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정리하는 어떤 모임에서 사회를 맡은 사람이 돌아가면서 간단히 지난 해를 회고하고 새해의 계획을 말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나는 이미 사실상 은퇴한 것이다 보니 지난해에도 별로 하는 일이 없어서 고민만 많이 했었고 올 해도 그럴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나중에 사회를 맡았던 이에게서 내가 뭔가 뜻이 있는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너무 평범한 이야기를 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나의 처지는 요즘 말로 '잉여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원래 '여유'는 좋은 것이지만 '잉여'가 되면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최근에 온라인에서 ‘잉여롭다. 잉여로운...’의 뜻은 ‘외롭다. 심심하다.’의 표현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여유가 능동적이라면 잉여는 수동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향이 있어서 잉여 인간은 남겨진 인간, 혹은 ‘남아도는’ 인간을 말한다.


무엇이 남아도는가?

세상에서 제일 흔한(?) '돈'이 남아돌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남아도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귀한(?) '시간'이다. 즉, 잉여 인간은 자신이 가진 귀한 자본인 시간에 비해 할 ‘짓’이 없는 사람들이 자조 섞인 자기비하의 의미인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를 모험적인 성격으로 태어나서 가끔씩 위험을 자초한다. 그렇다고 생명에 위험을 자초할 정도의 모험은 아니고 운전을 할 때 교통규칙을 위반하는 정도의 위험을 말한다.

그래서 종종 U턴이 안되거나 좌회전이 안 되는 곳에서 감행을 한다거나 신호등에서 노란불을 너무 아낀 나머지 빨간불이 넘어서 가다가 카메라에 찍히거나 경찰의 눈에 들어서 순간에 실수에 비해서 과도한 벌금을 물거나 하는 일들이다.

이런 내 성격에는 '할 일이 없는 것은 지옥의 슬로우 모션'이란 말이 실감난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스스로 잉여를 자처하는 요즘 현실은 절대적으로 안타깝다.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책 ‘실재의 사막’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이다.” 라고 쓰고 있다. 즉 자유민주주의 최대관심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지금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국정원 선거부정 사건 같이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것이다.

지젝은 앞의 책에서 “이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저 그런 삶’에 비해서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삶의 과잉’이며, 기꺼이 생명을 걸 수도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자각이다. 이런 위협을 무릅 쓸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한국의 청년들이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1 년에 3만 명 씩 호주를 찾는다. 단순하게 보면 이들은 지젝이 말한 '삶의 과잉' 추구하는 이들 같다. 그러나 내막을 알고 보면 잉여로서 시들어 가는 젊은이들이 탈출구로 찾아와서 호주의 저임금 시장을 채우다가 가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하면서 ‘잉여가치설’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얻은 추가적 이익 분을 잉여가치라고 하는데, 이 잉여가치가 현재적 생산 한계를 벗어나 추가적 재생산이 가능하게 한다. 즉, 잉여가 새로운 것을 시도할 여력이 있다는 의미이며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재고가 얼마 남지 않은 잉여로 어떻게 창조의 원동력을 삼느냐 하는 일로 날마다 고민하고 있기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다.


연말 년초에 사람을 만나면 모두들 '복을 못 받아 죽은 귀신'이 들린 것처럼 서로 '복 많이 받으라 '고 덕담을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것이 나에게는 은근히 부담이 된다. 나는 못하는 것이 많지만 그 중에 하나가 사람을 만났을 때 특별한 의미 없이 주고 받는 덕담이다. 그것은 내용이 없거나 마음 속에 없는 말을 못하는 까칠한 성격 때문일 것이다.

13 세기 중세 기독교의 영적 거인이었던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심지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불꽃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흐려진다. 반면에 심지로부터 높이 솟으면 솟을수록, 불꽃은 더욱 더 밝아진다.’고 설파했다.

나는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들기 위한 덕담들이 심지에 가까워지는 불꽃들과 같은 생각이 들어 어떻게 하면 심지로부터 더 멀어져서 더 밝아지는 불꽃처럼 대화를 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요즘은 교황청의 CEO가 바뀌어 변모를 일신하는 재단장을 함으로써 상종가를 누리고 있지만 종래에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 교황이 나타나면 뚱뚱하고 가난한 히스패닉들이 몰려오고 달라이 라마가 나타나면 돈 많은 날씬한 백인 인텔리들이 모여들었다. 이것이 한 마디로 서구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달라이 라마가 왜 인기가 있는가? 그는 누구나가 바라고 있는 행복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노련한 스님은 자신이 전혀 행복할 수가 없는 망명자로서 티베트 민중의 고통을 끌어안고 있는 상태에서 행복을 말하기 때문에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만약에 세계 제일의 부자인 빌 게이츠가 행복을 말한다면 그 만큼 무게가 가겠는가?

달라이 라마는 절대로 아수라 같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내전 지역에는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가 돈을 탐해서가 아니라 그는 당장 책임을 지고 먹여 살려야 하는 티베트 난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호주에 와서 강연을 할 때 "나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오. 돈을 주시요"라고 했다.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은 서구 사회에 팔기 위한 상품으로서의 행복일 뿐이다.

서구 사회에 퍼지고 있는 불교에 대한 분석으로는 슬라보예 지젝만큼 날카로운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가 불교를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의 폭력적·독재적 전횡을 중화시키거나 치유할 방법이 불교에 있다는 생각이 널러 펴져 있기 때문이다.

“서양 불교는 광란의 시장 경쟁 속도에 대하여 내적 거리를 두고 무관심할 것을 설교하는 대중문화의 한 현상이다. 이는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 실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역학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완벽하게 참여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는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 이데올로기다.” 라는 것이다.

‘서양 불교’의 원형인 ‘동양 불교’도 그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일본의 사례가 결정적 근거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와 선을 결합했던 일본 선사 스즈키 다이세쓰의 禪(선)사상을 사례로 끌어들인다. “군국주의적 禪(선)지도자들은 선의 기본적 메시지를 순진한 군사적 충성, 곧 명령에 즉각 복종하고 자아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임무를 다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한다.”

일본 불교에서는 ‘적을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이 자비의 실천이다.’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실레로 임진왜란 때 일본은 배 한 척에 중 하나를 태워 보냈다.


문제는 무념무상이라는 불교의 내적 평화의 원리에 있다. ‘분별적 사고를 중지하고 無(무)의 상태로 돌입하는 것’, 즉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어 윤리적 판단 자체를 거부하게 만든다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그런 무차별의 종교에서는 진정한 혁명도 사랑도 불가능하다고 지젝은 판단한다.

요컨대 불교란 구미권에서 신비주의적인 현실도피수단으로 팔리고 있는 것이라는 게다. 특히 티베트 불교는 서구 중산 계급의 최대의 애완물 같은 것이다. 불교에 대한 무비판적 접근이 절대적이다. 예를 들면 티베트 역사에서 사찰에 예속되어 있는 농민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영적 생활의 낙원'이자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희생물'인 티베트의 치부를 안 건드리려는 것이다.

슬로보예 지젝은 서구에서 퍼져 나가는 불교를 뉴에이지 같은 종교 문화 현상이라고 본다. 뉴에이지 계통의 명상단체들의 홈페이지들을 구경하면 웃는 사진뿐이다. 과연 그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그렇게 행복할까? 분명 아닐 것이다.

‘모나리자 미소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다고 한다. 조금은 한가한(?) 한 학자가 풀 수 없는 신비를 담고 있다고 하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분석해 행복 정도를 측정했다고 한다. 그 긍정적 요소의 비율이 83%! 약 17% 정도가 부정적인 표정을 담고 있다고 자신 있게 결론지었다. 어떻게 계산해서 나온 숫자인지는 모르지만 행복만 있는 일은 없다는 것만은 분명히 시사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행복과 불행의 뒤엉킴 그것이 인생이 아닌가? 금년에도 우리 앞에 어김없이 펼쳐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