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눔, 동행 그리고 기다림.

나눔
(2014년 1월 12일 주일)

한국에서 선물용 중고의류가 도착한 후부터
나눔의 사역이 풍성해 졌다.
방문할 때 마다, 밤에 잘 때 너무 춥다고 말한
18세 임신부 조안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 주일 예배 후에 옷을 한 아름 싸들고 가져다주다.

경찰서장에게 부탁하여 경찰순찰차를 타고 함께 가다.
경찰서는 바로 내 숙소 앞에 있어 경찰관들과 늘 만나기 때문에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는 사이다.
꾸보의 사람들이 멀리 경찰차가 오는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났기에 백차가 이동하나 하고 의아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다.
백차가 자기네 꾸보 들어가는 논길 옆에 서니
가족 모두들 이일 저일 하던 일을 멈추고
뭐 잘못된 일이 있나하여 궁금한 듯 우리 일행을 쳐다본다.

서장과 내가 나란히 큰 짐 보따리를 들고 논길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뭘 주려고 가져오는 줄 알고 안심들 하는 눈치다.
트라이씨클을 타고 가지 않고 경찰차를 구태여 타고 간 이유는
치안담당인 경찰관들도 자기들을 특별히 관심 가져 주며
결코 당신들이 사회로부터 무시당하거나 소외당하는 집단이 아니고
정당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에밀리가 세탁하러 왔다 갈 때마다 조금씩 옷을 싸 보냈지만
오늘은 가족 전체에게 주는 것이므로 왕어머니를 불렀다.
털실로 짠 스웨터와 두꺼운 재킷은 특별히 임신한 며느리에게 주라 부탁하고
나머지는 모두 당신이 알아서 분배하라고 하다.

왕어머니가 경찰서장에게 무언가 한참 이야길 한다.
나중에 통역을 듣고 보니 그동안 내가 자주 방문했던 이야기를 하였고
오늘 옷을 가져다주어서 너무 행복하고 기쁘다고!

젖먹이 어린아이부터 왕아버지에 이르기까지 30명이 함께 살고 있으니
무슨 옷이든 가져다주면 다 필요하고 유용하게 입을 수 있다.
한국에서 비싼 택배비를 부담하여 붙여주신 목사님과 성도님들의
지극정성으로 이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기독교 해외선교사역의 입장에서 보면,
요즈음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의 어려운 사람들을 품는
고마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
전 세계 약 170여 국가에 파송된 한국선교사들은
이 막중한 세상 돌봄(world care) 사역의 중간에 서서
열심히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
서구인들의 선교사역도 그렇게 이루어져 왔다.
배고픈 자에게 빵이 먼저 필요하고
아픈 이들에게 치료가 먼저 필요하다.
예수께서도 배고픈 이들과 아픈 이들을 돌보시며 사역하셨다(막8:1-10).
우리 국가와 국민이 잘 살게 되고
그리고 한국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계를 품을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복 받은 백성이요, 자랑스러운 성도들이다.
이분들의 심부름꾼이 된 것을 매우 기쁘고 행복하게 생각한다.

동행
(2014년 1월 13일 월요일)

오늘은 아예 꾸보네 하우스에서부터 그들의 일터까지 함께 따라가 보다.
오전 6시 50분 쯤 꾸보 하우스에 도착하니, 가족들은 이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 나갈 차비를 다 차리고 있다.
7시를 알리는 싸이렌 소리가 멀리 시청으로부터 크게 울려 퍼지고
동시에 그들도 일터로 출발하다.
찬란하게 떠오르는 눈부신 해를 마주보며
꾸보 앞 개울을 지나 컨셉션 바랑가이 언덕을 지나고
샛길로 접어들어 산길을 내려가 알룰링가는 대로를 만나 계속 걸어가다.
30년 동안이나 걸려 힘들게 세운,
이곳 사람들이 가장 자랑하고 싶어 하는 알룰링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돌아 알룰링 바랑가이 쪽으로 계속 걸어가다.
약 4키로 정도 걸었을까?
꾸보 가족 일행은 알룰링 마을 입구 들어가는 길 오른쪽 사행천 강변에
넓게 자리 잡은 논으로 내려가
농막에 짐을 풀자마자 쉴 틈도 없이 모내기를 시작하다.

약도 치지 않고 농사를 짓는가!
모를 심으려고 물을 대고 일구어 놓은 논에는 수많은 굵은 우렁이 들이
평온하고 고요한 아침을 맞이하여 둘씩 셋씩 짝을 짓고 사랑놀이를 한다.
꾸보 가족들이 키스를 하는 중이라고 소개하다.
우렁이들을 보니 갑자기 이른 아침부터 우렁이 된장 쌈밥이 생각난다.
된장에 우렁이만 몇 마리 들어가도 된장찌개 맛이 그렇게 맛있고
우렁이 씹히는 맛도 기분 좋지 않았던가!
이국 만리타향에 와서 우렁이 된장찌개를 먹을 것을 생각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간다.

하나님의 피조물을 돌본다는 선교사라는 사람이
이른 아침 논에서 평화롭게 노는 우렁이를 보고 식욕이 발동하다니!
오! 주여 내가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인간이 깨끗한 척 하고 거룩한 척 해도
살아 생동하는 동물을 잡아먹고, 예쁘게 자라는 식물을 싹둑 잘라
요리하여 먹고 사는 한 거룩하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이 세상에 거룩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시다.

어쨌건 마침 한국에서 도착한 된장도 있겠다.
우렁이를 삶아 된장에 묻혀 쌈도 싸 먹고 된장찌개도 끊여 먹으면
그동안 입에 맞지 않는 필리핀 음식 먹느라 고생하였는데 얼마나 맛있겠는가!
그러면 그동안 떨어진 체력도 보강할 수 있지 않을까.
쌍쌍이 붙어 있는 우렁이는 피하여 혼 자 있는 놈만 잡다.
논에서 일하던 꾸보네 아이들이 내가 우렁이 잡는 모습을 보고
일하다 말고 논 한 가운데서 굵은 우렁이를 한 움큼씩 잡아다 준다.
금세 비닐봉지로 하나가 되었다.

일꾼들이 일하다 식사 할 수 있도록 논 한 가운데
여기 저기 지어 놓은 농막 안에는 작은 화덕을 만들어 놓아
그곳에서 점심을 해 먹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농막 옆에는 한 그루의 파파야 나무가 튼실하고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파파야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어서 좀 따 잡수시오하고 서있다.
논 관리인에게 파파야 두 개를 50페소에 사서
물에 잘 씻어 껍질을 깎아 내고 속을 인원수대로 나누어
열심히 모내기 하는 꾸보 가족들에게 메리안다(새이)로 하나씩 가져다주다.
모두들 함박웃음을 지으며 일하다 잠시 허리를 펴고 즐겁게 먹다.
오늘은 이렇게 멋모르고 따라 왔다가 파파야만 서비스하였지만
내일은 더 좋은 것으로 봉사해야겠다.
어느 듯 아침 출근 시간이 지나가고 있어
알룰링 언덕을 지나가는 트라이씨클을 부리나케 잡아타고 귀가하다.

우렁이 무침
(2014년 1월 14일 화요일)

어제 밤에 논에서 일하는 꾸보 가족들을 위하여 특별 음식을 만들었다.
잡아온 우렁이를 삶아 된장과 고추장 참기름 등
갖은양념을 다하여 정성스레 우렁이무침을 만들었다.
시식해 본 결과 그만하면 한국의 시중에서 파는
우렁이 된장찌개에 못지않은 맛있는 요리가 되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우렁이 무침을 싸고
감자와 고구마를 삶아 상이(sangi,바랑)에 넣고
어제 모내기 하던 논을 향하여 서둘러 꾸보 가족을 만나러 가다.

약 30분은 열심히 걸어 알룰링 강가의 논에 도착하니
있어야 할 꾸보네 가족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서 모르는 사람들만 새 논을 갈아 업고 있다.
날마다 애쓰는 그들에게 어제 잡은 우렁이 무침으로
맛있는 새참을 먹도록 하려했더니 ----.
어제 에밀리에게 물어 봤을 때
분명히 오늘 이 곳에 일하러 다시 온다고 하였는데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오늘은 다른 논으로 일하러 간 걸까?
허는 수 없이 모를 심으려고 갈아엎어 놓은
아무도 없는 빈 논에 들어가 우렁이나 잡아오다.
삶아서 일부는 냉동실에 넣어 두고
된장찌개 끓일 때 마다 조금씩 넣어야겠다.

기다림
(2014년 1월 15일 수요일)

어제 논에까지 갔다가 만나지 못하여
오늘은 동이 트기 전 일찍 알룰링 다리에 나가 기다리다.
7시 30분이 지나도 꾸보네 가족이 일터에 나오지 않는다.

오후 일과를 마치고
해지기 전에 서둘러 꾸보 하우스를 방문하여 물어보니
어제와 오늘은 일터에 나가지 않았다고!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이틀 동안 새벽에 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음식으로 그들을 대접할 일은 내가 할일이 아닌가보다.

에밀리의 남편이 먼저 번 아이들 입히라고 보낸 겨울 잠바를 걸치고 있다.
요즈음 또 몸이 좋지 않아 추위를 느끼는가 보다.
내일 치료해 준다고 보건소로 오라하고 임신부 조안의 꾸보에 들리다.
꾸보 방바닥의 대나무 틈사이로 샛바람이 차갑게 들어온다.
벽에 구멍 난 것도 여전히 막지 못하여 그냥 뚫려 있다.
아무래도 내일 장날 장판을 사고 비닐을 사서
바람을 막아 주어야 될 것 같아 남편을 읍내에 나오라하다.

이왕 고쳐주는 김에 꾸보 벽을 새 밤부로 교체해 주어야겠다.
조안이 바닥은 헌 종이박스를 깔면 되니 좀 구해달라고 하다.
시청 청소과 직원들에게 알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