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믿음의 역사는
   2013년 12월 18일 수요일

어제 세탁해 주러 온다는 큰 딸이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하여
아직 새벽안개가 걷히지 않은 컴컴한 길을 걸어 그들이 사는 곳을 가 본다.
가는 동안 안개는 많이 걷히고 아이들이 벌써 일어나
어슴푸레한 들에서 지난번처럼 불을 피우고 있다.

가장 어린 젖먹이 아이서부터 이미 모두 깨어 밖에 나와 놀든가 숯을 굽는다.
어린이들 주려고 가져간 빵을 큰 딸에게 쥐어 주며
“왜 어제 온다더니 안 왔느냐” 물어 보니,
남편이 몹시 아파서 못 갔다고.

남편이 갑자기 일주일 전서부터 온 몸이 아파서 일도 못하고 신음 거린다고.
어제부터는 걷지도 못하여 남편 옆에서 시중드느라고 못 온 거였다.
밥은 잘 먹느냐니까 밥은 잘 먹는다고.
밥만 잘 먹으면 젊은 사람이니 큰 걱정은 없다.
손목을 잡아 진맥을 해 보니 맥이 빠르게 뛰고,
머리에 손을 얹어 보니 열이 상당히 높다.
위험한 증세는 아닌 것 같고 감기가 심하게 든 것 같다.

아침을 하던 환자의 부인이 잠시 막내둥이를 안아 주고 있다.

그가 자는 움막을 들여다보았다.
짐승우리나 다름없다.
마루도 없이 그냥 흙바닥에 볏짚만 깔아놓았다.
소 외양간과 다를 바 없다.
천장이 낮고 비좁은 것은 오히려 소 외양간보다 못하다.
어제 밤에 비가 몹시 쏟아져 물이 스며들었는지 바닥이 눅눅하다.
이런데서 잠을 자니 감기가 안 들겠는가.
이들은 태풍을 만난 이재민들이 아니다.
늘 이렇게 소 외양간도 못한 움막에서 태풍만난 이재민들처럼 산다.
지난 번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타클로반 피해 주민들을 위하여
세계 각처에서 구호품을 보내온다는 소문을 들은 이들은
차라리 자기들도 태풍이나 만나 구호품 좀 받아봤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어설프게 가난하니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한다.

남편을 보건소로 데려오면 치료해 주겠다고 하니
걸을 수 없어 갈 수 없단다.
그렇다고 트라이씨클을 타고 올 형편도 못된다.
아침 조깅하던 중이라 치료할 아무런 도구가 없다.
오늘 낮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오전 업무에 늦지 않으려 종종걸음으로 돌아오다.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지난 밤 유난히 심하게 쏟아지던 소나기도 멈추고
반디살 행상인의 나팔소리와 함께 어둠은 물러가고
세르반테스의 새 아침이 또 열린다.

오늘은 목요일, 7일 장이 서는 날이다.
부지런한 장사꾼들이 어제 밤부터 와서 체육관 앞 도로변에 진을 치고 있다.
이른 아침, 서둘러 장터에 가서
아침으로 먹을 노란색 고구마와 자주색 고구마 그리고 토마토를 사서
보건소 당직에게 삶아 달라 맡기고 부리나케 꾸보 하우스로 가다.
어제 바빠서 가보지 못했는데 환자의 증세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지만, 꾸보의 가족들은 여느 때처럼 모두 일어나
어슴푸레한 안개 속에서 각자의 일을 한다.
왕아버지는 돼지 먹이를 먹이고, 18세 며느리는 논바닥에서 남편과 숯을 굽고
큰 딸은 자기 딸이 학교에 가져갈 크리스마스 선물 챙기고
환자는 허리가 아파 아직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움막에 기대어 앉아 아기를 안고 있다가 나를 쳐다본다.
이들은 매일 보아도 인사할 줄을 모른다.
인사 같은 것 받으려다간 기분 나빠서 이런데 오지 못한다.

환자가 너무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어제 못 온 것이 매우 미안하다.
들마루가 있는 환자의 아버지 꾸보에서 치료하면
움막의 땅바닥보다 편할 것 같아 그리로 가자고 하니
환자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어 못 가겠단다.
외양간보다도 비좁고 낮은 그의 움막에 그를 뉘여 놓고 시침을 시작하다.

아빠가 침 맞는 것이 신기한 듯, 아이들이 움막을 헤치고 바라보고 있다.

아침 해가 이미 앞산 위로 올라섰건만, 움막 내부는 여전히 어둡고
지푸라기를 깔아 놓은 바닥이 치료하기에 매우 불편하다.
환자를 엎드려 놓고 먼저 양경에 시침을 하다.
꼬부리고 앉아서 하는 바람에 내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이 아프다.
나도 오랫동안 아팠던 사람이라 조금만 무리하면 허리가 많이 아프다.
환자 치료대가 없는 곳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은 고역이다.
그러나 환자가 움직일 수도 없는 지경이니 자리를 옮길 수도 없어
비좁고 불편하지만 그냥 치료할 수밖에 없다.
양경에 이어 음경을 약 한 시간에 걸쳐 유침을 마치고
오전 일과에 늦지 않으려고 부리나케 돌아오다.

장날은 환자들이 평소의 배도 더 많이 와서 매우 바쁘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서는 시장구경을 하고 싶어
오전에 환자를 돌보던 중 잠시 목요장터 구경을 나가다.
목요장터는 조용한 산악지역을 오랜만에 활기차게 만들고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은 이방인에게 신선한 흥밋거리를 제공한다.

혹시 전기스탠드를 하나 살 수 있을까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며 다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난다.
아침에 만난 18세 임산부가 가족들과 함께 장을 보러 왔다가
인산인해의 사람 틈바구니에서 나를 보고 반가워 부른다.
그를 따라 가보니 왕아버지를 비롯하여 온 가족이
옷을 말끔히 갈아입고 모두 시장구경 하러 나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파서 한 걸음도 못 걷던, 아침에 움막에서 나에게 침을 맞던 환자도 나온 게 아닌가!
어떻게 왔느냐 물으니 수줍어 빙그레 웃기만하고
부인이 대신 “아침에 침 맞고 나서 걸을 수 있게 되어서 나왔다”고 대답한다.

침을 맞은 후, 목요장터까지 걸어 나온 환자가 나를 보고도 여전히 웃지도 않고 쳐다보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