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통 장로가  천지개벽할 사건

하늘은 높고 어디론가 떠나기에 좋은 계절이다. 이 가을에 모처럼 타국에 있는 형제까지 다 모였다. 때가 좋은 계절인지라 함께 여행할 곳을 찾았다. 우리는 구순 노모를 모시고 효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마치 50년 만에 처음으로 광주에 사는 큰 언니가 아파트로 이사를 했기에 빛고을 광주로 결정했다. 오랜만에 남도의 맛 집과 볼거리를 생각하니 설렘도 따른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3시간 30분. 비록 거리는 낯설지만 태어난 곳인지라 그저 정겹기만 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사투리가 구수한 장맛처럼 맛깔스럽게 들린다.

죽설헌에서 만난 귀인

잠시 광주를 벗어나 나주에 있는 ‘죽설헌’으로 향했다. 우연히 TV에서 본 후, 남도 여행을 가면 꼭 한 번 방문해 보고 싶은 곳이었다. 이곳은 박태후 화가 개인 정원이다. 나지막한 구릉지에 수백종류의 나무와 꽃들이 자연과 더불어 숨어 있었다. 박화백이 40년 동안 자연 친화를 실천하며 혼을 담은 곳이기에 풀 한포기도 그의 한집안 식구로 보인다.

‘죽설헌’은 단정하게 정리된 서구식 정원이 아닌 ‘냅둬요!!’식 정원이다. 자생수종들을 심어 그대로 두면 이들이 자연을 정복하지 않고 자연과 하나를 이룬다 했다. 키 낮은 야생화들이 옹기종기 터를 잡고 살면서 적자생존(適者生存)하며 자연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여기저기에 아담한 연못도 눈에 띄었다. 수련과 연잎도 손님을 맞이하는 것 같다. 높은 감나무에서 떨어진 홍시가 붉은 속살을 들어내 놓고 널브러져 있다. 내 눈에는 그저 아깝게만 보인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 홍시 아닌가. 나도 모르게 주어서 꼴깍, 달콤함이 입 안 가득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형부들과 언니들은 탱자와 해당화 열매 앞에서 뱀의 유혹을 받는 것 같다. 둘 째 형부가 해당화 열매 효능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잠시 후 누군가 해당화 열매 하나를 따서 입에 넣었다.

‘그러면 그렇지, 장로 권사도 몸에 좋은 것은 그냥 지나 칠 수 없지!!’

정원 구석구석에 자연의 맛들이 숨겨져 있다. 나도 호두 한 알을 주었다. 과실들이 마치 동산 중앙의 선악과처럼 우리를 유혹했다.

산책이 끝난 후, 사모님의 후덕함으로 발효 녹차를 마시며 따끈한 대화도 나누었다. 비록 주인장이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창조주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사는 것 같아 그의 삶이 크게만 보였다. 자연을 대접하고 사는 사람이 드문 시대에 한 길 걸어온 자연인에게 감사하다. 나는 그냥 떠날 수 없어서 이곳을 위해 축복 기도를 심었다. 이 기도가 무성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면서.

남도에서 만난 맛

곧바로 자연 카페를 떠나 남도의 맛을 찾아갔다. 담양에서 유명한 청둥오리 집에서 저녁을 배부르게 채웠다. 역시 음식은 남도에서 즐겨야 하나보다. 모두가 남도의 푸짐하고 깊은 맛에 취했다. 음식 칭찬을 쏟아 놓으며 큰 언니 댁으로 향했다. 집 구경은 대충, 금 새 딸 다섯이 둘러앉았다. 옛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서로 접시를 깨느라 정신없다. 먼발치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어머니는 마냥 행복한 모습이다. 흥이 오고 가고 있을 때, 큰 형부가 와인 한 병을 내놓았다. 나는 놀라서 혼자 중얼거렸다.

“꼴통 장로가 천지개벽할 사건이네, 세상 오래살고 볼 일이야.”

모두가 덩달아 한마디씩 했다.
“이렇게 다 모였는데 와인 한 잔 합시다.”
“좋죠, 식 후 와인은 소화에도 좋고 혈액순환도 좋다죠.”
“와인은 한 번 따면 다 마셔야 된다던데”
“나는 절대로 술은 안 마셔”
“야, 성찬식도 포도주로 하잖아. 예수님도 가나 혼인잔치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었는데, 마셔도 괜찮아”

갑자기 와인 한 병을 놓고 신앙토론이 시작되었다. 나는 순간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형제 모두가 보수교단을 섬기는 장로 권사들 아닌가. 그러나 믿는 방식은 서로가 많이 다르다. 긴 세월 서로 다름이 각자를 힘들게 했지만, 이제는 다름 안에서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오직 복 받고 내 자식들 잘되고, 내 사업 잘되기 위한 기복신앙이 철저하게 뿌리내린 보수교단 교인들 아닌가. 같은 개신교인끼리도 진보와 보수의 골은 여전히 깊고도 멀기만 하다.

나는 얼른 화제를 바꾸어 내일 떠날 장소를 제안했다. 순창에 있는 ‘강천사’단풍이 내장산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정보를 말했다. 모두가 찬성하며 그곳으로 결정 했다. 다시 옛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강천사에서 만난 사람들

다음날 담양을 거쳐 순창에 있는 ‘강천사’에 도착했다. 단풍은 절정을 뽐내며 사람들을 방방곡곡(坊坊曲曲)에서 불러 모았다. 그야말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곳은 사람과 단풍이 어우러져 모두가 흥겹기만 하다. 단풍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얼굴은 이미 단풍에 물들어서 붉은색이 되었다. 어느 누구나 초대장 없이 올 수 있는 곳이기에 발 디딜 틈이 없나보다. 서로를 찾고 부르며 분주하지만, 자연이 주는 질서 앞에서 사람들은 점차 자연을 닮아 물이 흐르듯이 흘러갔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자연 속으로 들어갔지만, 자연은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모두를 공평하게 안아주었다. 빈부와 높고 낮음을 떠나 오직 자연의 잣대로 모두를 껴안아 주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자연의 공평함 앞에서 더욱 감탄했다.

단풍에 물든 오솔길은 끝없이 펼쳐졌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숲속 공기는 상큼하다. 이 모든 것들이 공짜라니 참 공평하신 하나님이다. 숨을 깊게 몰아쉬며 천연공기를 마음껏 마셨다. 산사에는 옹달샘이 흐르고 있었다. 다가가서 한바가지 떠 마셨다. 오장육부가 씻겨 내리는 것 같다. 이것도 자연이 그냥 주는 것이기에 거저먹었다. 언 듯 보니 꼴통 장로와 권사도 절간 물을 마시는 것 같다. 사찰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불 경시했던 사람들 아닌가.

인간은 한평생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연에게 진 빚이 많다. 여행기간에도 자연에서 거저 얻어먹고 다녔다. 자연이 인간에게 준 것을 돈으로 계산하면 어마어마한 액수가 될 것이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얻은 것을 생각하면 분명 자연은 인간의 스승이다. 아마도 평생 사람에게 빚진 것보다 자연에게 진 빚이 훨씬 많을 것이다. 나는 이 진리를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연을 훼손했을까? 감히 창조주의 것을 탐한 것 아닌가.


충정사에서 만난 열사

자연에서 거저 얻은 것들을 주워 담고 다음날 광주의 명산 ‘무등산’으로 향했다. 무등산은 여전히 지난 역사의 아픔을 안고 침묵하고 있었다. 최근에 이 아픔을 달래는 보상인지 몰라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충장 김덕령 사당에 들러 그 시대 의열사를 만났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격퇴시킨 의열사 김덕령 장군이다. 그러나 조선 선조임금 때나 현시대나 충직한 열사는 항상 역적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가 보다. 헌종 때 역적 누명이 벗겨져 신원(伸寃)되었지만, 고문으로 옥사하신분의 한을 어찌 달랠 수 있겠는가. 잠시 그분의 묘 앞에서 이 땅의 한 죄인으로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숙였다.

꼴통 장로 권사도 잠시 머리 숙여 무언가 중얼거린다. 행여 믿지 않고 억울하게 생을 다한 장군의 넋을 달래다가 귀신을 쫓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기도 했다.

잠시 후, 근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호수 생태원으로 갔다. 입구에서 잠시 벗어나니 광주호가 펼쳐졌다. 드높은 가을하늘색과 하나 되어 푸른 호수가 장관이다. 곳곳에 갈대숲이 습지를 살찌우며 방문객을 반겨 주었다. 이곳 또한 생태계 식물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군락(群落)을 이루었다.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공간으로 시민들 휴식처가 되어 공생하고 있었다. 산책코스마다 자연 친화가 정겹게 잘되어있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꼴통 장로님이 또 한마디 했다.
“오늘 저녁도 와인 한잔들 합시다.~~잉!!”

꼴통 장로도 며칠간 자연과 어우러져 친구가 되더니, 다시 어린아이 동심으로 돌아가나 보다. 사람이 이렇게 자연스러워지니 꼴통장로님 모습도 가을하늘처럼 드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