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살아 있다는 것은
   2013년 12월 16일 월요일 

지난 가을 내가 없는 사이
혹시 태풍에 허름하던 꾸보가 날아가지 않았을까 궁금하여
이른 새벽안개를 헤치고 찾아가 본다.

멀리서 다가가며 바라보니 논 한가운데
안개 속 희미한 물체가 보인다.
다행히도 태풍이 이곳을 지나지 않은 모양이다.
꾸보가 전보다 더 낡아 보이지만
아직도 건재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반갑다.

18세 임산부가 사는 집 - 이 집에 세 채의 꾸보 중 가장 좋은 집이다.

꾸보의 사람들이 새벽부터 어른 아이 모두 일어나 밭에서 연기를 피운다.
저녁 6시만 되면 캄캄하고 적막하여 모두 의무적으로 잠을 자야하니
어린이들도 일찍 일어날 수밖에!

아이들 주려고 가는 길에 구멍가게에서 사 간 막대사탕을
나누어 주라고 한 젊은 아기 엄마에게 건네주고
무얼 하기 위하여 불을 피우는가 물어 보니 숯을 굽는단다.

나무도 없는 허허 들판에서
여기 저기 마른 개울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무를 주워 모아 숯을 만든다.
시장에 내다 팔 만한 양은 되지 않는 것 같고
아마 비가 오는 구중중한 날을 대비해서 굽는 모양이다.

숯을 굽고 있는 18세 임산부의 남편

열여덟 살 된 어린 며느리가 두 번째 아이를 가졌다고
불쑥 나온 배를 보여 주며 배시시 웃는다.

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 결혼식은 아직 못 올린 모양이다.
2년 전 16세 되던 해에 남자를 만나 그동안 벌써 아이를 낳았고
두 달 후면 둘째를 낳는다고!

몸이 무거워 들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무언가 좀 격려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아이를 낳으면 선물을 주겠다고 하니, 또 배시시 웃으며 좋아한다.

아이 낳으러 RHU(보건소)에 오면
나를 꼭 찾으라 당부하다.

보건소 직원들에게 아이 낳는데 얼마나 비용이 드나 알아보니
그들 형편에 적지 않은 돈이 든다.
무슨 선물을 준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말 안했지만,
출산 비용을 내가 부담하면 기쁜 선물이 될 것 같다.

하여 담당의사와 수간호사에게 이야기 하였다.
그녀가 내년 2월에 아기 낳으러 오면 내가 모든 출산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그러자 의사 옆에 섰던 수간호사가 괜히 심통이 난 듯 트집을 잡듯이
“임산부가 승낙했느냐”고 그녀 특유의 앙칼진 목소리로 묻는다.

자꾸 말꼬리 잡는 것이 귀찮아
엉겁결에 그들이 승낙했다고 대답하다.

특별한 직업도 없는 그들이 아이의 출산 비용을 모으려면
몇 달을 아끼고 벌어 모아야 한다.
아니 벌 곳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마련할지 막막하다.
그래도 아무 근심걱정 없이
새 생명 잉태한 것을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출산 날을 기다리는 모습이
아직 철이 없어 인생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 어린 사람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다.

그래,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니
네가 염려할 문제가 아니다.
낳기만 하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길러 주실 터이니
안심하고 건강하게 잘 낳아라!

18세 임산부가 무거운 몸을 들마루에 기대어 쉬고 있다.

아까 나에게 사탕을 전해 받은 건강하고 우악스러워 보이는 여인이
알고 보니 임산부의 올케였다.
그녀가 자신의 어린 막내딸을 안고
자랑삼아 자기가 이 집 맏딸이라고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한다.

그녀에게 사탕을 전해주라 하길 잘한 것 같다.

세 채의 꾸보 중 가장 허름한 곳에 사는 맏딸이 나에게 자기 남편을 소개하니
그도 역시 겸연쩍은 듯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수줍어 피한다.

건강해 보이는 그녀에게 하루 종일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니
예상한 대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단다.
요즈음 농사철도 아니니 더욱이나 일할 것이 없겠다.

젊고 튼튼한 사람이 아무 일도 없이
식구도 많은 가난한 살림에 하루 종일 무료하게 지내는 게 안쓰러워
무슨 일거리를 정해주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 세탁물 좀 세탁해 달라고 부탁하니 매우 좋아한다.

비가 새었는지 다 낡은 꾸보 지붕에
어디서 비닐을 주어다 손질한 모습이 보인다.

우리네 시골 원두막만 한 크기의 꾸보 세 채에서 무려 30명의 가족이 산단다.
성인 14명, 어린이 16명, 내년 2월이면 아기 한 명이 더 탄생한다.
비좁은 공간에 30명 모두가 들어가면 앉기도 비좁을 텐데
어떻게 함께 자는지 이해가 안 간다.
혹시 밤에 교대로 자는 걸까?
교대로 잠을 자도 삼교대는 해야 될 것 같다.

이 가문의 큰 딸이 자신의 막내 아들을 안고 있고, 그 뒤에 이들이 사용하는 뒷간(화장실)이 보인다.

요즈음 별로 일거리도 없는데 그들은 무얼 먹고 살까?

왕어머니가 멀리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왕어머니래야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
별로 해 줄 말이 없어, 당신은 왕비이고 당신 남편은 왕이라고 추어주니
그녀도 그렇다는 시늉을 하며 빙그레 웃는다.

자손을 30명이나 거느리고, 한 집에서 사니 그리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젊은 자녀들이 앞으로 계속 해마다 몇 명씩 아이를 출산할 것이니
몇 년 안가 곧 50명 이상이 될 성싶다.

이른 새벽부터 연기를 피우며 숯을 굽든가
아니면 그 옆에서 농기구를 가지고 놀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 맑고 밝은 모습이다.
가난함도 비굴함도 연약함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도시의 부잣집 아이들보다도 오히려 더 총명해 보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일을 해서 그런지 생기 있어 보인다.

찌든 도시문화에 영향 받지 않은 사람들은
숲속의 자연처럼 모두가 맑고 신선하다.

이들은 일상을 그저 그냥 운명에 맡기고 사는가?
도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가난한 이들의 하루 하루 살아가는 모든 일상이
고통이며 근심덩어리 일 것 같은데
이들의 모습은 전혀 아무런 근심 없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가보다.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자기들 모습만 바라보며 사니 행복한가보다.
아프면 모두 함께 아파하고
아기를 낳으면 모두가 자기 아이처럼
기뻐서 좋아하며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아장 아장 걷는 어린 아이들 커가는 모습에
모두 하하 호호하며 즐겁게 산다.

잘 있으라! 인사를 하며 헤어지니
모두들 수줍어하며 손을 흔든다.

마을 아이들이 벌써 출렁다리를 건너 학교에 간다.

살아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가치 있고
모든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맏딸이 내 빨래하러 오고
열여덟 살 며느리가 아이를 낳으러 보건소에 오는 날이
어서 다가오길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마을 어린이들이 안개도 걷히기 전에 학교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