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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I복음의 핵심 논리
김용호  |  yhchorakd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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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12월 17일 (화) 12:29:57
최종편집 : 2013년 12월 17일 (화) 23:04:35 [조회수 : 3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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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아래 대화는 제가 섬기는 공동체의 카페에 제가 올린 조직신학 칼럼글 "복음의 핵심 논리"를 놓고 공동체 지체인 강지성 형제님과 제가 댓글로 주고 받은 대화의 내용입니다. 인간론과 구원론 그리고 교회론에 대한 현실감 있는 대화이므로 읽으시는 분들께서 우리 공동체의 성경 해석에 대해 쉽게 이해하시고 하나의 참고로 삼으실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하여 기고합니다. -김용호-)

 

강지성 :

하나님의 약속이 구약에서는 베일에 가려진채로 이스라엘 백성이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그것이 신약에 와서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하고 있는데요, 진보기독교에서는 구약에서 표현된 공의와 정의를 근거로 예수님이 오신 이유도 이 땅에 사회 정의를 실현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며 크리스찬들도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거나 구조적인 사회악을 제거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구약에서는 공의와 정의로 표현하셨을까요, 그 표현 때문에 약속에 대해서 많은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구요?

김용호 :

1. 집사님께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관련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설명에 앞서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공의와 정의, 그리고 사랑은 세속 언어에서는 일치하는 단어가 없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또한 마찬가지구요. 따라서 각각의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세속 사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 66권 전체에서 우리가 파악해야 합니다.

2. 정의와 공의로 번역된 히브리어 쩨다카와 미쉬파트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두 가지 속성을 설명하시기 위해 히브리 노예들이 사용하던 세속 언어에서 그 단어들을 선택하여 인용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단어의 세속 사전적 의미에 얽매인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그 의미를 오해한 것이지요.

3. 먼저 쩨다카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로 번역되고 있는데 디카이오쉬네, 즉 의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단어로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사랑할 수 있는 자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는 바로 사랑인 것이지요. 그러나 디카이오쉬네가 정의의 여신 디케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세속적 의미는 신상필벌, 특히 보복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혼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것이지요. 다만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쩨다카를 구제 제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4. 미쉬파트의 세속적 의미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의 중요한 용법은 신원입니다. 괴롭힘을 당하거나 갇힌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의미하지요. 헬라어로 크리시스로 번역되어 신약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신약적인 의미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의 해방이 가장 핵심적인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간에서 꺼내주시고 우리는 또 어린 자들이 간에서 나올 수 있도록 양육하는 것이 바로 미쉬파트의 신약적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5. 이상에서 볼 때 구약의 공의와 정의는 구제와 양육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행하는 사랑의 두 속성을 의미하는 단어였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구약 백성들은 육에 속한 삶만을 계속 살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차원에서 인도주의적 사랑을 해야 했지만 신약 백성들은 영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의 약속을 받았으므로 이웃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도록 양육과 구제를 해야 한다는 점이 다른 점입니다. 또 하나의 다른 점을 꼽는다면 사랑의 대상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한정되었다가 천하 만민에게 개방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답변 끝. 귀한 질문 감사드립니다.)

강지성 :

구약백성이 그 의미를 오해한 것이란 말씀이네요.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정확하겠네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그들은 사랑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진보주의 기독교의 논리가 맞으려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아주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삶을 살았어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참다 참다 예수님을 보내신 것으로 되야 하는데 율법을 시민법으로 인식하고 살았던 유대인들이 율법도 수백 가지 조항으로 나누어서 지키려 했던 것을 보아도 오히려 철저하게 사회 정의를 지키며 살려고 했던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너희는 나를 버렸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하고 말씀하시는 거구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억울해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냐고 하는 게 말라기이구요. 요즘 우리와 비교해서도 오히려 유대인들이 더 사회정의와 공의를 지키며 살지 않았나 짐작해 봅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삶이 어떤지 잘 몰라서 그냥 짐작입니다.

만약 사회정의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시대마다 나라마다 다른 사회정의를 무슨 기준으로 지킬지 난감해 집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행복 추구, 미덕 추구, 자유 추구의 세 가지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데 어떤 것이 진짜 정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김용호 :

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바리새인들이야말로 가장 윤리도덕적인 삶을 산 집단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은 인간의 윤리도덕을 악으로 규정합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도 다를 바 없는데 첫째는 그 마음속의 동기가 사실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고 (스가랴 7:5-6에서 심지어 금식하고 먹고 마시는 것조차 모두 너희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둘째로 그 결과 쩨다카와 미쉬파트를 왜곡 해석해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7에서 쩨아카-부르짖음-와 미스파흐-포학-일 뿐임을 지적하십니다)

이러한 오류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도적질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네 자신은 도적질을 하느냐고 지적하면서 상세히 논증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고자 하는 본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교묘히 왜곡시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의롭다고 평가하며 살 수 있도록 꾀를 낸 것이지요.

하물며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의 윤리도덕의 악함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인간들이 말하는 정의란 자신에게 유리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강지성 :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정의롭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성경과 반대로 가는 거라고 자크 엘룰도 지적했습니다. 인간이 타락 한 후에 선악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타락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김용호 :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제멋대로 판단하게 된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형벌로 인하여 공포와 탐욕에 휘둘리게 되자 각자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해 그것을 선과 정의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무엇이 옳고 선하고 의로운가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리고는 서로 상대방을 악하다고 정죄하게 되지요. 사람들의 가치관과 정의관은 결국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동기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공격하는 빌미가 될 뿐입니다. 가치관과 정의관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모든 여건이 좋은 특이한 상황에서는 서로 다정하게 한 마음이 되어 살 수도 있겠지만 그런 특이한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윤리도덕과 휴머니즘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그것이 이웃의 본질적인 문제를 전혀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에 열광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시자 모든 군중과 대부분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버립니다. 어려운 자들의 환경을 보살펴주는 것이 이웃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소경과 같은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윤리도덕과 휴머니즘에만 몰두할 뿐이지요.

자크 엘룰과 관련해서 말씀 드리자면 서구 신학계에서 기독교 윤리학을 악으로 규정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졌던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 윤리학은 악한 것이나 다른 대안은 없다."

새로운 피조물로의 재탄생과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라는 성경의 약속의 핵심을 몰랐던 그에게는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자크 엘룰의 한계이자 서구 기독교의 태생적 한계입니다.

강지성 :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웨슬리주의의 보편구원론의 논쟁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중예정론은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에 반응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하고 보편구원론은 하나님이 만인을 구원하시려고 선행 은총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 은총에 인간이 믿음으로 응답할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인간의 의식(자유의지) 차원에서의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는 성경의 본론은 인간의 무의식(노예의지)까지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가 공의와 정의, 즉 사랑을 행할 수 있고 그래야 의의 종이 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성령의 역사로서 그리스도의 피스티스, 의, 사랑이 우리에게 와야지만 가능한 거구요. 이런 성령의 역사가 빠진 서구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믿음은 의롭다 칭하는 믿음 정도인데요. 여기서 질문하나 들어갑니다.

로마서 4장5절에 보면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하셨는데 믿음의 내용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라든지 우리가 죽어서 천국을 보장하시는 하나님이라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즉 우리를 의롭게 하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의 믿음을 의로 간주하시고 그 다음 본론인 진짜 우리가 의롭게 되는 성화의 과정이 진행되는 건데 우리의 믿음이 성경과 다르게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해서 출발한 믿음을 과연 칭의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 하는 것도 본분을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라 매우 조심스러운데 그렇더라도 우리 내부적으로라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표현으로는 그 믿음을 우리가 진짜다 가짜다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무늬만 칭의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김용호 :

집사님께서 구원론과 관련해 이번에도 핵심적인 부분을 언급하셨네요. 감사합니다. 답변 들어갑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우리가 세 가지 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는 "의롭다 하다" 또는 "의롭게 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 "디카이오오"와 "의롭게 여기다"로 번역되는 "로기조마이 에이스 디카이오쉬넨"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정교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믿음, 신실함, 충성 등으로 번역되는 피스티스에는 두 가지가 있어서 인간의 피스티스와 그리스도의 피스티스가 신약성경에서 구분되어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며 세째는 그 피스티스가 반드시 열매, 즉 행위로 입중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먼저 집사님께서 인용하신 로마서 4장 5절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게 만드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일단) 의롭다고 간주하시나니"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구원 사건의 순서를 설명하기 위해 동사 "디카이오오"와 "로기조마이"를 얼마나 정교하게 구분해 사용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4장 안에서 사도 바울은 "디카이오오"를 3회, "로기조마이"를 11회 사용하면서 정교하게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 언급해드린 세 가지 항목을 결합해 구원 사건의 순서를 정리하면서 피스티스와 의와 선한 행위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1.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자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신다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간구하게 됩니다. 이 믿음이 인간의 믿음(확신)이며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셔서 그것만으로도 일단 의롭다고 간주하십니다. (의의 간주, 전가 - imputation)

* 여기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믿음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냐에 따라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웨슬리의 보편구원론에 근거한 신인협동설이 갈라집니다. 물론 성경에는 양쪽의 주장의 근거가 되는 구절들이 다 있습니다. 우리는 이중예정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결단과 확신과 순종은 인간의 책임이라고 구분합니다.

2. 정의와 공의, 즉 사랑을 행할 수 없음을 회개하며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기를 간구하는 자에게 신비한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피스티스(신실함, 믿음, 충성)가 임하면서 성령의 열매가 맺힌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됩니다.

* 사도 바울이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씀한 것은 행위보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지 못해 아직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한 옛사람은 그 행위가 모두 악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행위를 전혀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는 루터의 오역입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으로"입니다.

3.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비로소 하나님이 명령하신 의로운 삶, 즉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삶을 처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 삶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의로운 삶, 사랑하는 삶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서 오로지 이웃이 자신처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일에 기쁘게 헌신하는 삶입니다.

* 가톨릭이 구원의 핵심은 "의의 전가"가 아니라 "의의 주입"이라고 주장한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이 주장하는 선한 행위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선한 행위와 똑같은 것인 바, 이는 그들이 "의의 주입"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 그리스도의 의가 주입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4. 따라서 의롭게 만들어지는 구원 사건, 즉 새로운 피조물로의 재탄생은 당연히 열매, 즉 행위로써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입증된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십니다.

* 이와 관련해 사도 바울과 야고보 사도는 다음과 같이 일치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롬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 선한 행위의 성격에 대해서도 두 사도는 다음과 같이 일치된 말씀을 합니다.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약 5:19-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위 구절들이 보여주듯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의롭고 선한 행위는 세상이 원하는 윤리도덕도 휴머니즘도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즉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도록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2000년 서구 주류 기독교는 - 가톨릭과 개신교를 망라해 - 헬라 철학을 기반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만들어 왔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의와 사랑을 세상 철학과 윤리학이 규정하는 의와 사랑으로 단정하고 새로운 피조물을 세상의 의와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보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의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버리고 성경의 구원의 약속은 실체가 모호한 관념의 유희에 머무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폭력적 권위가 해체된 오늘날에 와서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 것은 필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자 결국 남는 것은 엉뚱하게도 세상 윤리도덕을 행하자는 도덕주의 기독교, 복이나 받자는 기복주의 기독교, 예수 믿고 천당이나 가자는 내세주의 기독교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힘을 내자고 우리가 서로 용기를 북돋우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선하고 의로운 행위, 즉 사랑의 행동 강령을 다음의 네 가지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 안에서의 양육과 구제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 밖에서의 전도와 활용

강지성 :

네 가지 중 전도에 대해서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일반 교회에서의 전도는 한마디로 예수 믿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게 하는 거지요.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전도는 그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네요. 우리가 전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나나타서 우리가 어떻게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바뀌는가를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며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로 바뀐 내 모습에서 거듭나기 전과 거듭난 후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이 왜 우리의 구원자가 되는지를 우리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전도라는 것이지요. 즉 일반 교회는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입으로 전하는 것이며 우리는 왜 예수님이 구원자 인가 그 내용을 설명하고 우리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전도의 개념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겠네요

김용호 :

집사님께서 전도에 대해 그 차이점을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좀 더 자세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전도는 "증인이 되어 도를 전하는 것"인데 기독교에는 몇 가지 증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1. 입소문으로 듣고 단순히 그 소문을 전파하려고 애쓰는 증인

2. 교리에 세뇌되어 다른 사람도 그 교리에 세뇌되게 하려고 애쓰는 증인

3. 우연히 한 번 복을 받고서 다른 사람도 복을 받게 해 주려고 애쓰는 증인

4. 은사를 체험하고 다른 사람도 은사를 체험하게 해 주려고 애쓰는 증인

5.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다른 사람들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애쓰는 증인

주류 기독교의 증인 개념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죽은 후에는 천당에 들어가게 된다는, 이 땅에서의 실체라고는 전혀 없는 관념적인 교리를 전파하러 다닙니다. 따라서 "믿으면 알게 된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요.

그 허점을 파고든 것이 기복주의와 은사주의입니다. 자신들에게는 실체가 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사업도 잘 되고 병자도 치유되고 방언과 예언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이야말로 진짜 증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에서 표적을 보여달라는 유대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3일만의 부활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처럼 예수님 자신에 대한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재탄생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범적인 증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해 로마서 6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된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증언이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즉 자신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고 간곡히 권면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전도는,

1. 복음에 약속된 대로 (불완전하게나마)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된 자신들의 모습과 (불완전하게나마)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사는 자신들의 공동체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2. 그 신비한 일이 상세히 약속되어 있는 복음의 논리를 정확하게 논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서에 예언되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세상의 빛"이 된 증인들이 행하는 전도입니다. (권능과 은사는 이러한 전도의 현장에서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주어지는 수단입니다. 물론 주어지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권능과 은사가 증언과 전도의 주제가 되어버리면 많은 무리와 오류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됩니다.)

강지성 :

어차피 불완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누가 확인해 줄 수 있냐며 그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인정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에서 확인해야 하고 그런 삶을 입증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고 믿습니다(롬12:1-2). 그런 모습이 우리 삶에 나타날 때 감사의 기도를, 나타나지 않을 때 회개의 기도를 통해서 더욱 새로운 피조물의 삶으로 나타나기를 간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삶의 열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구체적으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해서 공동체 안에서는 구제와 양육으로 공동체 밖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전도와 전략적인 활용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이런 삶이 열매로서 나타난다고 해서 최후 심판 때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선택을 받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의의 종으로 살다가도 언제 죄의 종으로 바뀔지 모르며 수시로 오락가락 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떨며 기뻐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실존임을 알기에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김용호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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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2-22 06:01:27
맨 아래에 있는 필립님의 댓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필립님께서 인간의 피스티스(믿음, 신실함, 충성 등으로 번역)를 가진 자와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은 자를 어떻게 구분하고 또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를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은 자라 해도 완전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참으로 핵심적인 질문과 지적입니다. 답변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선과 인간의 선

먼저 성경 전체를 보는 기본적인 시각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서구 주류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성경의 계시를 선과 악의 대결로 보아왔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선과 인간의 선의 대결로 보고 있습니다.

구약은 자신들의 선이 옳다고 끝까지 고집하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충돌에 대한 기록인 선지서로 마무리지어지고 신약은 하나님의 선을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하시고 인간들이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을 여신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인 사복음서와 그 십자가의 길을 실제로 사람들이 통과하도록 만드신 성령의 역사에 대한 기록인 사도행전,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통과해 하나님의 선을 받게 된 사도들의 증언과 권면인 서신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시대 이후 초대교회가 본격적으로 헬라 문화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면서 헬라 철학의 선악관에 의한 성경 해석이 시작됩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와의 야합을 거치면서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지요. 이는 로마 제국의 선악관, 즉 인간의 선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소위 콘스탄틴 기독교의 완성이며 그 중심에 어거스틴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지요.

하나님의 선을 자신들의 선과 동일한 것으로 전제하는, 즉 인간의 선악관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이러한 전통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에 그대로 이어졌고 그 결과 지난 세기부터는 급기야 보수의 선악관과 진보의 선악관에 의해 보수기독교와 진보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대립하는 지경에까지 왔습니다. 가톨릭이냐 개신교냐를 넘어서 보수 기독교냐 진보 기독교냐로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선악관으로 성경을 해석해 온 서구 주류 기독교로서는 필연적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수렁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흐름을 따르지 않고 성경을 하나님의 선과 인간의 선의 충돌과 대립에 대한 계시로 보고 있습니다.

2. 새로운 피조물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인간의 선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선을 받게 된 존재로 이해합니다. 불의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변화된다는, 또는 썩어질 구습을 좇는 옛사람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으로 변화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 등 무수한 사도들의 증언을 이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3.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그리스도의 피스티스

복음, 즉 인간의 선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선을 받게 되어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되고 이들이 모여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는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써 소망하게 된 자들은 성령의 역사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피스티스(신실함, 믿음, 충성)를 받게 하여 아가도스하고 피스토스한, 즉 "선하고 충성된" 종인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됩니다.

4. 새로운 피조물의 속성, 성령의 열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재탄생된 새로운 피조물들의 속성인 성령의 열매의 속성에 아가도쉬네(선함)와 피스티스(신실함, 충성)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을 신실하게 행하는 사랑이 그 속성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제시되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지난 번 답글에서는 카라(희락)를 예로 말씀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락과 걸 그룹 카라가 주는 희락이 같을 수 없음을 언급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선을 행하는 사랑과 인간의 선을 행하는 사랑이 같을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사랑입니다. 그 자기 사랑이 범위를 넓히면 가족 사랑, 나라 사랑 등의 당짓기 사랑으로 확대되는 것이나 프랑스 대혁명을 거친 이후에는 인류 사랑으로 확대되면서 진보 사상이 출현하게 됩니다. 보수 측의 사랑이 상호 배타적인 윤리도덕을 기반으로 행해지는 데 반해 진보 측의 사랑은 인류애인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행해집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사사건건 보수와 진보는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선을 고집하는 서구 주류 기독교 또한 보수 기독교와 진보 기독교로 나뉘어 매사에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을 행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사랑은 그와는 다릅니다. (가족을 미워하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증언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 그 차이점에 대한 단초를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들이 예수님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이며 또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약속을 "믿고" 소망하는 어린 자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허비하면서 아비의 심정으로 섬기는 사랑입니다. 그에 더해 세상을 향해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늘어날 수 있도록 빚진 자의 심정으로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하는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을 인간의 선인 윤리도덕이나 휴머니즘으로 이해하고 있는 주류 기독교인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산상수훈 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개와 돼지와 같은 자들에게는 귀한 것을 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같은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죄를 범하고도 끝내 돌아서기를 거부하는 형제자매는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길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인간의 선인 윤리도덕과 휴머니즘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서구 주류 기독교가 이 세 말씀들 간의 충돌과 모순을 해석할 수 있을까요?

악의 축을 제거한다며 십자군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과거와 현재의 보수 기독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니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는 진보 기독교는 이어지는 두 말씀에 걸립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속성인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는 인간의 선한 성품과 충돌하는 하나님의 선한 성품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냐 아니면 인간의 피스티스만을 가진 육에 속한 크리스찬이냐를 도키마조하는, 즉 시험 검증 확인하는 기준이 됩니다. 조만간 성령의 열매의 아홉 가지 속성에 대한 글을 당당뉴스에 기고할 예정임을 말씀드리면서 상세한 언급은 생략하겠습니다.

5. 새로운 피조물의 한계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아 하나님의 선을 얻게 된 선하고 충성된 새로운 피조물에게도 여전히 육을 가지고 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들은 항시 깨어 있을 수 없어 수시로 잠이 듭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항상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없어 수시로 그리스도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실제 자신의 주인이신 상태를 말하며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실제 자신의 주인인 상태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는 자신 안에 두 법이 있는 곤고한 자입니다. (그에 반해 육에 속한 크리스찬은 항상 자기 자신이 실제 자신의 주인인 자입니다.)

"엔 크리스토",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는 성경의 신비의 극치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내 앞에서 행하라”는 말씀이 성취된 모습이며 사도 바울이 “Live in the Spirit, Walk in the Spirit", 즉 성령 안에서 거하고 성령 안에서 행하라는 권면의 의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나타나는 증거인 성령의 열매, 즉 신의 성품을 기준으로 언제나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검증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점검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깊은 회개로 다시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는 은혜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념적인 또는 종교적인 상징적 표현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에게 나타나는 실제 상황인 것입니다.

이렇게 답글을 마치면서 필립님이 언급하신 “유사 열매”라는 표현에 감사를 드립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한 서구 주류 기독교의 오류를 이 표현 하나로 명확하게 묘사해주셨습니다. 이어지는 우리들의 기고문에서 또 뵙겠습니다.

이어서 기고할 글은 “대화 II - 대상에 따라 다른 계시”입니다. 육에 속한 크리스찬을 향한 말씀과 새로운 피조물이 된 크리스찬을 향한 말씀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으므로 구별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내용의 대화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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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12-22 06:33:23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읽고 자신의 신앙을 다시 점검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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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8.143)
2013-12-19 10:46:55
내가 곧 예수입니다. 예수의 제자를 넘어서...
........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
3.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4.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마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
7.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11.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13.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15.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
17.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좋은 글 열심히 묵상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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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125.152.3.160)
2013-12-19 20:10:35
포이멘님께
포이멘님은 우리와 성경 해석이 좀 다른 분이란 것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성경 해석이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격려하고 서로 위로하며
상대방이 걸어 가는 진리의 길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다른 길을 걷는다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걷는 길이라면
서로를 축복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서로가 상대방의 성경 해석에서 귀한 힌트를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항상 따뜻한 댓글을 달아주시는 포이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포이멘님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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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12-18 13:04:13
참 혼란스럽습니다.
인간의 믿음과 그리스도의 믿음.
인간의 믿음은 새피조물로 만들어주신다는 그 말씀을 믿는 것. 이것으로 의롭다고 간주는 하지만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져야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그 증거로 의의 열매가 나타난다.

제가 지금까지 알고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져야한다. 물론 이것도 성령께서 역사하시겠지만...

문제는 내가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의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하셨지만 그 열매의 양을 보아야합니까 아니면 질을 보아야 합니까?
인간의 믿음을 가진 자는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강지성 형제가 맨 마지막에 한 말 가운데 "그런 모습이 우리 삶에 나타날 때 감사의 기도를, 나타나지 않을 때 회개의 기도를 통해서 더욱 새로운 피조물의 삶으로 나타나기를 간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라 생각합니다."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진 자가 그렇다는 말인 듯한데 그 또한 인간의 믿음을 가진 자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실 때 그 믿음은 첫째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요 둘째 우리 믿음의 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하는 믿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리스도의 믿음이며 이 둘은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한다 하여 인간의 믿음만 가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자칭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졌다하여 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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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2-19 07:00:34
필립님에게 드리는 답글입니다.
필립님께서 혼란스럽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 또한 모두 주류 기독교를 거친 사람들이고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이와 관련해 많은 대화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먼저 주류 기독교의 입장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루터의 소위 이신칭의론은 크리스찬의 현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론입니다. 이신칭의론은 종말 이후 최후 심판의 자리에서 적용될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크리스찬의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칼빈이나 웨슬리의 구원론과 맞지 않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되지만 누가 예정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고 웨슬리는 믿음의 결단으로 구원을 얻게 되지만 배교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결국 이신칭의론은 구원을 확신할 수 없는 크리스찬의 현실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 되지요. 사도 바울 또한 자신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고 있다(고전9:27)고 했으니 칼빈과 웨슬리의 주장은 성경적으로도 옳다 하겠습니다. 오로지 현장의 크리스찬들만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자신들이 속한 교단의 신학과 다른 말들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찬의 현실의 삶은 어찌 되는 것일까요? 율법의 행위를 스스로 추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주류 기독교가 그토록 배척하고 있는 율법주의이고 오늘날의 용어로 기독교 윤리학입니다. 대단히 모순되어 있지요? 이러한 혼란은 소위 이신칭의론이 크리스찬의 현실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이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내용에 대한 해석이 입장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오늘날 진보기독교와 보수기독교의 충돌에서 보듯이 서로가 입으로는 율법과 기독교 윤리학과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서 실제 행동은 각자가 지지하는 세상 풍속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2. 다음으로 우리의 입장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구원의 약속이 현세 구원의 약속과 내세 구원의 약속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1) 먼저 내세 구원의 약속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구원의 확신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인식합니다. 칼빈과 웨슬리의 주장과 동일한 입장이지요. 사람이 믿어봐야 얼마나 믿을 것이며 사람이 선행을 해봐야 얼마나 선행을 할 것이며 또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봐야 얼마나 변화되겠습니까. 모두가 도토리 키재기일 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의 커트라인을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신이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푯대를 향해 달려갈 뿐이라고 한 말씀(빌3:12-14)을 중시합니다. 우리는 최후 심판의 자리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2) 현세 구원의 약속의 핵심은 새로운 피조물로의 재탄생과 그들이 세우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입니다. 옛 언약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후손을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정하고 율법을 제시하며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그에 따른 상벌을 제시하신 약속이었던 데에 반해 새 언약은 누구든 새 언약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율법을 그 마음속에 심어주어(렘31:33)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세우게 하신다는 약속으로 우리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요3:3-15)이고 사도 바울이 증언한 육에 속한 자(싸르키코스)로부터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로의 신비한 재탄생이며 그러한 신비한 은혜를 입은 자들이 모여 예수님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약속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재탄생의 실제 과정은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해야 진행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검증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필립님의 질문도 이와 관련된 질문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 재탄생의 실제 과정 : 복음을 듣고 인간의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회개를 시작하는 것이 첫 과정입니다. 그 회개의 핵심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세우려는 죄악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깨닫고 (그것이 왜 죄악된 동기인지는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죄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음 기고문에서 상술할 예정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 위한 생각과 행동만 하기로 결단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후에 상술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회개하며 결단한 자에게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믿음, 신실함, 충성 등으로 번역되나 헬라어 피스티스가 히브리어 에무나의 번역이라는 점에서 그 주된 의미는 신실함으로 보아야 함)가 임하면서 프뉴마티코스, 즉 영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됩니다(갈3:23-25). 율법이 완성된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더라도 육을 가진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수시로 옛사람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어지는 반복 심화된 회개로 점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성숙한 새로운 피조물로 성장하게 되지만 이 땅에서 완전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는 못하는 것으로 우리는 인식합니다.

이러한 불완전한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여 서로를 섬기고 권면하며 종노릇하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이루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외부인들을 향해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어 우리와 같은 삶을 살기를 권합니다. 증인들이 행하는 전도지요.

나. 재탄생의 검증 : 새로운 피조물과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는 언제나 스스로를 검증(도키모스, 시험 확증 등으로 번역됨)해 나가야 합니다. 여전히 육을 가진 연약한 존재들이므로 수시로 개인도 잠이 들 수도 있고 공동체 전체가 잠이 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검증의 구체적인 기준은 바로 성령의 열매(갈5:22-23)의 아홉 가지 특징들입니다. 이 아홉 가지 특징을 주류 기독교에서는 성숙한 인성(싸르크스, 육체-flesh 또는 죄성-sinful nature 등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human nature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신의 성품(벧후1:4-7)으로 인식합니다.

성령의 열매의 아홉 가지 특징들이 구체적인 검증의 기준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아홉 가지 단어의 성경적인 의미를 먼저 정확히 해야 합니다. 이 아홉 가지 단어는 세속 헬라어 단어들 중에서 채택된 단어들이므로 그 의미의 해석에 극히 신중해야 하는 것이지요. (성령의 열매의 특징들 중 희락으로 번역된 카라는 K-pop 걸그룹의 이름 카라와 동일한 헬라어 단어라는 점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3)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로마서 3장 22절의 “디아 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KJV는 이를 “by faith of Jesus Christ”로, 그러나 NKJ는 이를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번역진이 그렇게 개정할 때에 그 고민이 얼마나 컸을까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논쟁이 바로 193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 중인 “피스티스 논쟁”입니다. 한국 주류 신학계는 지금도 아예 논쟁 자체를 회피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논쟁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이 구절을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번역한 자는 루터였다는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루터도 디모데전서 3장 13절 등의 “엔 피스테이 테 엔 크리스투 예수”라는 명확한 헬라어는 어쩔 수가 없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지요. 루터가 로마서 3장 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처음으로 번역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참으로 미스테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짐작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루터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확인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긴 답글이지만 중간에 말씀드린 대로 답글의 성격상 어쩔 수 없이 생략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우리의 기고문들도 계속해서 읽어보시기를 필립님에게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함께 어깨동무하고 치열하게 진리를 찾아가는 일만큼 아름답고 보람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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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12-20 02:13:36
답글에 감사드리며
용호 형제의 신학에서 중요한 것 하나가 인간의 믿음과 그리스도의 믿음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를 원하는 것은 정확히 말하여 인간의 믿음이 무엇인가입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하여는 용호 형제께서 설명해 주셔서 이해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번역상의 문제도 지적하셨는데 사실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살펴본 바 용호 형제의 말씀이 옳은 것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나름대로 믿음을 갖고 있기에 인간의 믿음이라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과 기독교 안에서 용호 형제가 말씀하시는 인간의 믿음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을 할 수 있는대로 설명해 주시면 다음의 논의가 더 잘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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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2-20 07:13:51
반가운 답글 감사합니다.
저는 필립님이 혹시 기존 교리를 무조건 고집하시는 분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더 이상 대화가 어려울 텐데.... 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찾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저의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지난한 길에서 열린 마음으로 서로 의견을 나누며 같이 갈 수 있는 분들을 만난다는 것은 다른 아무 것에도 비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항상 의견이 일치될 수만은 있겠습니까. 때로는 의견이 다르더라도 서로 격려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믿음, 신실함, 미쁘심, 충성 등으로 번역되는 피스티스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이해합니다. faith of God, 즉 하나님의 미쁘심(롬3:3)이지요. 그에 비해 인간의 속성은 '신실치 못함'입니다. 성경의 구원의 약속의 한 단면이 바로 신실치 못한 자를 신실한 자로 재창조하는 것으로 우리는 인식합니다.

인간이 신실치 못한 이유는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세우는, 즉 자신(들)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는 본능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신실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신실치 못하고 이웃에게도 신실치 못한 것이 성경에서 지적하시는 인간의 죄의 한 단면인 것이지요. 따라서 그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신실함을 부어주시는 것이 구원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한 믿음(신실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논리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의 구원론이나 개신교의 구원론과 같은 비논리적인 구원론이 나오게 된 이유를 우리는 아브라함의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한 믿음(신실함)에 대한 성경의 서술에 대해 서구 기독교가 크게 오해한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약속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될 후손을 낳을 아내 사라를 오로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두 차례나 포기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실치 못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들이지요.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신실치 못한 아브라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이 의롭다고 "간주함(로기조마이, imputation)"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다음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신약 백성에게 장차 부어질 그리스도의 피스티스(신실함, 믿음)가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인간의 피스티스는 믿음직스럽지 못하나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아 신실한 자로 변화되는 신비한 일이 시작되는 단초가 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빋는 과정으로까지 진행되지 못하고 인간의 피스티스에 머무르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버린다면 이는 성경의 약속을 모독하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쉽지만 이 정도에서 필립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려고 합니다. 계속 이어질 우리의 기고문들에서 또 뵙고 진지한 의견을 함께 나누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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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12-20 08:14:25
인간의 믿음이란
답글에 감사드리며 계속 질문을 드립니다.

그러면 용호 형제께서 말씀하시는 인간의 믿음이란 인간 자체에서 발생하는 믿음이군요. 아브라함의 믿음까지도.
그러면 엡2: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에서 믿음이란 혹 그리스도의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롬1: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 중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에서 전자는 누구의 믿음을 가리킵니까?
물론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기 때문에 용호 형제는 어떤 해석을 하시는지 알지 못하여 그냥 저의 생각대로 물어봅니다.
또한 세번째 믿음은 무슨 믿음인지요?

저는 지금까지 성경에서 대부분의 인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있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있기에 이 "믿음"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으면 우리의 대화가 헛돌 것이라 생각하여 어려운 질문을 드립니다.
이에 대하여 용호 형제가 대답하심은 형제와 저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도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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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2-20 09:24:47
.
엡2:7 - 그렇습니다.

롬1:17 - "에크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구절입니다. KJV의 from faith to faith 가 헬라어의 직역인데 B 피스티스로부터 나와서 A 피스티스로 이르게 된다는 표현입니다. B 피스티스는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로, 그리고 A 피스티스는 인간에게 성취되는 피스티스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세 번째 언급된 피스티스가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구절은 하박국 2장 4절 말씀을 사도 바울이 인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묘하게도 하박국 이 말씀은 우리가 보는 히브리어 성경인 맛소라 사본에서는 "그의 에무나(믿음,신실함)로 살리라", 즉 "의인 자신의 신실함으로 살리라"인데 반해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은 "나의 피스티스(믿음, 신실함)로 살리라", 즉 "하나님의 피스티스로 살리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세 곳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소유격을 모두 생략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하나님의 피스티스로 살게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피스티스로 살게 되는 것일까요.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어 의인이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온전히 받게 되었다면 소유격은 무의미해지지요. 같은 피스티스(믿음, 신실함)이 이미 되었으니까요. 사도 바울이 소유격을 생략해버린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고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인간의 피스티스와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원이라는 헬라어 단어 소테리아가 "안전한 곳으로의 이동"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인 것처럼 성경의 구원의 약속은 실제적인 "변화"를 약속하신 것이고 그 변화는 반드시 입증되어야 하는 것으로 우리는 인식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믿음, 신실함)을 가지게 되는 변화도 구원의 중요한 한 측면인 것이지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특성에 피스티스(충성으로 번역)가 들어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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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12-21 10:10:28
지금 용호 형제께서 인간의 믿음과 그리스도의 믿음을 명확히 구분하시는데 어떤 점에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과 관련한 믿음, 예를들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앞서 댓글에서도 말씀드렸고 용호 형제도 말씀하신 것처럼 어느 믿음이든지 완전한 선을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맺는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 어느 믿음을 가지든지, 어쩌면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진 자보다도 더 인간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는 성령의 열매라고 부를 수 없는 유사 열매이겠지요. 외형상 그렇다는 말입니다.

댓글에서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어 의인이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온전히 받게 되었다면 소유격은 무의미해지지요. 같은 피스티스(믿음, 신실함)이 이미 되었으니까요.”라고 하셨는데 온전히 받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어떻게 확인 혹은 확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이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용호 형제의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큰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만약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면 성경에서의 인간의 믿음(비록 용호 형제가 그렇게 지적하더라도)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온전히 받았다고 해도 반박하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이가 잘못된 행위를 할 때(이 자가 인간의 믿음을 가진 자인지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진 자인지 알 수 없으나, 또 비록 인간의 믿음을 가졌다할지라도 복음을 받아들인 자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져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진 자도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잘못에 대하여 뉘우치고 돌아오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여깁니다.

아무튼 그저 저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들을 두서없이 올린 것이니 용호 형제에게 유익한대로 쓰이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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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2-22 06:02:43
답글의 길어져 위에 올렸습니다.
포이멘님의 댓글 바로 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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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2-20 09:38:36
덧붙여
엡2:7의 선물은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피스티스(믿음)을 가리킵니다. 왜냐 하면 "구원을 받았으니"는 헬라어 원문에서 동사로 쓰인 부분이기 때문에 대명사 "이것"으로 가리킴을 받을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선물로 받은 것은 피스티스이지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은 피스티스를 선물로 받은 결과가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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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2-20 07:19:36
덧붙여
이와 관련해 가톨릭의 "의의 주입(infusion)" 교리와 개신교의 "의의 전가(imputatio)" 교리를 비교해 보시면 많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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