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랑을 알기나 하는 건지
    2013년 12월 28일 토요일

아직 안개도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
아홉 살 어린 여자 아이가 혼자 냇가에서 빨래를 한다.
때 묻은 옷을 물에 넣어 두세 번 흔든 다음
방망이로 두세 번 두들기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물에 넣었다 대충 짜서 강바닥에 가지런히 넌다.

큰 딸네 움막 가까이 가니, 무표정 남편이 반웃음 무표정으로 맞이하고
부인과 아이들은 쭈그리고 앉아 손으로 밥을 집어먹고 있다.
아이들도 예의범절에 관하여 배운 적도 없고 더더구나 영어를 할 줄 모르니
매일 만나는 외국인 어른을 만나도 인사할 줄도 반길 줄도 모른다.
큰 딸은 언제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내가 묻기 전에는 왜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지 말도 안한다.
어제 왜 빨래하러 못 왔느냐 물으니 그제야
바쁜 일이 있어 못 왔단다.
남과 약속을 하고 나서도 자기 바쁜 일이 있으면
약속 같은 것 잊어 먹기는 식은 죽 먹기다.
왜 약속을 지키지 못했느냐고 따질 필요도 없다.
그런 거 따지려면 이들과 만날 생각도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않고
자기에게만 특별히 빨래를 맡기는 것을 알기나 할까?
그리고 오라는 날 오지 않아 밀린 빨래를 쌓아두고
매번 올 때만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기나 할까?

큰딸이 오늘도 바빠서 빨래하러 못 온단다.
내가 빨래 때문에 고생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18세 임신부가 이른 아침 찾아 온 자기 친구를 소개한다.
친구래야 시집와서 사귄 남편의 사촌 여동생이다.
물론 학교를 다녀 본 적도 없어 말이 잘 안통하고,
세수도 안한 지저분한 얼굴에 꼬질꼬질한 더러운 옷을 걸치고
세면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감지 않아 냄새나는 머리를 삼발로 늘어뜨리고
앞 이빨까지 서너 개 빠진 남루한 모습이 영락없는 거지이다.
꿈에 나타날까봐 겁날 정도로 이상하게 생긴 여자가
원치도 않았는데 내 빨래를 해주겠다고 선뜻 나선다.
그것도 지금 당장 따라가서 해 주겠단다.
엉겁결에 그녀가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다.
이런 무직자에게 일거리를 주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잠시 집에 다녀온다고 기다리라더니
조그만 아이를 하나 되리고 온다.
누구냐 물으니, ‘걸’이란 말을 할 줄 몰라
치마를 입힌 긴 머리 아이를 ‘마이 썬’ 이란다.
이런 인물님을 믿고 어떻게 세탁물을 맡겨야 할지 의문이다.
몇 살이나 먹었기에 자식을 두었나 했더니
스무 살이고 보이 하나 걸 하나 두었단다.
요번엔 분명히 보이와 걸을 확실하게 말한다.
지금 데리고 가는 아이가 보이인지 걸인지 혼란스럽다.
거시기를 한번 만져보고 확인하고 싶지만,
쓸데없는 일 같아 그만두다.

걸인지 보이인지 하여간 썬 이라고 부르는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지에미가 세면실에서 빨래를 하는 사이
씻지도 않은 새카만 더러운 발로
내 숙소 바닥의 하얀 타일을 마구 뛰며
온통 지저분하게 시커먼 발도장을 찍고 다닌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이들과 함께
더불어 살려고 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책임감이 없어 아침저녁으로 부르러 다녀야 하고!
세재를 너무 많이 써서 옷이 하얗게 바래기도 한다.
빨래를 제대로 헹구지 않아, 말려도 지독한 세재 냄새가 난다.
그냥 보건소 측에 부탁하여 동네 깔끔한 나이든 아주머니를
파출부로 구하면 모든 게 만사 오케인데!

남을 돕는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도움을 받는 것 이상으로, 참고 견뎌내야 할 일이 많다.
그냥 내 일이고 삶이다 생각하고 지내야 할 때가 많다.
이런 이들과 늘 함께 하셨던 주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사랑’은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참 어렵다는 점을
선교의 현장에서 자주 느낀다.
특히 보건소에 거주하다시피 하는 열한 살 거지아이를
대할 때 마다 많은 갈등을 겪는다.
씻지도 않고 다니는 더러운 거지 아이가
어느 날은 내가 음식점에 있는 걸 알고 찾아와
혼자 앉아 식사하는 앞자리에 성큼 와 앉아 더러운 손으로
덥석 내 반찬을 집을 때도 있다.
그러면 식사하러 온 많은 손님들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참으로 처신하기 어려운 순간이다.

내가 묵는 하프웨이홈에는 가끔 타 지역 공무원들이
출장 왔다가 자고 가는 적이 있다.

많을 땐 열명도 와서 며칠씩 묵어가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거지 아이가 횡재하는 날이다.
하루 종일 개똥 소똥 다 묻히고 다니고,
며칠 동안 빨아 입지도 않은
더러운 냄새나는 옷을 입은 녀석이
어느 새 내 숙소에 들어와
소파 중앙에 턱 버티고 앉아 주인 행세를 한다.
영문을 모르는 손님들은 내가 친히 데리고 있는 아이인줄 알고
그를 나무라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 두면
그 녀석은 손님들의 만찬에 참여하여 씻지도 않은 더러운 손으로
밥을 집어 먹다가, 그 손으로 여럿이 먹는 반찬을 집어 먹는다.
이곳은 손으로 밥을 집어먹는 사람들이 많아 별로 이상하게 느끼진 않지만
더러운 손을 공동음식에 대는 것은 질색이다.
누군가 야단을 치고 눈치를 주면 모르는 척하고 그냥 버틴다.

그럴 때 마다 손님들 앞에서 크게 야단도 치지 못하고 내 눈에선 불이 켜진다.
야단을 처도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아듣는다 해도 말을 들을 아이가 아니다.
그런 거지아이를 보건소에서 용납하는 것을 보면
보건소 직원들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요즈음은 그 아이를 보아도 아는 체도 안하고 눈도 맞추지 않는다.
그녀석도 나의 눈치를 보고 그냥 지나친다.
그럴 때 마다 그를 감싸지 못하는 내 속마음은 무척 아프다.

그가 어쩌면 예수의 모습으로 내 앞에 다가와서
나를 시험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향한 나의 굳은 마음은 풀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남의 눈에 들어나 보이는 선행을 하겠다고
여기저기 다니는 내 자신의 위선적인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 실망하기도 한다.
이게 나의 실존의 모습이다.

내 눈앞에 있는 불쌍한 거지아이도 잘 대해주지 못하면서
교회에선 성도들에게 매일 서로 사랑하라고
사랑타령을 하던 내가 과연 사랑을 알기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가페 사랑, 필리아 사랑, 에로스 사랑, 스토르게 사랑 ---
사랑을 근사하게 서술하며 설교하던 내가
진정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가 의문이다.
목회만 한다면 그래도 이해가 간다.
예수 사랑의 사도가 되겠다고 먼 외국까지 온
선교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위선적인 삶을 살면서
과연 하나님 앞에 서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