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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랄랄라’ 하다보면 방언이 터진다고?은사와 영적 열등감
강만원  |  mw144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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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년 01월 22일 (수) 21:12:18
최종편집 : 2016년 12월 08일 (목) 01:58:05 [조회수 : 9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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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열등감!?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물론, 우리는 너나없이 하나님 앞에서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다. 상대적으로 좀더 배우고 좀더 실력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만약에 신앙의 성장과 성숙에 인간의 알량한 지식과 능력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사역자를 선택하시면서 처음부터 유식하고 유능한 자를 골랐을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남달리 유식해서 선택받은 자도 없거니와, 특별히 탁월한 영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선택받은 자도 없다. 하나님이 ‘종’을 선택하는 기준은 본래, ‘약한 자’, ‘가난한 자’, ‘죄인’이다. 유난히 불쌍해서 그들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는 자는 무엇보다 겸손한 자여야 하며, 겸손한 자는 보란듯이 갖춘 게 아무 것도 없는 ‘작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결코 뜻을 이룰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오롯이 바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스스로 잘난 자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되, 겸손한 자는 자신을 낮추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요즘 흔히 보고있지 않는가? 조금 난다 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이 여지없이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가련한 모습을... 요컨대, 겸손하지 않은 영성은 인간의 일탈된 교만을 자랑할 뿐 근본부터 온유와 겸손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영성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내가 약할 때 강하게 역사하시는 주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겸손을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라 정의한다 해도 그것은 절대로 열등감의 동의어가 아니다! 겸손은 자신이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숨김없이 인정하는 동시에 자유의지로 기꺼이 ‘낮아짐’을 의미한다. 반면에 열등감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불평하며, 심지어 원망하는 영혼의 병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말해 겸손한 영은 사랑과 은혜를 간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영이지만, 열등감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사탄의 파괴적인 질투의 영일 뿐이다.

얼마전에 ‘입신의식’에 대해서 글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적잖은 벗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교인들의 영적인 열등의식을 발견하곤 적이 놀랐다. 어떤 사람은 방언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다른 은사들에 대해서 자신의 영적 무능을 토로하는데,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했고 뭔가 다시 글을 올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은사에 대해서 일일이 말하는 건 ‘은사론’의 강의가 될테고, 여기에 그럴 만한 공간도 없지만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은혜, 또는 은사의 구체적인 증거라고 생각하는 방언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숱한 은사들 가운데 방언은 가시적으로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갖는 듯 하다. 그러나, ‘가시적’이라는 말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다잡아야 한다. ‘가시적’이라는 말은 결국..., '본 고로 믿는' 표적 신앙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서 표적을 확인하고 싶은 신앙을 주께서는 “악한 세대가 표적을 원한다!”라고 엄히 꾸짖으셨다. 자신이 원하는 방언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역을 위한 은사인지, 아니면 자신을 돋보이려 하거나 떠보려는 표적신앙의 일부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은사의 어원적 의미는 은혜와 동일하지만 실제적인 용례에서 분명히 달리 쓰이고 있다. 즉, 은혜가 보편적이며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 반면에 은사라고 말할 때는 개별적이며 실제적인 능력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은사는 ‘하나님이 개인에게 주시는 특별한 능력’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용어의 바른 정의에 대한 논쟁은 뒤로 하고, 우선 은사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서만 간단히 정리한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능력인 동시에 사역자로서 ‘주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기 위한 능력을 의미한다. 예컨대, 바울은 숱한 기적을 행사했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까지 보여주었지만, 자신의 어떤 능력과 탁월한 은사로도 끝내 자신의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지 못했다. 은사는 자신을 위한 영적 도구도 아니거니와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는 증거도 아니라는 말이다.

방언에 국한해서 정리한다면, 원래 방언은 요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말그대로 방언(方言)으로서 ‘다른 언어들’(행2:4)로 말하되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언어’로 듣는 ‘알아들을 수 있는 신비한 언어 능력’을 의미한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보라 이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야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술에 취하였다 하더라”(행 2:7-13).

외국어를 전혀 모르는 갈릴리 사람이 성령에 이끌려 방언으로 말하는 순간, 예루살렘에 모였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가 살고있는 지방의 언어로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내용이다. 다시말해 갈릴리 언어가 수십 개의 이방언어들로 동시에 통역되는, 이른바 지금의 방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언어행위로서 말그대로 신비한 능력이다.

물론 지금도 드물기는 하지만 방언을 하고 통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의 진위를 떠나서, 요즘 방언이라는 말을 하고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할 때의 방언과 초대교회의 실제 은사로서 방언은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성격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의 방언은 은사의 본질적인 성격에 합당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토착 언어로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은사로서 신비할 뿐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요즘의 방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의 방언을 두고 신비한 능력, 또는 특별한 은사의 증거인양 과장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도 없거니와 사실상 그만한 의미와 가치도 없다.

물론 같은 초대교회라도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방언에 대해서 달리 표현한다. 사도행전의 방언과 달리 상호소통이 되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도 방언이라고 말하지만, 분명한 것은 바울이 그리 말했을지라도 은사로서 방언의 본래 의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울은 방언에 대해서 말하기를, “통변할 수 없거든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말고 혼자 있는 곳에서 따로 방언으로 기도하라”고 명령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깊이 새겨야 한다.

어떤 교단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며, 따라서 은혜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그들이 방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얼마나 드러내는지 모르지만, 나는 한동안 그들 곁에 있으면서 그들이 쏟아내는 방언으로 말미암아 성령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성령의 능력으로서 은사는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누구든지 보고 알 수 있는 ‘변화의 능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병을 고쳤다면 기도의 능력이고 은혜라고 말할 뿐 은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은사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섬김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것은, 요즘 도처에서 방언의 은사를 전수한다면서 집회를 열어 ‘할렐루야’를 계속해서 그리고 빨리 반복하라고 가르친다. 실제로 그리 하다보면 실제로 혀가 꼬이면서 ‘랄랄라’ 방언이 터진다. 그리고 혼자서 기도하면서 ‘랄랄랄랄라~’를 반복하면 자연스레 입에 붙는다. 이건, 정말이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운 짓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확증하지 못하면서 외적인 현상으로 자위하려는 것은 정당한 신앙이 아니라 저급한 ‘자기최면’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방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니, 부정은커녕 당장 내 곁에서 아내는 새벽과 밤늦게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일과를 시작하고 마친다. 그리고 아내의 방언이 거짓이라거나,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방언으로 기도하고나면 주께 할 말을 다한 양 마음이 후련해지니 그것만으로도 무턱대고 소홀히 볼 일이 아니다.

어쨌든, 여러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면서 일시적이나마 신앙이 든든해지는 경우도 어렵잖게 보게 되니까 그또한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다만, 방언을 성령받은 증거라고 생각하면서 어설픈 영적 교만에 빠지거나, 반대로 방언을 하지 않으면 신앙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판단하며 스스로를 마치 신앙의 열등생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일 뿐이다.

방언이 엄밀한 의미에서 은사인가 하는 민감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방언은 바울이 말했듯이 여러 은사들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어도 마치 모든 은사를 대표하는 특별한 증거도 아니거니와 신앙인의 상징적인 표적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요컨대 방언이 다른 사람이나 자신의 신앙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없으며,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에게 알맞는 다른 은사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영적인 둔감함으로 인해서 자신에게서 고유한 은사를 뚜렷히 파악하지 못할망정, ‘만인제사장’ 시대에 각각의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은사를 지니고 있으며, 모두가 은사가 있는 사역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방언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심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귀중한 은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의 갈등을 느끼는 것이다.

 방언은 자신이나 남에게 과시하는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방언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일종의 표적일 뿐이다. 심리적인 효과가 있다는 구실로 방언의 은사를 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특별히 주신 은사를 찾아서 아름답게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요컨대 신앙의 증거는 방언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이며,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온유, 충성, 절제로서... 자신의 온전한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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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8.143)
2014-01-23 12:36:00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 사랑에 대해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

'랄라라라..' 방언하는 사람도 사랑합시다.

우리집 고양이에게 뭐라고 말하면 '미야옹'하고 대답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어도 대답하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 지....^^


하나님의 사랑에 뭐라고 대답하고 싶어서

'랄라라라...' 방언하는 사람을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기가 옹알이 한다고 생각하면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동영상에서 조용기 목사가 방언을 한다며

옹알이 하는 모습이 창피하게 느껴지더니

오늘 생각해보니 귀엽게 생각되어집니다.

나이를 많이 먹어도 철이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살이를 하는 성도들은 분별하는 영이 있기에 그 정도는 분별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성령이 주시는 은사 다음에 고린도전서 13장을 기술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2.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8.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9.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10.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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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4
강만원 (122.37.43.76)
2014-01-23 17:58:50
^^ 방언이나 방언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글이 아닙니다. 그 또한 은사인데 조롱하거나 무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순복음 교단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방언을 은사의 필수요소로 단정짓는 오류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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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2
Philip Im (70.62.49.64)
2014-01-23 05:09:53
은사와 표적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는 말씀처럼 은사를 가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실 때 은사를 통하여 나타내시며 그 목적은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열등감 해소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으로 은사를 구하는 경우에는 성령께서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혹 순서가 바뀌어 은사를 가진 사람이 교만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반드시 은사를 주십니다.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 또한 잘못된 일입니다.

이런 은사를 사용할 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이것은 표적이 아닙니다.
표적을 일으키기 위하여 주신 은사가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표적이 필요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이 필요한데 이미 부활의 표적이 있습니다. 이외에 다른 것을 더 구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가장 확실한 부활의 표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표적을 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까?
다른 표적은 사람들의 호기심만 채워줄 뿐 믿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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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4
지나가다 (24.36.103.34)
2014-01-23 01:22:05
방언 좋은데 왜 그러세요.
기도를 해도 옆에서 하도 듣고, 떠들어 대는 사람이 많아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좋아요. 요즘은 많은 분들이 새벽예배가서도 통성으로 기도안합니다. 옆에서 듣고 하도 떠들고 다녀서, 그런데 방언으로 하면 좋거든요.물론 또 옆에 있는 사람이 가서 또 떠들꺼예요. 지가 얼마나 잘 났으면 저러냐구요... 방언하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옆에서 보는 사람의 열등감이예요. 요즘 교회는 ..... 그냥 침묵이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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