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고 사랑하고 기도하라] 비평 - <치코와 리타 Chico & Rita> 스페인/영국, 2010년, 하비에르 마리스칼, 페르난도 트루에바, 토노 에란도 감독작품
어제여 다시 한 번!: 낙엽처럼 내려오기.
할리우드나 디즈니,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따금 접해봤지만, 유럽 애니메이션을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영화 <치코와 리타>는 피아니스트와 가수의 애틋한 사랑을 묘사하는 음악영화이다. 신명나는 음악과 연인들의 ‘밀고당기기’는 듣는 재미와 보는 재미를 한껏 제공해준다. 게다가 투박하면서도 섬세한 화면은 낯설지만 관객들을 매료시키기에 부족하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90여분을 즐겼다.
“내가 바라는 건 다 과거에 있어.”‘리타’의 이 대사에 확 꽂혔다. 어쩌면 ‘치코’가 쓴 곡에도 그런 노랫말이 있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제여 다시 한 번!” 때마침 지난 주중에 읽던 책은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는데, 거기의 한 대목이 의식의 수면위로 떠올랐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보고 싶다. 어느 정도 인생을 달관한 것 같은 저자의 찰진 통찰력과 너그러운 마음씨가 돋보이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미래를 창백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사실 요사이 나는 지난 일들을 자주 떠올리고, 또 그것을 미화하는 짓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과거가 가장 찬란하게 미화되는 곳이 아마 감옥일 것입니다. 감옥에는 과거가 각박한 사람이 드뭅니다. 감옥을 견디기 위한 자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만 이 자위는 참혹한 환경에 놓인 생명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명 운동 그 자체라고 생각됩니다. 자위는 물론 엄한 자기성찰, 자기비판에 비하면 즉자적이고 감성적인 생명운동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그것이 갖는 의미와 필요에 대하여 너무 심하게 폄하할 생각이 없습니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파주: 돌베개, 1998], 59)
쿠바를 떠나 할리우드에서 꽤나 잘나가는 가수 리타에게 주변인들은 염려 섞인 질책은 이러하다. “이제 와서 망쳐선 안돼.” 그들에겐 어제보다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이 중요한 까닭이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들은 겁이 없다. 어디서든지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좀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종종 계단이라는 장애물을 대면하면 자신의 팔을 붙잡아 달라고 손짓한다. 자신의 키의 절반 높이가 되는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팔을 의지해 오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아, 다른 방법이 하나 더 있다. 기어오르는 거다. 이건 혼자서도 가능하다. 그렇다. 걷는 게 아직 미숙해도 홀로 올라갈 수는 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내려올 수는 없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니까.
웰빙보다 웰다잉이 더 어렵다고 환언해보면 어떨까. 잘 내려오는 법, 즉 잘 죽는 법은 어떤 걸까? 그것은 앞서 인용했듯이, 과거를 미화하고, 어제를 추억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나는 잘 살았다고, 헛되지 않았다고. 이것이 아름답지만 참혹한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편이 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