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원시가족공동체 
   (2013년 12월 31일 화요일)

한해를 마무리하는 2013년 마지막 날이다.
몇 시간 후면 서쪽을 높게 가로막은 베상파스 산에 석양이지고
검은 하늘엔 별이 총총 뜨겠지.
그리고 2013년은 서서히 영원한 별들의 추억으로 사라지겠지.
그러면 나 순례자는 까만 하늘에 펼쳐진 은하수를 바라보며
홀로 고향의 가족과 형제들을 생각하다 잠이 들겠지.

가난하지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는 국민, 축제의 나라, 필리핀!
세르반테스 읍내는 성탄절이 지난 지 일주일이 다 되었건만
여전히 집집마다 온 가족들이 모여 파티를 열며 연휴를 즐긴다.
시장도 북적북적 대고 집집마다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 소리와
고기 굽는 냄새가 연휴의 흥취를 더욱 고조시킨다.

그러나 즐거운 연휴와 상관없이
꾸보의 가족들은 오늘도 일터에 나간다.
나도 그들과 함께 일터에 가기로 약속하였다.
정확히 아침 7시 35분이 되니,
내가 기다리는 컨셉션 바랑가이 길목으로 가족들이 올라오고 있다.
평소에 약속을 잘 안 지키는 사람들이라 의문이 갔지만
오늘은 어김없이 약속을 잘 지키다.
어린 아이서부터 큰 딸 부부와 왕아버지 부부까지 모두 출동하였다.
전문성을 갖추지 못하고, 가난하기까지 하면 연휴도 없고
시도 때도 없이 바쁘나, 생기는 것은 별로 없다.
거기다 게으르기까지 하면 누구나 곧 거지가 된다.
꾸보의 가족들은 비교적 부지런하기 때문에
거지가 될 확률은 거의 없다.
온 가족이 힘을 합쳐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은
곧 가난을 면하게 될 것 같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일을 맡기가 힘들던지
아니면 일찍 가야 한 푼이라도 더 벌든지
어찌되었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약속을 잘 지키는 모양이다.
18세 임신부는 보이지 않는다.
산달이 가깝고 몸이 무거워 빼 주었나보다.
다행이다. 어제 아침 만났을 때, 한껏 걱정스런 말로
“아침 7시에 가서 저녁 5시까지
꼬박 10시간을 땡볕에서 일해야 해요”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내 맘이 편치 않았었다.

항상 사람을 만나도 덤덤하게 반가워 할 줄도 모르고
인사도 할 줄 모르는 꾸보 가족 일행을 뒤쪽아
이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 본다.

이들이 어제는 뚜롯 씨초우(마을) 크리스마스 축제에
참여 하느라 일터에 가지 않았다.
아무리 먹고 살기가 바빠도 마을 축제엔 빠질 수 없다.
나까지 초청하여서 그들의 축제에서 정말 신나게 웃고 즐거웠다.
읍내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들의 마을 축제가
지금까지 이곳에 와서 참여한 축제 중에서 가장 재미났다.

어디가나 빠지지 않는 ‘강남스타일’과
‘젠틀맨’ 댄스가 무대의 흥을 돋운다.
유치원생들과 그리고 이어서 초등학생들이 나와서
‘젠틀맨’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너무 귀엽게 잘 춘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시의원들에게
이 곡이 한국 노래라고 알려주니 그러냐며 놀랍다는 표정이다.
우리 한국의 음악이, 특히 ‘강남스타일’과 ‘젠틀맨’은
이곳 어느 축제에 가도 빠지지 않는 고정 메뉴다.
필리핀 사람들도 오기 힘든 이 먼 산속까지
한국의 유행가가 울려 퍼지다니 감개무량하고 자랑스럽다.

내 조국 한국은 이제 보통나라가 아니다.
문화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세계 여기저기에서
범상치 않은 조짐들이 보인다.
신은 아마 우리 민족을 통하여
다가오는 세상을 관리하길 원하시는지도 모르겠다.
농경시대, 산업시대와 달리 디지털 정보화 시대에서는
영토의 규모가 작은 나라일지라도 실력만 갖추면
얼마든지 안방에서도 세상을 컨트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유일한 비운의 분단국가이며
작은 나라 중의 하나인 우리나라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나온 것 하며
우리 젊은이들이 문화와 스포츠로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이름을 떨치는 것 하며
2013년 12월 현재,
세계 170여 국가에 2만 5천여 명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복음과 함께 한국을 브랜드화 시키는 것 하며
또한 외국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이 깊은 산속 오지에
나 같이 부족한 사람도 이미 파송되어
이 지역 주민을 섬기는 것을 보면
다가오는 미래에 격상될
한국과 한국인의 위상을 가늠하게 된다.

바랑가이 의원들과 직원들이 주관하여 축제준비를 철저하게 하였다.
열 가지도 넘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주민들에게 즐거움을 더한다.
뚜롯 시초우 여자들의 게임이 시작되다.
남자들을 둥그렇게 세워 놓고
가랑이 사이에 튼실한 식용 가지를 하나씩 끼워 놓고 하는 놀이로
마치 불쑥 튀어나온 남자의 성기를 움켜잡는 듯 한 게임이다.
가랑이 사이에 가지를 끼고
그냥 서 있는 모습만 보아도 웃음이 절로 난다.
여자들이 음악에 맞추어 남자들 주변을
한 방향으로 빙빙 돌다가 음악이 멈추면
재빠르게 남자들의 가랑이 사이에 꽂아 놓은 가지를 잡으려 달려든다.
그럴 때 마다 모두들 배꼽이 빠지도록 웃는 현상이 벌어진다.
미처 가지를 잡지 못한 사람은 매 번 할 때마다 한 사람씩 탈락되고,
맨 마지막 까지 남은 한 사람이 승자가 된다.

남자들이 하는 놀이도 재미있다.
남자들이 여자 옷을 입고하는 이어달리기 게임이다.
준비된 여자 브래지어와 치마를 남자들이 입고
왕복 릴레이 하는 게임인데 체구가 작은 여자 옷을 억지로 입느라고
엉뚱하게 입어 배꼽을 자아내는 현상을 연출한다.
약간 성적 자극을 유발하는 이런 게임들은
지루한 일상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놀이를 통하여
정신심리학적 치유효과를 염두에 둔 재미난 게임이라 생각된다.
이런 게임은 아마 약 350년간 이 지역을 식민 지배한
스페인 사람들에 의하여 전승된 것 같다.

꾸보의 가족들이
어제는 그렇게 즐거운 마을 축제에 참여하며 하루를 쉬고
오늘은 다시 온 가족이 일터로 향하다.
큰 딸이 자기 이름이 ‘에밀리’라고 알려 주다.
에밀리는 친정 부모님의 꾸보 옆에 움막을 지어놓고
한 평 좀 못되는 작은 움막에서 남편과 자녀 셋을 데리고 산다.
이유를 물어 보니 이곳은 개울이 있어 빨래하기도 좋고
답답하지 않아 여기서 산다고.
에밀리의 열두 살 먹은, 남자로 둘째 되는 아이가
이른 아침부터 배낭을 짊어지고 잘도 걷는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학교 갈 나이 이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두고
부모와 조부모를 따라 날마다 일터에 나간다.
철모르는 아이가 학교 안 가고 부모 따라 함께 가는 게 더 좋다며
먼 거리를 오르락내리락 걸어가도 힘도 안 드는지
걷는 모습이 신이 났다.

모두들 나와 함께 일터에 가는 게 매우 행복하단다.
자가용 타고 시장님이나 의사하고만 다니는 분인 줄 알았더니
자기들과도 함께 일터에도 간다고 왕 어머니가 매우 고마워하다.
왕 어머니는 딸 에밀리보다 영어를 잘한다.

지름길로 가느라고 읍내 시내로 들어서지 않고 산길로 내려가니
소요시간이 약 10분 정도 단축되다.
다시 나타난 대 도로에서
알룰링 다리를 향하여 모두들 바쁘게 걷다.
꾸보 하우스에서 알룰링 다리 까지는
도보로 약 40분 걸리는 거리다.
알룰링 다리에 오니 임신부의 남편이 말을 타고 벌써 와 있다.
조금 전 자전거를 타고 내 앞을 지나간
에밀리의 큰 아들도 먼저 와 있다.
그도 초등학교 3년까지 다니다 중퇴를 하고
부모와 함께 일터에 따라다닌다.
왕아버지가 다리를 건너 논 옆 집결지에 들려
뭔가 흥정하는 것 같다.
왕아버지 옆에 있던 가족 중 한 명이
“완쓰리” 라고 옆 사람에게 전하여준다.
아마 우리 식으로 계산하면 한 마지기 모 심는데
그 정도 품삯을 준다는 말인 것 같다.
흥정이 끝났나보다.
가족 일행이 모를 심기 위해 논을 찾아 간다.
타고 온 말은 논 옆 조그만 풀밭에 매어 놓고,
자전거도 그 옆에 받쳐놓고 모두가 논으로 들어간다.
나도 논 뚝 길을 따라 걸어 그들을 따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