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꼬치 장사
2014년 2월 4일

모내기 일도 한 철이었다. 이제 일거리가 없다.
에밀리가 그렇다고 맥 놓고 놀기만 할 수 없다.
집도 없이 움막에서 땅바닥에 볏짚을 깔고 겨우 사는 궁핍한 생활에서
자식 다섯 명을 키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출렁다리 근처까지 가니
에밀리가 멀리 길 옆 논 한가운데 작은 판매대를 마련해
몇 가지 튀김을 만들어 장사하는 모습이 아련히 보인다.
어제 저녁에 갔을 땐 한 명의 손님도 없어 쓸쓸하더니
오늘은 어른들과 아이들이 제법 모였다.

튀김 메뉴는 베지터블 볼과 휘시 볼이다.
아마 하나는 야채로 만든 것이고, 하나는 생선가루로 만든 모양이다.
베지터블 볼의 크기는 우리나라 추석에 먹는 조그만 다식 정도의 크기이고
휘시볼은 다식 보다 조금 얇게 만들었다.
베지터블볼은 하나에 2페소, 휘시볼은 하나에 1페소다.
논 한가운데 땡볕에 앉아 하루 종일 장사를 한 결과 거의 모두 팔고
밑바닥에 조금만 남았다.
오늘 얼마나 팔았느냐 물으니, 150페소 팔았단다.
논에 다니며 도급으로 일하는 것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수입이다.

모내기에 늘 함께 따라다니던 왕아버지의 막내아들이
2페소를 내고 베지터블볼을 하나 사 먹는다.
족보로 따지면 왕아버지의 아들은 에밀리의 친 남동생이며
꾸보의 한 울타리 안에 살고 있다.
어린 남동생이 먹고 싶어 하면 웬만하면 그냥 하나 집어 줄 만도한데
가난한 살림에 그리고 돈이 개입되어 구매행위를 하는 상거래에는
형제나 친척도 공짜가 없는가보다.
이는 아마 그들끼리의 불문율인 모양이다.
하기야 왕아버지 수하에 어린이가 열두 명도 넘고
모두가 먹고 싶어 하는데 어찌 거저 줄 수 있으랴.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맞구나.
너무 가난하면 형제간에도 인색해지니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가난을 물리쳐야 한다.

나도 하나 사서 맛을 보니 먹을 만하다.
그냥도 도와주는데 몇 푼 안 되는 것 팔아주지도 못하면 되는가.
옆에 서서 마른침을 삼키며 구경하고 있는 어린이와 부모들에게
모두 두서너 개씩 손에 지켜주니 모두들 맛있다고 좋아하다.
에밀리의 딸은 어떻게 엄마한테 엄한 교육을 받았는지
아이들에게 하나씩 집어 주며 먹어보라고 주어도 먹지 않고 피한다.
키가 큰 왕아버지가 아이들 뒤에서 긴 고개를 쭉 빼고
체면상 딸이 파는 것 먹고 싶다는 말은 못하고 물끄러미 처다 보고만 있다.
그도 마음대로 집어 먹으라며 몇 개 손에 지켜 주다.
에밀리는 사람들이 하나하나 집어갈 때마다 계산하느라 바쁘다.

“텐, 식스틴. 투엔티, 휘브티, -----, 휘브티 쓰리”에 가서 판매상황 종료.

조깅하는 중이라 내 주머니 속에
비상금 500페소 짜리 한 장과 20페소짜리 두 장만 있다.
여기서 500페소는 큰돈이라 아무데나 가서 바꿀 수도 없다.
40페소를 주고 내일 갚겠다하고 13페소는 외상으로 하다.

어린 시절에 가짜 돈으로 친구들과 놀던 일들이 생각난다.
이들은 지금도 땅바닥에 옹기종기 앉아 딱지치기를 하든가 구술치기를 한다.
이들과 함께 하는 동안은, 내가 아직 어린이인 것만 같다.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의 어린 시절을 다시 살아보다니!

체면을 내려놓고, 나이를 내려놓고---,
논두렁에 앉아 이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동안은
욕심도 근심도 걱정도 없이, 철없이 놀던 그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앞서가려 할 필요도 없고, 시기하거나 질투할 필요도 없고
비교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 속에서 평화를 누린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크고 놀라운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

평화는 누가 쥐어 주거나
환경이 만들어 주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상태가 되니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온 가족이 논두렁에 나와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꼬치를 많이 팔아줘서 그러나?
낼 다시 온다고 하니 에밀리 옆에 물끄러미 앉아서 보고만 있던
무표정 남편도 뭘 아는지 빙그레 웃는다.
돌아오는 길에서 논에 다녀오는 바랑가이 캅틴을 만나다.
그는 나와 여러모로 잘 아는 사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가 속한 컨셉션 바랑가이에서 의료봉사를 하였다.
그리고 지난 해 컨셉션 바랑가이의 미인선발대회 때는
그가 정식으로 서류를 갖추어 나를 심사위원으로 초청하였고
대회가 끝난 후 내게 감사장을 주기도 한 분이다.
그도 내가 꾸보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와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하다보니
꾸보의 왕아버지가 그의 아저씨뻘 되는 친척이었다.
예상한 대로 꾸보의 가족들이 컨셉션 바랑가이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곳에 와서 부자들이나 공직자들이나 가난한자들이나 구별하지 않고
모두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어느 날 시장님과 동행하여 어느 축제에 참여하던 날이었다.
시장님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나를 평가한 말이 생각난다.

“이 목사님은 어디가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아무거나 잘 드시어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합니다.”

시장님이 나에 대하여 그렇게 평가해 줄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였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인류를 평등하게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많이 배운 자와 적게 배운 자를 차별하는 것은 죄이다.
사람들을 편애하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게 정의이며 사랑이다.
세상이 변하여 하늘나라가 도래하면 혹은 하늘나라에 가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처럼
가난한자가 부자가 되고, 부자가 다시 가난한 자가 될 수도 있다.
짧은 순간 왔다 지나가는 우리들의 인생은
영원한 세상에 입성하기 위한 예행연습 기간이다.
인생을 실패하더라도 영원을 실패하면 안 된다.

필리핀 사람들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곳의 필리핀 공무원들과 가까이 지내며 피부로 느끼는 것은
이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너무 차별한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지만, 그런 습성들이 몸에 배었다.
아마 오랜 기간 식민지인으로 살면서 몸에 배인 약자들의 처세술인지도 모르겠다.
부자는 모든 게 용서되고, 가난한 자들은 작은 잘못도 큰 문제가 된다.
부자들은 뒤로 슬그머니 뭔가 줄지도 모르는 기대감에서 이리라.

그래서 그런가? 이곳 젊은이 들은
외국에 나가 죽을 고생을 하더라도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한다.
돈을 많이 벌어 고향에 돌아와
큰 집을 짓고 차도 사고 운전기사와 가정부도 두면
모두에게 존경 받으며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인생 말년을 황제처럼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주위에 더러 있다.

무식한 사람이 무식한 사람을 더 무시하고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곳에서 가난한 자는 이유 불문하고 무시당한다.
선교사도 가난해 보이면 즉각 무시당하고 배척당한다.
나 같은 경우 처음부터 시장과 시의원들의 정식 초청에 의하여 이곳에 들어 왔고
지금은 그들이 모두 나의 환자이며 친구가 되어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처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해 보이지 않으려고 각별히 노력하기 때문에
그나마 이곳에 붙어 배겨나고 있다.

이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정말 힘없고 연약한
그리고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매우 불쌍한 사람들이다.
문제가 생겨도 아무에게도 하소연할 때가 없는 외롭고 불쌍한 사람들이다.
전혀 남의 도움을 받아 보지 못하고 멸시와 천대만 받아오던 사람들은
남의 도움을 받는 것도 두려워하고 의심한다.
킹 아버지의 초등학교 다니는 한 아들 녀석은
내가 사탕을 손에 지켜 줄 때마다 이상하다는 의심의 눈초리로 받는다.
자기 친 누나도 자기에게 돈을 받고 나서야 베지터블볼 하나를 주는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거저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는 눈치다.

부자와 권력자에겐 무조건 아부하고, 가난한 자들은 아예 무시해 버리는
이 왜곡된 국민정서에서 나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무언가 바라고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공무원들이 아니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나와 함께 부담 없이 지낼 수 있는,
가난하여 집도 없이 사는 꾸보 사람들이 아닐까?
아마 예수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셔서
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받은 이들과 함께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세르반테스 시장, 벤자민 마가이씨와 그의 집무실에서

2014년 2월 5일 수요일

오전에 ‘조안’이 출산일을 앞두고 보건소에 검진 받으러 왔다.
그녀가 보건소에 오자마자 보건소 직원들이 모두들 알아본다.
그동안 내가 꾸보 하우스에 드나드는 것을 알고 있고,
벌써부터 특별히 부탁도 했기 때문이다.
조안이 대기석에 앉아 있을 때, 다시 한 번 간호사와 조무사들 들으라고
이 임신부가 나의 ‘프렌드’라고 강조하여 소개하다.
이곳에서는 ‘프렌드’라는 개념이 한국과 다르게 사용된다.
연령에 상관없이 서로 친밀하게 지내는 사이이면 프렌드가 될 수 있다.
초등학교 다니는 학생도 할아버지와 프렌드가 될 수 있다.
친한 사이는 누구나 프렌드라고 소개한다.
내 소개가 끝나자,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간호조무사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루카노와 깐까나의 방언으로 무어라고 중얼중얼 댄다.
의지할 데 없는 가난뱅이 임신부를
자기 친구라고 말하는 게 가당찮은 가보다.

드높은 베상파스 산이 곧 석양을 가릴 조짐이 보인다.
비포장 길, 마스크를 하고 먼지 날리는 지프니를 피하며
다시 꾸보 하우스를 방문하다.
오늘은 어제 진 빚을 갚으러 가는 날이다.
시누이 사이가 되는 에밀리와 조안네 가족들이 모내기를 마치고부터는
별로 할 일이 없어 꼬치 장사 하는 에밀리 옆 마른 논두렁에
죽 걸터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찾아오는 손님은 별로 없는데 기다리는 주인은 한 패나 된다.
어쩌다 한 아이가 와서 2페소 내고 꼬치하나를 사면
논두렁에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던 에밀리 가족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다가간다.
돈 낼 때서부터 아이가 꼬치를 들고 먹을 때 까지 모든 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아이에게 쥐어진 꼬치를 따라 이동한다. 마치 누가 지시나 하는 것처럼.
에밀리네 아이들이 먹고 싶지만 파는 것이라 먹을 수 없어
모두들 아이가 먹는 것만 바라보고 있다.

논두렁에 앉아 있는 모든 가족들에게
어제처럼 꼬챙이에 베지터블 볼을 하나씩 찍어 돌리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왕아버지도 슬그머니 옆에 와 선다.
그를 포함하여 모두 열 네 사람에게 꼬치를 하나씩 지켜주고 나도 하나들고
서로 처다 보고 씽끗 웃으며 먹다.
많이도 아니고 딱 하나만 먹으니 맛이 꿀맛 같다.
어제 받아먹지 않던 에밀리의 둘째 딸도 오늘은 눈치를 보며 받아먹는다.
에밀리 보고 계산하라고 했더니 계산을 잘 못하여 44페소라 말하다.
41페소가 맞는다고 하였더니,
그녀가 한 참 다시 셈을 하더니 어제 외상과 합하여
내가 말한 대로 41페소가 맞는다고!
준비해간 잔돈으로 어제 진 빚까지 합하여 정확히 41페소를 주다.
그냥도 줄 수도 있고 더 줄 수도 있지만,
작고 사소한 일이지만, 올바른 상거래를 가르치기 위하여
교육적인 입장에서 정확하게 계산하여 주다.
계산을 좀 냉정하게 한 생각도 들지만,
나에게 올 때마다 여러 가지 덤으로 주는 것도 있고
그리고 내가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가져다주는 게 있으므로
이들이 그렇게 서운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마을 어린아이가 동생을 데리고 꼬치 사러 온 것을 바라보는 꾸보의 가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