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부실대응’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며 사표를 제출했던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사표를 수리하겠다는 자신의 입장을 60일만에 번복한 것이다.

정 총리의 사표수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박 대통령 자신은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기에 안대희 전 대법관을 총리로 지명하여 국회에 인사청문회 요청서까지 제출했고, 낙마하자 다시 문창극 씨를 지명한 것이 아닌가.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진 ‘사퇴 총리의 유임’이라니 해외토픽으로나 어울릴 것 같은 사건이다. 코메디도 그런 코메디가 없다. 그럼에도 유임 발표 후 박 대통령은 인사청문회까지 가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 안타까운 일이 누구 때문에 벌어졌는가. 대통령 자신이 지명한 문창극 씨가 총리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는데도 청문회에 가지 못한 것인가.

지명을 받은 문창극 씨는 언론이 자신의 말 중 “몇 구절만 따서 보도”했다며 “전체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시킨다면 그것은 진실 보도가 아니다”고 항변하여 언론 탓, 여론 탓을 했다. 그리고 국회 탓을 했다. “국민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오도된 여론이 국가를 흔들 때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는다”고도 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말 그의 말 중 몇 구절만 따서 전체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시켰는가. 정말 그가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오도된 것인가. 필자도 그가 한 교회에서의 강연의 동영상을 다 보았지만 여론이 오도되었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자기가 쓴 글들이 말하고 있고, 대학에서 한 강의가 말하고 있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그는 또 “평범했던 개인시절 제 신앙에 따라 말씀드린 것이 무슨 잘못”이냐며, “김대중 전 대통령님은 옥중서신이라는 책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고난의 의미를 밝혔다” 하고는, “저는 그렇게 신앙고백을 하면 안 되고 김대중 대통령님은 괜찮은 겁니까”라고도 했다. 일견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에게 있어 신앙관은 인생관의 다른 이름이다. 신앙관과 인생관이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중인격자이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언제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의 신앙고백을 했는가.

국민들은 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까지 가지 못해서 안타까운 게 아니라, ‘사퇴 총리의 유임’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것을 박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안타까운 일은 대통령 스스로가 초래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청와대는 총리 후보자를 인선하며 “할 만한 사람은 검증이 두려워 손사래를 치고, 하겠다는 사람은 능력이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수첩인사라’는 말이 달리 나왔겠는가. 수첩 속에서 사람을 찾으려 드니 인재풀의 빈곤이 실감되었을 것이다. 수첩을 벗어나 시야를 좀 더 넓힌다면 우리 대한민국에 총리를 할 사람이 한 명도 없겠는가. 나라와 국민을 철저하게 무시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문 후보자의 임명동의안 국회 제출을 앞두고 중앙아시아 순방길에 올랐다. 그리고 전날로 예정됐던 임명동의안 제출이 돌연 연기되었다. 현지 일정상 대통령이 전자서명 재가를 하지 못해 제출을 미뤘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임명동의안 재가를 귀국 후 검토하겠다고 했다.

국민들 가운데에서는 문 후보자가 자진사퇴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 문 후보는 청문회까지 가겠다는 열의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였다.

박 대통령은 말과는 달리 귀국 후 문 후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다. 말을 해야 할 때 침묵을 지키는 모습을 또 보인 것이다. 문 후보도 요지부동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양쪽 다 버티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는 말도 나왔다.

이런 상황인데도 박 대통령은 역시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지 않은 채 버티기로 보이는 모습을 계속 유지했다. 그러는 가운데 문창극 후보자의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추정된다고 국가보훈처가 밝혔다.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다. 여당과 보수언론은 “추정”을 “확인”으로 바꾸어 문 후보 거들기에 나섰다.

자료검토의 하루 만에 결론을 낸 국가보훈처의 발 빠른 행보에 많은 뜻있는 국민들은 울화통을 터뜨렸다. 자료를 검토하여 결론을 내리는 데엔 적어도 1,2년이 걸린다 하는데, 아무리 빨라도 두세 달은 걸릴 터인데, 왜였을까 하는 의심을 해 본 것은 필자뿐일까 싶다. 문 후보가 명예롭게 자진사퇴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한 외부의 힘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다.

국가보훈처의 주장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며 이어 “국가보훈처의 발표와는 달리 1921년 4월 9일자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이나 공적조서에도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나 본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원적지가 삭주라고 주장하는 보훈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며 “만약 삭주 전투를 근거로 삼았다면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이라는 당시 독립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무시한 비상식적 해석”이라고도 말한다.

문 후보자는 “제 가족은 문남규, 할아버지가 삼일운동 때 만세를 부르다 돌아가셨다는 가족사를 아버님으로부터 듣고 자랐다”고 말했는데, 이 “만세를 부르다 돌아가셨다”는 것과 ‘삭주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을 어떻게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인지 아둔한 필자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창극 씨의 조부 문남규 씨가 삭주에서 전사한 문남규 선생이 아니라고는 누구도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양자가 동일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국가보훈처가 단 하루사이에 서둘러 발표한 것은 외부의 힘이 작용했으리라는 것 말고는 필자로선 설명이 안 된다.

설명이 안 되기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책임을 진 ‘사퇴 총리의 유임’이라는 현실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잘못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 말고는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국가개조가 아니라 개악의 불을 지핀 것 같다.

방법은 달리 없다. 수첩을 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재풀을 넓히면 된다. 청문회 무용론 같은 것을 들고 나온다고 될 일이 아니다. 청문회법을 누가 우겨서 만들었는가. 지금의 여당이 야당시절에 그리한 것이다.

노무현 정권 때 만들었고 이명박 정권 때 없앤 인사수석실을 다시 만들겠다고 하지만, 인사위원장을 겸한 김기춘 비서실장을 그대로 둔 채 그런다고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지도 의문이다. 김기춘 비서실장을 살리려는 꼼수라는 항간의 소문이 헛소문이기를 바랄뿐이다. 총리실에 인사혁신처를 신설한다고도 하지만 그것도 박 대통령이 수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한 기대할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한 번 높아진 국민들의 눈높이를 낮추라는 것 또한 말이 안 된다. 대통령이나 당에 충성할 사람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할 사람을 찾는다면 어찌 그런 이가 한 사람도 없겠는가. 한국전쟁의 휴전 60년 만에 남북이 대치하는 가운데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어 온 우리 국민이다. 수첩을 버리고 눈을 크게 떠 사방을 바라보라.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임종석 (충남대학교 명예교수‧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