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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목사가 된 이유’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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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년 09월 05일 (금) 19:51:24
최종편집 : 2014년 11월 09일 (일) 17:07:22 [조회수 : 3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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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욕을 하려 목사가 된 필자

필자가 가르쳤던 대학에는 기독교수회라는 것이 있어 각 단대(單大)마다 그 지부라 할 수 있는 모임도 있었는데,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인문대학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식사를 겸한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인문대의 그 모임은 식사기도를 하는 것을 빼면 세상의 여느 모임과 별로 다를 게 없어 필자는 빠지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한 번은 필자가 ‘무엇이라도 좋으니 식탁에 신앙에 대한 화제를 하나씩 올려 보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 놓았고, 그게 받아들여졌다.

대학교수들은, 특히 인문학 전공의 교수들은 토론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보니 그 후로는 모일 때마다 열띤 토론이 벌어지곤 했다. 그런데 필자가 목사안수를 준비하고 있던 무렵, 한 교수님이 필자에게 ‘왜 목사가 되려 하느냐’고 물었다. 필자의 입에서는 ‘목사들의 욕을 하기 위해’라고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설마한들 목사들의 욕을 하기 위해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이야 했겠는가마는, 그런 면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보면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농담만도 아니었던 것 같다.

이십대 중반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필자는 초신자 때부터 비교적 신앙에 열심이었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 알려고 나름대로 기도하며 애를 썼다. 그런데 교회들의 모습이 자신이 이해하는 기독교 신앙과는 많이 달라 불만이 컸다. 그리고 그것은 세월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신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한 필자로서는 자신의 생각이 꼭 옳다고 하는 자신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막연하게 신학대학에서 잘못 가르쳐 목사들이 교회를 바로 세우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부터 그런 게 아니라 목사들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어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가 본연의 모습을 잃은 채 바르지 못한 길로 가게 된 데에는 누가 뭐래도 목사들의 책임이 크다. 모두가 다 목사들 때문이라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거의가 그렇다는 데에 의견을 달리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항해 중인 교회라는 배의 키(rudder)는 목사들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목사들이니 그들이 바로 서지 않으면 교회가 바로 설 수 없고, 교회가 바로 서지 않으면 기독교의 추락은 막을 길이 없다. 그러니 쓴 소리라도 해서 그들을 자극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욕심이 목까지 차다 못해 입으로 질질 흘러나오는 필자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신학교에서 배우지도 않고 성경도 말하고 있지 않은 신앙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일까. 욕심, 욕심 때문이다. 교회를 키워 보겠다는, 그래서 목회를 성공으로 이끌겠다는 욕심, 그것이 무엇보다도 큰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좀 더 높은 데로 올려놓아 더 큰 영향력을 가지려, 물질과 그것을 포함한 많은 것들을 더 많이 챙기려 부리는 욕심 때문이다.

이에 ‘교회의 성장과 목회의 성공이 어떻게 욕심이 될 수 있느냐, 그게 만약 욕심이라면 거룩한 욕심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음을 안다.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성장이 됐건 목회의 성공이 됐건 목적이 불순하고 방법이 바르지 않아 성경과 거리가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마귀의 일이라는 말이다. ‘거룩함’과 ‘욕심’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거의 모든 문제는 욕심 때문에 생긴다. 우선 교회에서의 문제들을 보라, 욕심 때문에 생기지 않은 문제가 얼마나 되는지를. 표면적으로는 성경을 들먹거리고 하나님의 뜻도 내세우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욕심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인간은 어차피 욕심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욕심을 모두 버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욕심을 비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개는 거짓말이다. 비웠다면 극히 일부일 것이다.

누구누구는 믿음이 좋다느니 아니면 나쁘다느니 말들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믿음이 좋은 것일까. 병 고치는 은사가 있는 사람, 방언을 하거나 투시의 은사를 받은 사람, 열정적으로 기도하거나 교회봉사를 잘하는 사람, 어떤 사람일까. 그런데 진짜 믿음이 좋은 건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인격이 믿음으로 바뀌어 가는 사람이다.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정직하고 근면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살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인격으로 변화되어 가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은 욕심이다. 믿음에 가장 큰 걸림돌은 욕심이라는 말이다. 봐라. 북한에서나 하는 정권세습을 끌어다가 교회세습으로 바꿔 놓은 사람들이나 교회에서의 비자금을 생각해낼 만큼 기가 막히게 엉뚱한 쪽으로 머리가 발달한 사람들을. 그리고 교회건물을 성전이라며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교인들의 돈을 우려내어 크고 화려하게 짓는 사람들이나 섬기려 이 땅에 오셨다 하신 예수님과는 반대로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을. 모두 욕심을 덜어내지 못한, 아니 그것을 무슨 신주단지나 되는 것처럼 껴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누구라고 할 것까지도 없이 필자는 정말이지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 욕심이 목까지 차고도 남아 입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추한 꼴을 보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필자이다. 그런데 둔하기 이를 데 없는 필자는 나이 육십이 다 되어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깨달은 후로는 그것을 덜어내려고 기도하며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천성이 욕심으로 단단하게 뭉쳐진 사람인지라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 왔다. 그래도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가슴의 위, 목의 아래 부분만큼은 비워진 것 같다. 비워진 것은 총량의 몇 백분의 일만큼도 안 되지만, 그래도 운신하기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나이가 많은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욕심을 덜어내는 데에 도움이 됐으니 말이다. 하기야 노욕(老慾)이라 해서 나이가 들어 늘게 된 욕심은 브레이크가 잘 듣지 않아 노추(老醜)로 이어지는 예도 없지 않으니 이 또한 은혜가 아닌가 싶다. 가능한 한 소천 때까지 쉬지 않고 그 욕심이라는 것을 비워 볼 생각이다. 그것이 믿음의 인격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고, 그것이 또 신앙을 성장시키는 것이니 말이다.

 

필자 주변의 목사님들 세계에도 이런 일이……

전도사가 되기 위한 시취(試取) 때였다. 늦깎이로 신학을 공부하고 보니 시취위원 목사님들은 나이가 필자보다 열 살에서 스무 살 정도가 적었다. ‘왜 전도사가 되려 하나요?’라는 한 젊은 시취위원의 질문에 필자는 문서선교를 위해서라 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는 동기가 매우 빈약하고 목적도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하셨다. 그런 일을 하려면 굳이 전도사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며 이번은 전도사니까 통과시켜 주지만 목사시취 때는 어림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목회는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야 하지만, 문서선교는 왜 그래서는 안 되는지 머리가 좋지 못한 필자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이 다양화되어 가는 현대인데 신학을 했으니 다른 일을 하면 안 되고 반드시 목회를 해야 한다니 그런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신학대학 최종학기였다고 기억되는데, 필자는 동기생들에게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졸업하면 목회를 하지 마라. 몇 집 걸러 교회가 하나씩 있는 게 우리의 실정인데, 그리고 빈자리가 많은 교회가 수두룩하고 문을 닫는 교회도 없지 않은데, 그런데다가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어 빈 목회자리 하나 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는데, 당신들까지 목회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골치가 아프시겠느냐?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도와 드리는 것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필자는 무슨 일이 됐건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은사에 따라 해야 즐거움으로 할 수 있고 능률도 오른다. 능력 없고 은사도 없는 사람이 개척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고생만 지지리 하고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개척을 하고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교인이라야 자기 가족을 포함하여 열 명도 채 못 되는 교회가 부지기수이다. 그럴 경우 고생은 자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도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교회생활은 기쁨이 아니라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

목회는 능력 있고, 은사 있고, 사명감 강한 사람이 하게 하면 된다. 자기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으로 하는 것이 그분의 뜻에 따르는 것이다. 목회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하면 어떤 일도 하나님의 일이 된다. 그렇게 하는 일상생활이 가장 큰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목사시취 때는 앞에서 언급한 분이 시취위원 자리를 물러난 상태여서 다행히 문서선교를 하겠다는 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취논문이라는 것에 딱 걸리고 말았다. 다섯 분의 위원이 각각 하나씩의 주제를 주어 논문을 쓰라는 것이었는데, 네 편의 논문은 별 어려움 없이 통과되었으나 한 편이 문제가 되었다."OO교회 집사의 특징”에 대한 논문을 쓰라는 것이었는데, 그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필자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제를 주신 목사님께 여쭤 봤으나 그런 걸 알려 주면 되느냐는 핀잔만 들었다. 자격을 위한 논문은 본래 지도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쓰는 것이라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러며 관련 자료가 OO신학대학교 도서관에 넘치도록 많으니 가서 찾아보라고만 하셨다.

그래서 그 대학의 교수님 한 분의 안내로 도서관의 서고를 다 뒤져 봤으나 그런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안내해 주신 교수님은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하셨다. 주위의 같은 교단 목사님들께 여쭤 봐도 그런 주제에 대해 아는 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필자 나름으로 썼다가 많은 목사님들 앞에서 ‘OO교회 집사의 특징’도 모르다니 OO교 목사의 자격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인격적인 모욕만 받았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싹싹 빌고나서야 논문은 통과될 수 있었다.

완성된 논문은 다섯 분의 시취위원을 일일이 찾아가 제출했는데, 한 번은 명색이 문학박사라는 필자가 중학교 저학년 수준에도 못 미치는 문학론 강의까지 모멸감을 참으며 지루하게 들어야 하기도 했다.

목사들의 세계를 어느 정도는 접해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도사와 목사 시취를 통해 알게 된 그들의 정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했다. 문대(文大) 기독교수회에서 목사의 욕을 하기 위해 목사가 되려 한다 했던 말에 대한 벌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믿음의 글을 쓰는 것이 하나님께서 필자에게 주신 사명

사실을 말하면, 필자는 믿음의 글을 쓰기 위해 신학을 했다. 글이 안다고 써지는 것은 아니지만 모르고선 쓸 수 없는 것이 글이다 보니 공부를 하기로 한 것이다. 문서선교는 학문을 시작하여 얼마 안 되고부터 필자의 꿈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필자 자신도 모른다. 아마 믿음의 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데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문학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이지 작가가 아니기에, 그중에서도 가장 말석에 위치한 사람이기에 글을 쓸 만한 위인이 못 된다. 무엇보다 문재(文才)가 절벽이다. 그런데도 글을 써 보겠다고 나선 것은 그나마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니 없는 문재와는 별도로 글쓰기가 좋아서이다. 거기에다 무엇인가를 집필할 때면 나 같은 사람이 믿음의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여 눈물이 날 때도 있다. 사실이야 알 수 없지만 믿음의 글을 쓰는 것이 하나님께서 필자에게 주신 사명이라 믿고 있다.

소설 <雪國(눈 고장)>으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구상 같은 것을 특별히 따로 하지 않고 작품을 쓴다. 그러나 생각나는 대로 그냥 써도 그게 어떠한 작가의 작품보다 훌륭한 구상이 된다. 명작 <눈 고장>도 본래는 단 편으로 써 잡지에 발표했던 것인데, 그것에 몇 번인가 더 써 보태어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작품이 되었다. 필자 같은 사람으로선 바보처럼 입을 헤벌쭉 벌린 채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 흉내조차 낼 수가 없는 일이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 씨는,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 나가는 것이다’라고도 말한다.

그녀와 같은 훌륭한 작가도 그럴진대 필자 같은 피라미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글을 쓸 때마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는 수밖에 방법이 달리 있겠는가. 문재가 없는 만큼 조사 하나 어휘선택 하나에도 신경을 쓰고, 어순이 제대로 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과 노력을 더 많이 들여 쓴다. 그런다고 글다운 글이 써지는 것도 아니지만.

당연한 일이지만 필자가 더 마음을 쓰는 것은 문장보다 쓰는 글의 내용이다. 사실보다 진실 쪽에 무게를 두고 쓰며,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쓴다. 믿음의 글이니만큼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지 않게, 성경의 정신에 따라 쓰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쓴다. 시사칼럼 같은 것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다. 진보성향에 가까운 필자이지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말없이 지긋이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쓴다.

일기 같은 것이 아닌 한 글은 읽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 해도 읽히지 않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글을 쓰는 사람들은 독자들의 반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독자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입맛에 따라 글을 쓴다면 안 될 일이다.

소인배중의 소인배인지라 필자도 독자들의 입맛에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그러나 많이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필자도 못 되지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자각만은 있어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치는 일만은 게을리 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독자들의 입맛을 따라 쓴다면 교회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지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채우는 것과 무엇이 얼마나 다르겠는가.

요즈음은 필자처럼 문재 없는 말석의 목사에게조차 글을 실을 공간을 할애해 주신 <당당뉴스> 구성원 여러분들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이 크다. 좋은 글은 못될지라도 독자 여러분께 반면거울의 역할이라도 되어 작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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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 (115.77.168.114)
2015-02-11 00:26:35
목회하지마세요.
무지한 여러사람 지옥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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