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의가 가버렸어. 아우 정광훈목사가 지난여름 소천했어...”
뉴욕 청암 세미나에서 만난 송무 정광호목사가 조문(弔文)을 읽듯 중얼거렸다.
“송무형님 그게 정말이오?”
“정말이야, 지난해인 2002년 6월 4일 송의는 간암으로 61세의 생을 마감했지...”

슬프고 억울했다. 친구를 잃었으니 슬펐고 천재를 잃었으니 억울했다. 61살을 살았으면 환갑을 넘겼으니 기본수명은 채운 셈이다. 한번은 죽는다. 그러나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죽으면 그건 너무 억울하다. 교통사고나 안전사고로 불의에 당한 죽음처럼 억울하다.

송의가 그랬다. 그는 천재였다. 그런데 그는 그의 천재성을 단 한번도 발휘해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목회로도 학문으로도 단 한번도 발휘해 보지 못했다. 대학총장이나 작가는 물론 미국교회감독도 할 수 있는 실력인데 그는 세상에 단 한 줄의 글도 단 한번의 이름도 남겨 놓지 못하고 그냥 가버렸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더 안타깝다.

오호! 통재라 송의가 가버렸구나.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송의의 이름을 알리고 싶다. 내가 송의를 알고 지낸 얼마 안되는 추억이라도 이야기하고 싶다.

1962년 감리교신학대학에 들어가 보니 전교 학생이 200명 정도였다. 그때는 일류신학교들이 모두 그랬다. 그런데 그 200명은 도둑촌 양산박에 모인 수허지의 주인공 108명 도둑들처럼 모두가 두령급 이었다. 경기고 서울고 출신은 물론 서울대학을 다니다 편입한 학생, 산전수전 다 겪고 들어온 아저씨학생하며 모두가 개성이 뚜렷하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런데 아침 등교시간이면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을 들어서는 쌍둥이 신학생이 있었다. 다 큰 신학생이 유치원생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다니다니? 저런 바보 좀 보게. 그러나 그들은 남들이 뭐라 든 상관없이 어깨동무를 했다. 나폴레옹이 파리 개선문을 통과하듯 그들은 어깨동무를 한채 보무당당하게 감신대의 아치형 교문을 들어서는 것 이였다. 그 안하무인의 주인공은 쌍둥이가 아니라 형제였다. 3학년 정송무(鄭松武) 1학년 정송의(鄭松義)형제였다. 그리고 바보가 아니라 천재였다. 형 송무는 배재중고 6년을 줄곳 수석으로 달려온 반장이었다. 동생 송의는 고교시절 영어회화를 자유롭게 하고 다닌 배재 총학생회장 출신의 스타였다. 친구들은 출세길을 찾아 서울대로 갔는데 송무형제는 아버지목사의 어명(?)을 받들어 신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신학교에 들어와 보니 유치원 수준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 형제는 유치원생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다녔다. 점령군처럼, 아니 하나님 나라를 향해 형제가 연합하여 데모라도 하듯 어깨동무를 하고 등교했다. 형보다 동생이 더 똑똑했다. 송의는 입학만 해놓은채 1년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입학하던 해인 62년에 돌아왔다. 그래서 나와 1학년 같은 반이 됐다.

송의는 외모부터가 달랐다. 서구형 미남이였다. 007의 주인공 숀코네리와 람보스타 실베스터 스텔론의 장점을 모자이크한 얼굴이였다. 키가 그렇게 컸고 얼굴의 윤곽 눈매 코가 닮았다. 면도를 해도 숨어 보이는 까칠한 수염이 그랬다. 송의는 반에서 언제나 안하무인 이었다. 반말을 썼고 마구잽이로 대했다. 여학생들에게 개구쟁이였다. 그런데 워낙 외모와 실력이 뛰어나 별로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자신을 국보라고 떠들어대는 기인(奏人) 양주동박사의 안하무인에 시청자들이 매력을 느끼듯.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과시간이 끝나자 송의가 덥석 내손을 잡는 것이었다.
“이형 나하고 같이 갑시다”
철수와 영희가 손을 잡고 눈길을 걸어가듯 송의는 내손을 잡고 감신(監神) 교문을 걸어나갔다.

(아하! 등교할때는 형 송무와 어깨동무로 왔지만 공부 끝나는 시간이 다르구나. 하교시간에는 바보처럼 만만해 보이는 내손을 잡고 교문을 나서려는 구나).
형 대신 대타로 끌려온 나는 이도령 앞에 방자처럼 기가 죽어버렸다. 그와는 비교가 안됐기 때문이다. 그는 감리교 인텔리목사의 아들인데 나는 아버지가 농사꾼인 흙의 아들이다. 그는 배재중고를 일등으로 달려온 수재인데 나는 동도공고야간부를 겨우 15개월 다닌 천학비재다. 그는 영화배우처럼 말쑥한 마스크에 영어마저 청산유수인데 나는 나무꾼 외모에 시골 사투리로 더듬거리는 촌뜨기이다. 그런데 송의는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는 거의 매일 내손을 잡아끌고 다녔다. 우리는 동키호테와 산초처럼 붙어 다녔다. 그는 천재기인 동키호테였고 나는 바보기인 산초인 셈이다.

감신 정문옆으로 호떡집이 있었다. 교도소 문을 나서면 죄수들이 꼭 두부를 사먹듯 감신교문을 나서면 우리는 꼭 호떡을 사먹었다. 5원을 내고 여섯개를 사서 세 개씩 나눠먹었다. 우리는 서대문을 지나 문화방송국을 기웃거리며 이화여고 정문 앞까지 걸어왔다. 거기서 리어카 군밤장수에게 5원을 주고 군밤 열개를 사서 나눠먹으면서 되도록 시간을 오래 끌려고 머뭇거렸다.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예쁜 이화여고 학생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년후에 감신을 떠나는 바람에 이화여고생들과 연이 끊겨버렸지만 송의는 4년 내내 이화여고교정 앞에서 군밤을 사 먹은 게 틀림없다. 후일 이화여고 이화여대 출신 마누라를 얻는데 성공했으니까.

군밤도 먹고 여고생도 보고 나면 우리는 덕수궁 돌담을 끼고 시청 앞까지 걸어가서 헤어졌다. 나는 시청 앞 덕수빌딩에 있는 루터란아워 사무실로 올라가 아르바이트를 했고 송의는 가정교사집을 찾아 뚝섬 가는 시내뻐스를 탔기 때문이다.

송의는 천재 기인 이였고 나는 바보 기인 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잘 어울렸던 것 같다. 동키호테와 산초가 잘 어울리듯 말이다. 내가 군대를 다녀온 후 나사렛에서 송의의 흉내(?)를 내는 동안 송의는 감신에서 엉뚱하게 학생회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회장된 사연이 송의 다웠다.

감신 학생회장 선거에 두명의 입후보자가 나서서 정견발표를 했다. 송의는 기호2번의 찬조연설자로 나섰는데 박수소리가 그만 송의의 연설에 몰려 버렸다. 투개표를 해보니 묘하게도 동점이 됐다. 2차 투표를 하려는데 누군가 소리쳤다.

“긴급 동의요. 아까 연설하는거 보니까 기호 2번의 찬조연설이 뛰어나던데 우리 재투표할 것 없이 기호 2번 찬조연설자를 학생회장으로 뽑읍시다”
“재청이요 삼청이요 옳소 옳소....와와 만장일치요”
“그러면 여러분의 만장일치로 정송의씨가 감리교 신학대학 학생회장으로 선출됐습니다. 땅땅땅”

역시 송의 답다. 감신을 졸업한후 목사가 되면서 송무형제는 이름을 바꿨다. 일본식 이였던 정송무 정송의를 한국식이름 정광호 정광훈으로 고친 것이다. 나는 먼저 이름이 아까워 송의 송무를 호로 부른다. 松武(송무) 松義(송의)-얼마나 멋진 호인가?

송의는 목사가 된후 기인처럼 살았다. 철학자나 작가가 보면 멋져 보였겠지만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보면 불행한 일이였다. 17년전 내가 미국 이민와서 보스톤에 있는 송의와 통화 한적이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취생몽사 알쏭달쏭(?)했다.
(역시 기인으로 살고 있구나!)

대학교에서 교목생활을 하다가 영어의 나라 미국으로 온 송의의 영어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신바람이 났다. 미국 컴퓨터 회사를 다니고 미국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역시 기인답게 살다가 기인답게 간 것이다. 송무형이 전해준 말.

“내동생 송의는 죽는것도 동생 다웠어. 6개월전에 간암말기가 발견됐는데도 태연자약 명랑하게 지냈고 마지막 임종도 영생의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어린애들처럼 장난스럽고 순진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거야. 기인처럼 살다가 초인처럼 죽었기에, 송의는 삶과 죽음을 떠나 지금도 내 곁에 있는 것만 같아”

송의는 죽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준 우정은 죽지 않을 것이다. 기인으로 살다간 송의가 그리울 때면 나도 송의처럼 기행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큰말이 나가면 작은말이 대신하듯, 동키호테가 죽으면 산초가 동키호테역을 대신 해야 하듯 말이다. 송무형이 이런 말을 전해줬다.

“전에 송의가 이런말을 한적이 있었어. 형님 이계선목사는 기인 같아요. 촌스럽고 바보스러운 것 같은데 도시의 신사들을 감동시키는 매력이 있거든요”
그 말이 송의가 나에게 남겨준 유언처럼 들려온다.

(이글은 2003년에 쓴 칼럼이다. 송의의 배재단짝 정촌 서황석이 이글을 읽고 “송의 대신” 친구가 돼줬다. 정촌의 우정을 받을 때마다 생각나는 송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