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빈 박스
2014년 3월 10일, 월요일

순례자는 또 다음 길을 향하여 떠날 준비를 한다.
머무는 곳이 나의 집이요, 만나는 사람들이 나의 형제이다.

남은 옷가지들을 모두 어제 주일 이곳에서 제일 가난한 교회에 가져다주고
오늘 아침 빈 박스를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하다가
먼저 번 꾸보 하우스에서 더 필요하다는 말이 생각나다.
이른 아침, 아직 정복으로 갈아입지도 못한 경찰관에게 부탁하여
빈 박스를 싣고 꾸보 하우스를 방문하다.
오늘은 일부러 조안의 시어머니를 찾아가 전달하다.
시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빈 박스 하나만 얻어도 저렇게 행복해 하다니!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다.
꾸보 하우스 대나무 방바닥에서 찬바람이 들어 올 때는
빈 박스 하나만이라도 있으면 족하다 생각했지만
샛바람을 막고 나면 이제 또 다른 필요한 것들이 생각날 것이다.
먼 훗날, 이들이 빈 박스 하나에도 행복을 느낄 때가 있었다는 추억을 할 때,
이들은 이미 행복과 너무도 먼, 세상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그들과 보조를 맞추느라고 또 다른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발전이 결코 좋은 것만이 아니고
문명이 반드시 인간에게 편리한 점만 가져다주는 게 아니다.
문명으로 인해 많은 동식물들이 멸종되거나 위기에 처하여 있으며
발가벗고 살던 산속의 망얀족이나 아이따족들도 옷의 필요성을 느끼고
도시인들에게 걸쳐 입을 옷을 위한 구걸행각을 하게 되었다.
발전과 문화생활은 인간의 정신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고
알 수 없는 두통과 신경통을 가져 오기도 한다.

지난 주 카나다에서 찾아 온 환자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35세 젊은 남자가 아직 결혼도 못하고 원인모를 두통으로 고생하고 있다.
직업이 간호사였는데 요즈음 건강 문제로 휴직을 하고
몸을 쉴 겸 NGO 단체의 해외자원봉사단으로 일하고 있다고.
물론 많은 의사들에 의하여 자기 몸을 세밀하게 검사 해 보았지만
아무 의사도 그의 두통의 원인을 잡아 내지 못하였다.
그가 마닐라에 봉사하러 왔다가 어떻게 내 소문을 듣고
버스로 12시간이나 걸리는 먼 산악지역 세르반테스까지 찾아왔다.

상담해 보니 그는 엑스레이나 혈액검사로 밝혀낼 수 없는 마음의 병이었다.
현대의학은 마음의 병도 기계로 잡아 보려고 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현대 문명이 가져다주는 병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치료할 가능성이 딱 하나 있다.
문명이전의 의술, 과학이전의 의술을 적용해 보는 거다.
한 번도 침을 맞아 본 경험이 없는 서양의 젊은이가
약 30년 동안 병원과 약에 의지하여 지냈던 나의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의 간증을 듣고 난 후 떨리는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타의가 아니고 전적으로 자기의지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누운 것이다.

약 1시간에 걸쳐 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정신요법과 면역요법을 받고 돌아갔다.
이틀 후에 다시 찾아 온 그가 자기 몸의 새로운 변화를 체험하고
나의 치유사역에 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4월 초에 본국 카나다에 귀국하였다가 11월경에 필리핀에 다시 와서
내 옆에서 봉사도 하고 공부도 하고 지속적으로 치료도 받고 싶다고!
그는 간호사 생활을 하며 의대도 다니다가 너무 골이 아파 휴학 중이었다.
청운의 부푼 꿈을 꾸던 의대생이었다.
최첨단 의학을 공부한 선진국의 의학도가
현대의학에 문외한인 아시아의 조그만 늙은이에게
공부를 하고 치료를 받으러 온다니!

깊은 산골짜기에 살아도, 조그만 수신기를 통하여 인터넷이 터지니
세상 아는 모든 사람들과 매일 소식을 주고받으며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발전하는 과학 덕분에 깊은 산속에서도 여러 나라 사람들과
교제를 이루게 되다니 얼마나 재미난 세상인가!
이런 의미에서 현대과학을 불신하는 게 아니다.
현대과학만을 신처럼 신봉하지 말자는 말이다.
현대과학이 알고 있는 지식은 절대자가 알고 있는 지식의
고작 5% 정도이니, 과학자들과 그의 추종자들은
늘 겸손한 마음으로 과학을 넘어선 세계를 보려고 애써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 실체로 인식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안목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아직 발전 과정에 있을 뿐인 과학을 너무 신봉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라 볼 수 없다.

마닐라에 사는 조안의 친정엄마가 마침내
그 먼데서 새로 태어난 아기를 보러 꾸보 하우스에 왔다.
엄마가 안 온다고 매일 울기만 하더니 모녀가 즐거운 상봉을 하였다.
아무리 자식이 미친 짓을 하며 돌아다닌다 해도
어찌 부모의 정을 끊을 수 있으랴.
밤이면 찬바람이 세차게 밀치고 들어오는 꾸보 하우스에서
새로 태어난 가출한 딸의 두 번째 아기를 끓어 안고
대책 없는 딸을 바라보며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말이 안 통하니 나를 보고도 감사하다는 말도 못하고
슬금슬금 피하기만 하다.
딸을 예수라고 이름 지은 것은 조안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녀도 확실한 대답을 안 해준다.
누가 그의 이름을 지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이 주신 교훈과 가르침이다.

조안의 꾸보 옆 마당에선
어미돼지가 새끼돼지에게 젖을 먹이며 힘들어 축 늘어져 있다.
조안의 친정어머니도 그녀를 그렇게 힘겹게 키웠을 것이다.
모든 생물의 어미(어머니)는 제 2의 신이며,
생명체의 존속을 위한 신의 화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