다. 돈이 있기 때문에 좀 더 좋은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의자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이 가난한 상태를 버린 것이다.

택시 운전을 할 때 한 번은 공항에서 손님을 태우는데 행색이 남루한 노인이 30 년은 되었을 듯한 구닥다리 가방을 들고 탔다. 택시에 타서 보통 백인들은 운전사에게 말을 걸지 않는데 노인은 친절하게 말을 걸고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내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까 다윈이라는 호주 북부에 있는 주도에서 왔다길레 호기심이 생겨서 거기서 뭐 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가톨릭 주교란다. 주교라면 호주에도 30 명밖에 없는 가톨릭의 고위 성직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알고 보니 그의 남루한 행색이나 고물 가방이 오히려 돋보였다.

호주에서는 수녀들도 평상복을 입고 다닌다. 가끔 수녀들을 태울 때가 있는데 화장을 하지 않고 검소한 복장을 하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이다. (아직 젊은 수녀는 못 보았지만).

내가 한국에서부터 알고 있는 그리스토퍼라는 호주인 성공회 수사가 있다. 그는 20 년 전에 한국에 성 프란시스코 수도회를 세우기 위해서 왔는데 가끔 호주에 온다. 호주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는 한국에서처럼 아무 생각 못하고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헤어지고서야 내가 지금은 한국에서와는 달리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돈을 주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물론 그 다음에 만났을 때는 꼭 돈을 준다.

신앙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수사를 만나면 많든 적든 반드시 돈을 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나를 만나러 올 차비는 있어도 내가 차비를 주지 않으면 돌아갈 차비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도자의 가난은 지저분한 가난이 아니라 깨끗한 가난이다. 꼭 수도자들만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시골에서 단순하게 사는 것이 그런 경우라고 하겠다.

나는 그것을 편안한 가난 즉, 안정적 가난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안정적 가난’ 도 있을까?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늘 부자 될 생각만 하고 있으면 불안한 가난이 아닌가?
부자가 될 가능성이 많으신가? 아무쪼록 잘 먹고 잘 사시라.
부자가 될 가능성이 별로 없으신가? 그렇다면 안정된 가난을 누리자.

예수가 조용기 목사처럼 부자 되라고 한 적이 있던가? 그런 씰데없는 이야기를 하셨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를 안 해도 인간은 눈에 불을 켜고 서로 부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던가? 예수를 따라 다니며 예수의 말을 듣기를 즐겨하던 청중들은 언제나 웃음 보다 눈물을 흘릴 일이 더 많은 절대적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이었다.

“비참한 상태는 곧 끝날 것이다. 거지들이 아브라함과 더불어 잔치를 벌일 것이다. 좋은 시대가 곧 다가올 것이다. 나중된 자가 먼저 될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예수가 던진 메시지는 명백한 것이었다. 예수는 내세에서도 현세에서도 천국을 약속하지 않았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내세보다는 오히려 현세 쪽에 비중을 더 두었다.

그러나 내세에서 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꿈을 제시하여 현재를 잊게 만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구체적인 해결의 길도 마련해주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의 딜레마였다.

가난한 자들의 현세의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지배자들에 대한 적대감도, 내세에 대한 소망도 주장하지 않는 것은 마치 날카로운 양 날을 가진 칼날을 손으로 잡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어느 쪽을 잡아도 손을 베일 수밖에 없는 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긴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긴장의 끝은 십자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