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일들
  (2014년 1월 1일. 새해 첫 날)

미련 없이 2013년의 마지막 석양은
베상파스 산을 넘어 어제 밤 서해안으로 사라지고,
세르반테스 분지에는 다시
마운트프로빈스 따전의 산 위로
새 해의 태양이 떠오르다.

생성은 소멸을 가져오고, 소멸된 것은 또 다른 모습으로 생성되다.
산다는 것은 매일 매일 죽어가는 것이고
죽는 것은 또 다른 모습으로의 시작을 의미하다.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교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영원을 바라보며 겸손하고 온유하게 영원을 준비하자.

새 해 첫 날 아침, 꾸보 하우스 조깅으로 새 날을 시작하다.
어제 심하게 모 심느라 피곤해서인가?
모두들 오늘은 일 나갈 생각을 않고 가축들의 먹이나 주고
아이들은 추워 논바닥에 짚으로 불을 피우며 쬐고 있다.
오늘은 왜 일을 안가느냐고 임신부에게 물으니
오늘은 1월 1일이라 안 간다고.

그래, 내가 착각을 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새 해 첫날이 시작되는 날은 쉬어야지.
가난해도 먹을 건 먹고, 쉬는 날은 쉬고, 노는 날은 놀아야 된다.
일박 이일 코스로 인생을 사는 게 아니니 느긋하게 열심히 살아야지.
18세 임신부 남편이 어제 멋지게 타고 일터에 가던 말이
추수를 마치고 다음 경작을 위하여 쉬고 있는 논바닥에서
새벽부터 열심히 풀을 뜯으며 휴일을 즐기고 있다.
이 집의 짐승들은 우리가 없다.
돼지도 말도 그냥 목에 줄만 매어 묶어 놓고 밤이건, 뜨거운 태양빛 아래건,
비가 쏟아지는 우기 철에도 그냥 밖에서 야생동물처럼 기른다.
하긴 이들이 사는 집도 일반 가축우리만도 못한데
가축들을 위해 축사를 짓는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말은 밤이 되어도 앉거나 눕지도 않고 서서 잠을 잔다.
밤에 소나기가 몹시 쏟아져도 처절하게 서서 비를 다 맞는다.
말은 이들에게 참으로 유용한 동물이다.
우리도 필요 없고 먹이도 지가 알아서 들판에서 해결하고
등에 올라타면 항상 어디든 빠르게 뛰어가고,
오토바이나 자전거가 갈 수 없는 산길이나 논두렁도 갈 수 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말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의문이 갔었는데
이웃 아저씨네 말을 빌려 타는 것이었다.

나무 조각을 주워 말의 등과 몸 전체를 이리저리 긁어 주다.
시원하고 기분 좋은 듯 가만히 서 있다.
처음엔 나를 보면 피하더니 이제 낫이 좀 익었나보다.
몸을 긁어 주니 좋아서 내 손에 입을 맞추려 한다.
숙소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올해가 말의 해다.
아무 생각도 없이 한 행동인데,
말의 해 첫날 말을 기분 좋게 해 준 결과가 되었다.
올해는 더 좋은 일들이 있을라나!

에밀리에게 내일 아침 논에 갈 때 또 보자며
슬쩍 어제 일하고 얼마나 받았느냐 물어보다.
1인당 320씩 받았단다.
이 곳 농부 일당이 150 페소인 것으로 볼 때
두 배가 넘는 매우 만족스러운 수입이다.
이 가정은 아마 일당으로 일을 하지 않고 도급으로 맡아
전 가족이 매달려 일을 하는 바람에 많이 받는가보다.
이들 대가족은 논농사의 전문 용역인 들이 다 되었다.
그러나 남보다 많이 받아도 왕아버지가 아직 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남의 논에 무허가 꾸보를 지어 임시로 살고 있는 걸로 보아
열세명의 자녀를 기르느라고 돈 모을 여지가 없었나보다.
아니면 그런데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지.

일터로 향하는 18세 임신부의 남편

2013년 1월 2일 목요일

꾸보의 가족들이 정월 초하루인 어제는 하루 쉬고 오늘 다시 일터로 향하다.
그들이 올라오는 바랑가이 컨셉션 삼거리에 나가 기다리니
에밀리의 큰아들이 지난번처럼 먼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그 녀석 역시 매일 만날 때마다 친절하게 대해주고 옷도 선물하고
먹을 것을 사 주어도 열일곱 살이나 된 녀석이 인사 할 줄을 모른다.
부전자전인 모양이다.
아들이 지나가고 정확히 7시 35분이 되니
꾸보 가족 일행이 멀리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을 따라 약 30분 걸어 알룰링 다리를 건너 논으로 가다.
왕아버지와 어머니는 자녀들과 달리 이제 아는 체를 한다.
아는 체 하는 게 반가워 악수를 하며
가족들에게 주려고 준비해간 사탕을 나누어 주니
모두 하나씩 입에 물고 신나게 일터를 향해 걸어가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사탕이나 과자를 사먹기 힘든 형편이라
사탕 하나도 그들에겐 귀하다.

큰 딸 에밀리는 나의 빨래를 해 준 적이 있어 그런지 그래도 비교적 아는 체를 한다.
부모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하루 종일 땡볕에서 일하는 아이는 얼마나 받을까?
열심히 앞서 걸어가는 에밀리에게 다가가 열두 살 꼬마 아들은 먼저 번
얼마나 받았느냐 물으니 그 아이도 어른과 똑 같이 320페소를 받았단다.
어린아이 치곤 상상도 못할 놀라운 품삯이다.
그 아이는 어려도 손이 빨라 어른과 동일한 금액을 받는다고.
그리고 오늘 알았는데 그 아이가 아들이 아니고 동생이란다.
자기 아들보다 어린 동생이 둘이나 더 있다고!
열여섯 살 되는 딸도 어른과 똑 같은 금액을 받았다.
이 집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강하게 자라 어른과 다름없이 일을 잘한다.

아침 일터로 향하는 꾸보 가족들, 앞서 가는 이들도 모두 한 가족이다.

2014년 1월 3일 금요일

오전 7시가 되자 꾸보의 가족들은 여느 때처럼
집단을 이루어 서둘러 논으로 품 팔러 가다.
오늘은 일터에 따라가지 않고 집에 남아 있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주다.
에밀리의 5남매 중 위 셋은 모두 부모 따라 일터에 가고
아홉 살 먹은 딸이 두 살 먹은 어린 아이를 움막에서 돌본다.
두 살 먹은 어린아이가 마당에 선체 엄마에게 양쪽 젖을 급하게 얻어먹은 후,
곧 엄마에게서 떨어져도 늘 그렇게 습관이 되어서인지 울지도 않는다.

부모와 가족들이 모두 일터에 나간 후,
두 살짜리 아이가 특별히 놀만한 장난감이 없어 여자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어른들이 사용하는 낫을 들고 나무 쪼개는 시늉을 하며 논다.
왼손에 어른 새끼손가락만한 굵기의 가는 나무를 땅에 받쳐 쥐고,
오른손엔 낫을 들고 쪼개려고 한 참 헛 질을 하더니
결국 조그만 나무 가지를 반으로 쪼갠다.
이들은 이렇게 어릴 때부터 스스로 생존력을 기르며 자란다.
몇 년 후면 이 아이도 모내기철에 부모를 따라가 적당한 품을 팔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면 짝을 하나 데리고 와 열여덟 살 전부터
아기를 낳기 시작하여 주렁주렁 자녀를 데리고 다닐 것이다.
그 때 되면 왕아버지는 지금 있는 30명의 자녀와 손자녀들에게서
약 100여명의 손자와 증손자녀를 두고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것이다.
개중에는 왕권에 반항하여 독립을 요구하는 자손들도 생겨날 것이고
차차 남과 북 다른 골짜기에 꾸보를 짓고 살게 될 것이다.

갑자기 스피커를 통하여 요란한 음악이 울려 퍼진다.
왕아버지네 꾸보에 남아 있는 아이들이 음악을 틀어 놓았다.
두 살짜리 아기가 음악이 울려 퍼지자
나무를 쪼개다 말고 덩실 덩실 춤을 춘다.
할아버지인 왕 아버지도 이제 겨우 50대 중반으로
늦게 나은 아이가 큰 딸네 아이들 하고 같이 크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와 형제들이 모두 일터에 가고
움막에 어린이들만 남아 있어도 외로워하지 않고 잘 지낸다.

두 살짜리 여자 아이가 낫으로 나무를 쪼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