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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인간론과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성경의 계시를 헬라 철학에서 해방시키자
김용호  |  yhchorakd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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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12월 08일 (일) 04:10:51
최종편집 : 2013년 12월 08일 (일) 18:01:13 [조회수 : 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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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인간론과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들어가며

제가 일 년전쯤 다음 블로그 "목탁소리"의 방명록에 올린 인사글을 먼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한 달간 이곳 "목탁소리"에서 법상 스님의 귀한 가르침을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기독교의 한 작은 신앙공동체의 설교자랍니다. 벌써 50대 후반이네요.

저는 20대에 불교를 먼저 거쳤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 제가 불교의 깊은 경지에 도달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군 제대후 출가를 하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서울대 국사학과에 진학해 불교사학자가 되고자 공부를 했으니 주변을 맴 돈 정도라고나 할까요.

우여곡절 끝에 40대 초반에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게 된 이후 제가 발견하게 된 것은 "인간론"에 있어서의 불경과 성경의 일치였습니다. 삼법인, 즉 일체개고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는 성경의 인간론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물론 문제 해결의 접근은 다르지요.) 그러나 기존의 서구 신학에서는 누구도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았지요. 엉뚱하게도 현세의 삶을 찬양하는 방향으로 일관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탈세속적인 수도원주의적 성경 해석도 본질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현세 긍정적인 헬라 철학이 서구 신학을 독점한 결과 발생한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들어와 성경의 인간론을 나름대로 정리하는 시점에서 불교의 인간론을 더 깊이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요점을 명료하게 설파하신 법상 스님의 글들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한 달간 정독하면서 참으로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만약 성경의 인간론에 대한 저서를 출판하게 된다면 법상 스님께 드리는 감사의 말씀을 꼭 머릿말에 넣도록 하겠습니다.

새 글이 올라올 때마다 계속 정독하겠습니다.

기독교 설교자 해방 올림"

 

성경은 히브리인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신약 성경의 경우는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헬라 철학적 요소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 바울이 아덴(아테네)을 방문해 에비구레오(에피큐로스학파) 철학자들과 스도이고(스토익학파) 철학자들로 더불어 쟁론할 때 의사소통에조차 실패하는 장면에서 확인되듯이 신약 성경이 계시하는 진리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해서 헬라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할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에피큐로스학파와 스토익학파는 헬라 철학 중 윤리학의 대표적인 두 흐름이고 이후 서구 윤리학의 양대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바로 쾌락주의와 금욕주의지요. 에피큐리아니즘은 저급한 향락주의인 hedonism과는 다른 윤리학의 한 흐름인 바,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얻는 방법으로서 윤리도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오히려 그 이후 기독교 신학이 수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로부터 시작해서 이후 성경 해석을 담당한 자들이 모두 헬라 문명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히 추앙하고 있는 어거스틴(A.D. 354-430)을 꼽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 이후의 로마 가톨릭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개신교 신학자들까지 그 누구도 헬라 철학을 성경 해석의 기반으로 삼지 않은 자들은 없었습니다.

헬라 철학의 본질은 현세 긍정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하나님이 조금만 옆에서 도와 주시면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기복주의 기독교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주의 기독교입니다. 무한한 인간 긍정이자 현실 긍정이지요.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관심은 오직 내세 구원으로만 맞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개인 차원의 현세 구원의 약속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공동체 차원의 현세 구원의 약속을 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인간론의 오류가 구원론의 오류로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간론은 서구 주류 신학이 주장하는 인간론과 다릅니다. 그들은 인간의 죄를 도덕성의 문제로 파악하나 성경은 인간을 어두움의 시스템 속에 갇힌 존재로 규정합니다. 그들은 믿음과 윤리적 선행을 주장하나 성경은 인간 존재의 재창조를 약속합니다.

이러한 서구 기독교의 오류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한 성경의 규정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함에서 출발합니다. 바로 헬라 철학적 인식 체계가 가지고 있는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요. 이에 반해 불교 철학의 인식 체계, 더 넓게는 동양 철학의 인식 체계는 성경의 인간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안목을 제공합니다. 바로 현세 부정의 인식입니다.

불교의 해탈과 피안, 도교의 달관과 선계의 개념이 바로 그것으로서 현세를 초월하는 방향의 제시이며 이는 부정적 인간론을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오는 것과 같은 논리 체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히브리 문명은 아시아 문명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가 불교의 진리와 궤를 같이 한다고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는 인간 문명의 한 종류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를 서구 주류 기독교가 헬라 철학에 편중된 방법론으로 접근하면서 본질적인 차원에서 오류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제는 불교 철학적인 방법론으로도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간론과 삼법인의 비교

 그 한 시도로써 불교의 삼법인을 성경의 인간론과 대조해 보고자 합니다. 서구 주류 신학이 보지 못한 성경의 인간론을 새롭게 발견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의 삼법인은 인간 존재와 상황에 대한 불교의 근본적인 설명입니다.

삼법인(三法印) : 세 개의 진리의 도장. 이에 어긋나면 불교의 진리가 아닌 이단 요설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임.

1. 일체개고(一切皆苦) : 모든 것은 고통이다. 이 고통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알지 못하는 무명에서 비롯된다.

2. 제행무상(諸行無常) : 모든 상황은 변화하는 것으로서 항상성이 없다. (시간적 차원에서의 無, 空)

3. 제법무아(諸法無我) : 모든 존재는 변화하는 것으로서 실체가 없다. (공간적 차원에서의 無, 空) (法으로 번역된 Dharma는 진리, 그리고 존재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

4. 열반적정(涅槃寂靜) :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깨닫고 해탈하여 이르게 되는 존재 차원의 고요한 평안 상태 (열반적정은 대승불교에서 제시하는 것으로서 일체개고를 대치하여 삼법인으로, 또는 삼법인에 추가하여 사법인으로 제시하기도 함. 열반은 Nirvana의 음역으로 불을 꺼버린 상태의 의미이며 적정과 동의어임)

이 삼법인의 각 항목에 대표적인 성경 몇 요절들을 견주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일체개고(一切皆苦)

 (창 3:16-19)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전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 제행무상(諸行無常)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3. 제법무아(諸法無我)

 (시 103:14-16)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4. 열반적정(涅槃寂靜)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상에서 보듯 성경의 인간론은 헬라 철학으로 성경을 해석한 서구 주류 신학이 말하는 도덕의 문제도 아니고 상황의 문제도 아니며 이는 존재 차원의 문제이자 빛과 어두움으로 대조되는 소속된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결로써 제시되는 하나님의 나라로의 이동은 그 논리적 구조에 있어서 불교의 도피안(到彼岸)과 동일하다고 하겠습니다. 즉 실제적인 공간 또는 시스템의 이동인 것이지요. 아래의 말씀들이 그것을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요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나가며

성경의 인간론과 불교의 삼법인이 같은 개념과 논리를 가졌다고 해서 성경의 진리와 불교의 진리를 동일선상에 놓고 접근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약속의 핵심인 구원론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구원론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핵심이나 불교는 각자의 깨달음과 수도 정진을 핵심으로 제시하는 것이지요. 그 결과물인 하나님의 나라와 피안도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와 불교가 진리를 공유하는 관계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인간론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는 불교의 삼법인을 중심으로 한 부정적 인간론이 헬라 철학의 긍정적 인간론보다 유용한 도구라는 점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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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12-11 08:01:32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답변
용호 형제님 감사합니다.

먼저 왜 하필 불교 철학이냐가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헬라 철학을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호 형제가 나름 헬라 철학의 영향이 잘못되었다고 할 때 불교 철학의 영향도 잘못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대로 성경으로 풀자고 제안하는 것이며 이것은 단순히 멋진 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죄와 함께 행함에 대하여 지적하셨는데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
다만 저는 어떤 이들은 죄에 대하여 관념적으로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리고 단순히 윤리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몰라도 제가 지금까지 배운 것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지금도 생활 속에서 고민하는 것이 오늘도 야고보서2장을 읽으면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과 형제에게 말로만 평안히 가라고 하였던, 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이런 것들을 윤리적으로 말하고 가르치지만 내가 그를 어겼을 때 단순히 그런 윤리적인 차원에서 가슴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지 못해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윤리 이상으로 하나님의 말씀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말씀하셨는데 '모든 것을 참으며'의 의미를 깊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참으시며(온갖 허물 투성이 우리를 품으시며)'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이 말씀을 우리는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온전한 사랑을 할 수는 없을지라도 늘 그 말씀을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행하지 못했을 때 말씀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바른 믿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합니다.
정직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정직한 답변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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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호 (115.178.71.101)
2013-12-11 12:59:0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참으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이 있을까요 ?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지 못해서 고통을 받았던 루터는 그래서 오직 믿음을 주장했지만 그것이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지금 바로 필립임님이 가슴 아파함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의 개인적은 경험은 사랑하지 못해서 고통받는 그런 수준은 아니었고 나에게 먹고 사는 문제로 미래가 불확실해졌을 때 나에게 온 불안과 공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목숨까지 나를 위해 아끼지 않으셨다는 것을 머릿속으로 수백번 외치고 발버둥쳐도 마음까지 그 믿음이 오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고통을 겪었습니다. 인간의 믿음 만으로는 해결이 안되더군요. 제 믿음이 약했던 걸까요 ? 그 믿음은 얼마나 커야 가능할까요 ? 그 믿음은 어디서 올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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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12-11 13:18:55
200% 동감하는 말씀입니다.
나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을 가끔 잊기 때문에 고통이 더 심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의 믿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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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호 (115.178.71.101)
2013-12-12 11:53:28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기존 기독교의 이신칭의가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데로 나아가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는데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해당하는 것이 회개,하나님께 대한 신앙,세례,안수,부활,영원한 심판입니다. 즉 기존 기독교 교리 전체입니다. 이것을 떠나서 완전한 데로 나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지금 교회에서 밝혀주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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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4-03-04 04:50:40
느낌
지금 교회에서 밝혀주지 못한다고 느끼는 이유가 여러가지겠지요.
그러나 기존 기독교의 전체 교리 가운데 하나가 빠져있네요.
성화!
사실 교회가 이 부분에 취약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 기독교 교리가 성화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님의 느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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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12-13 01:57:24
제가 200% 동감하는 부분도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불만과 불평이 있을 때 과연 내가 참 맏음을 갖고 있는가 의심하는 것입니다.
머리 속에서 이론적이고도 지식적인 믿음이 가슴에 와 닿지 않을 때 더욱 그러합니다.
이신칭의가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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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호 (119.207.120.38)
2013-12-14 09:38:27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복이 등장하는 혼인잔치 비유가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혼인잔치에 초대되었다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예복을 입는 것 까지 우리 신앙의 진도가 나가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아니 과거의 저는 초대받았다는 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다가 그런 상황에서 내가 예복을 입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구요. 그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가능한게 아니고 오로지 신비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가 성령의 강림과 충만에 의해서 예수님처럼 우리도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해야만 자원하는 마음으로 말씀대로 사람을 사랑할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안식과 평안을 유지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겠지요. 물론 나의 죄악된 본성이 그것을 방해할 때마다 다시 깨어있기를 회개하고 간구하면서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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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2-11 05:34:41
"왜 하필 불교냐?"라고 묻는 분들께 드리는 답변입니다.
불교는 윤회와 관련해서는 종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론에 있어서는 철학입니다. (아미타불과 극락 정토는 초기 불교 이후에 추가된 종교적 요소입니다. 기독교인인 제가 이것을 두고 불교의 타락이니 아니니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필 불교 철학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느냐는 분들께는 하필 헬라 철학을 동원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묻고 싶습니다.

헬라 철학이든 불교 철학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동원해야 할 도구들입니다. 그리고 이 도구들이 없으면 우리는 아예 성경 독해가 불가능합니다. 성경의 각 단어들이 모두 세속 철학적 개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구요?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일부 진보 기독교인들은 저를 보고 웃겠지만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계시이긴 한데 인간의 세속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로 이끌려 올라가 인간의 말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고백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던 천박한 히브리 노예들의 일상 언어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구약 성경은 사변적이고 향락적인 헬라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유명한 걸그룹의 이름인 "카라"는 성경에서는 성령의 열매 "희락"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같은 단어, 다른 뜻의 예입니다. 희락이라는 한글 단어 또한 마찬가지지요. 유교 문화에서 생성한 단어입니다.)

우리는 동원 가능한 모든 인간의 사고 체계와 관념 체계를 동원해 다양한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로지 자신이 속한 문화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 하필 불교냐?"라는 질문에는 "왜 하필 헬라 철학입니까?"라는 대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이란 단어의 경우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소위 사랑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씀에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기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고 고정 관념의 함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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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2-11 04:52:03
필립 임 님께
필립 임님께 드리는 답변입니다.

"독해"에 대한 이야기로 답변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의 독해는 개인의 경험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이 어떤한 것이었는가에 따라 독해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이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에 성경을 접한 우리 조상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죄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당연히 삼강오륜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에서 모이코이와 모이칼리데스, 즉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을 제가 확인한 바로는 오로지 개역 성경과 개역개정 성경만 "간음하는 여자들이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각종 영역본들과 라틴어 성경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본어, 중국어 성경까지 남녀를 같이 언급하는데 말이지요. 괴이한 일이지요?)

오늘날의 우리는 어떨까요? 국민윤리 시간에 배운 현대인의 윤리 도덕 항목들과 휴머니즘 강령들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성경을 읽고 어떤 이들은 국민 윤리 조항에 따라 조국을 위해 반공과 친미를 외치는 보수 기독교인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휴머니즘을 따라 조국을 넘어선 인류 보편의 가치를 주장하며 진보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리고는 같은 성경책을 들고 시청 앞에서 교대로 다른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란 무엇일까요? 초대 교회 교부들과 어거스틴, 그리고 어거스틴 이후의 서구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를 어떤 죄로 인식했을까요? 초대 교회 교부들의 인식에 대해서는 제가 일일이 확인하지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어거스틴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의 주류 신학자들은 헬라 철학의 지류인 서구 윤리학이 규정하는 죄를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로 인식해왔습니다. 물론 거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라는 관념적인 죄를 항상 같이 끼워 넣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느냐구요?
기독교 윤리학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필립 임님께는 성경으로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것을 제시하셨는데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킬빈도 "성경으로 성경을 자증하게 하라"는 멋진 말을 했지만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어 하나하나부터 이미 자신이 속한 문화와 전통에 따라 그 의미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립 임님의 댓글을 보면서 다음에는 "죄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을 기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서구 주류 신학은 가톨릭 신학과 개신교의 칼빈 신학, 웨슬리 신학을 가리킨다는 말씀으로 답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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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2-11 06:18:24
덧붙이는 말씀입니다.
제가 위 댓글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를 관념적인 죄라고 말씀드린 것에 대해 추가적인 설명을 해드릴 필요를 느낍니다.

성경은 우리가 받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피스티스, 신실함)이 우리의 현실의 삶에서 입증(도키모스, 시험, 확증, test & proove)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처음 번역한 자는 루터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KJV은 루터와 달리 전통적인 번역대로 faith of Jesus Chris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도 디모데전서 3장 13절의 "피스테이 테 엔 크리스투 예수"라는 분명한 표현까지는 어쩔 수 없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서구 주류 신학은 구원론 중 구원의 여정(Ordo Salutis)에서 성화를 다루면서 신자들이 받은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윤리도덕적인 삶으로 입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소위 기독교 윤리학의 기반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연히 신자들의 현실과는 무관한 종교의 일이 되어버립니다. 현실의 삶은 세속 윤리 도덕을 추종할 것을 가르치기기 때문이지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공동체 이기적인 윤리 도덕 대신에 휴머니즘을 추종하기를 권하는 그룹이 생겨나는 바람에 보수 기독교와 진보 기독교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틈을 비집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충성하는 것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교회 우상주의, 방언 등의 은사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왜곡된 신비주의인 은사 운동 등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만 주류 서구 신학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는 관념적인 죄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참고로 우리의 입장을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은 자는 성령의 열매가 맺힌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되며 그 새로운 피조물은 현실에서 의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삶으로 그 존재의 변화를 입증할 수 있는 자라고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의의 종으로 산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삶이냐의 문제가 또 뒤따르겠지요? 계속 기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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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12-10 04:56:50
몇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서구 기독교 신학이 수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헬라 철학을 기반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헬라 철학이 인간 긍정, 현세 긍정인데 성경은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기독교 자체가 지금도 서구 기독교 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전제에서 저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몇 가지 서적을 읽을 때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내용의 글은 읽었지만 현세 긍정적인 글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 순복음의 경우 긍정의 힘을 강조하고 있는데 정통적인 서구 신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한국의 무속적인 사상에 더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미국의 조엘 오스틴 같은 부류들도 서구의 정통적인 신학 사상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고 생각합니다.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그런 부류의 목회자들은 한국에서 정통의 겉포장을 하고 있는 것이지 실제는 전혀 아니지요.

신학이 정립될 때 헬라 철학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제가 배우고 믿는 기독교 내에서는 인간에 대하여 본성이 죄로 가득하지 전혀 선함은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서구 주류 기독교 신학 전체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잘못된 신학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수정하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덧붙여 서구 주류 신학은 무엇을 가리키는지요?


이제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서구 신학이 잘못된 것을 불교의 철학 특히 삼법인으로 서구 신학을 재정립한다는 것은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비록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같다고는 하지만 이미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너머 사상적인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용호 형제가 말하는 근본 구원론이 달라지게 됩니다. 미묘하지만 비슷한 것 같은 인간론에 대하여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불교 철학을 차용한다면 똑같은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성경 자체를 더 연구하고 성경으로 성경 말씀을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왜 세상 철학에 의지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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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호 (115.178.71.101)
2013-12-10 11:38:31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두 분의 글을 이해할 수 있겠네요. 성경의 구원을 죄인에서 의인으로의 변화라고 했을 때 죄인의 속성은 무엇이고 의인의 속성은 무엇인지 그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필립임님의 말씀처럼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예배 시작때 회개기도부터 하고 예배가 진행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리고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교회도 자신들이 얼마나 탐욕이 많은 가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적어도 자기 삶이 윤리 도덕적이지 못한 것은 자기 양심에 비추어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가 자기 선악관을 가짐으로써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두가지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 형벌은 사망이 주어지므로 죽지 않을려고 발버둥치게 되고 이 땅에서 먹고 사느라 고통가운데 수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벌이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인간의 삶은 그 형벌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구원도 당연히 이런 인간의 실존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구요.
그런데 지금 교회들이 말로는 죄인임을 고백하지만 이런 존재 자체의 회개가 아니라 윤리 도덕적인 회개에 머물게 되고 그런 회개는 늘 반복되지만 존재의 해방에서 오는 새로운 삶은 보이지 않는거 같습니다.
정통 기독교가 아무리 인간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인간 부정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결과로 나타난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이 현재 이 땅에서의 삶을 더 가치있고 의미있게 만드는 쪽으로 설정되어 있다면 그건 현세의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과 다름 아니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네요. 보다 인간다운 인간, 착한 인간, 그래서 이 세상을 더욱 밝고 맑게 하는 것을 교회가 지향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과도 모순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것을 내가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모습은 뭔가 다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크리스찬 말고도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 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맡기도 크리스찬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신다는 것인지 그래서 구원받은 인간이 존재 차원에서 어떻게 삶이 변한다는 것인지에 집중해야하지 않나 해서 드리는 말씀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용호님의 다음 글을 저는 기대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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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8.143)
2013-12-09 23:38:15
(요한복음 10장)
33. 유다인들은 "당신이 좋은 일을 했는데 우리가 왜 돌을 들겠소? 당신이 하느님을 모독했으니까 그러는 것이오. 당신은 한갓 사람이면서 하느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소?" 하고 대들었다.
34.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율법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
35. 이렇게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


(시편 82편)
1.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2.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3.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4.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5.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7.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8.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
21.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2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주시고 아버지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6.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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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2-10 04:13:22
포이멘님의 반가운 댓글 감사합니다.
포이멘님께서 성경 요절 세 곳을 댓글로 달아주신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본 글에서 제가 언급한 헬라 철학의 인간 긍정의 폐해의 예를 포이멘님이 제시하신 세 요절을 적용해 말씀드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보수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신이라 불리우게 되는 조건 내지 삼위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조건으로 신앙 고백 또는 세례를 꼽습니다. 성경의 계시를 이처럼 대단히 가볍게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문제의 심각성을 대단히 가볍게 보기 때문입니다.

2. 진보 기독교는 대단히 무리하게, 또는 억지스럽게 이 세상 모든 인간에게 이 말씀들을 무조건 적용합니다. 휴머니즘을 그들의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진보 기독교는 성경에서 지적하시는 인간의 문제 자체에 아예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 요절들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신이라 불리우게 되는 조건 내지 삼위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조건으로 대단히 심각하고 신비한 조건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을 조건으로 제시하셨고, 요한복음 17장에서는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였으며"를 전제 조건으로,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와 "나도 그들 안에 있게"를 결과물로 계시하십니다.

시편 82편은 하나님으로부터 신들이며 지존자의 아들들로 불리운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지 않기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기에 심판의 대상이 될 뿐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공의와 정의의 내용과 예수님이 제시하신 조건들과 그 결과물들의 내용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 요절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신이라 불리웠음에도 불구하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지 않으면, 즉 예수님이 제시하신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고 결과물들이 열매로 나타나지 않으면 인간은 파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예수님이 제시하신 조건들과 열매들이 극한의 신비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휴머니스트가 되어 착하게 산다거나,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 조건들이 충족되는 것이 아니며 그 열매들이 맺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조건들이 충족되고 열매들이 맺힌 존재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해석합니다. 육에 속한 자(싸르키코스)에서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로 재창조된 자들이지요.

우리는 다음에 기고할 글들을 통해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의 현실적이고 동시에 신비한 속성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우리의 체험과 우리에게 맺히고 있는 열매들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다음 글에서 포이멘님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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