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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교우님들, 교회개혁의 주체로 나서 주십시오!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10월 6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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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10월 04일 (금) 11:14:31
최종편집 : 2013년 10월 05일 (토) 11:29:27 [조회수 : 3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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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일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우리 한국 교회의 개혁에 관한 저의 생각을 교우님들과 나누었습니다. 그 동안 이 주제로 글을 쓰면서 제가 제안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목회자 문제

2) 재정문제 특히 십일조와 목회자 납세 문제

3) 성서의 재해석과 배타교리 수정의 필요성

4) 예수님에 대한 재해석

5) 배타적 원시 유일신 신앙 극복

하지만 목회자들이 주도하는 교회개혁은 표피개혁에 머물 뿐 심층개혁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밥줄을 스스로 끊을 수도 있는 개혁의 중심문제에까지 망설임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교우님들의 참여가 절실한 이유입니다.



1. 열린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

“우린 나중에 절대로 저렇게 살지 말자!” 신학생 시절, 옳지 못한 일과 타협하거나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선배 목사들을 볼 때마다 동기생들과 울분을 토하며 다짐했던 말입니다. 그로부터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선배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동기 목사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도 떳떳하게 살아온 건 아닙니다. 제가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간은 지난 2004년 ‘학교 내 종교 자유’ 문제로 교단과 학교를 떠난 이후부터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까지는 저 역시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교단과 학교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 살았던 못난 목사였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타협의 길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교우님들께서 충분히 짐작하실 터이지만,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조금 더 자세하고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난주 주일편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대학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에도 예수님과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기 위한 저의 고뇌와 마음의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저의 신학을 어느 정도 정립하여 신앙적인 고민과 갈등이 거의 사라졌을 때는 목사가 되고 난 후에도 십여 년이 더 지나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문과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대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팎에서 배타적 교리와 공격적 선교로 인한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라고 마음속에서 수없이 고함을 쳤습니다. 하지만 막상 강단에 서면 교리가 정한 금단의 벽을 넘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에 찾아올 일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눈치를 보며 사는 것, 그것은 저 자신에 대해서는 경멸감을, 하나님 앞에서는 무력감을 갖게 하는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제자 아이가 일으킨 사건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학교와 교단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바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해야 할 말을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교단이 허용하는 선 안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2. 신학생들의 고민과 선택

제가 그랬던 것처럼, 목사안수를 받고 현장에 뛰어든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 가장 먼저 찾아와 괴롭히는 문제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부끄러움 없이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한국 교계의 현실입니다. 이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신학생 중 절반 정도가 겪게 되는 고뇌와 갈등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모든 신학생’이 아니라 ‘신학생 중 절반 정도’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른바 ‘보수정통’을 자처하는 교단의 신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현장에 발을 들여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한 얘기는 조금 후에 나누기로 하고, 확고한 신념과 사명감으로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예기치 않은 문제에 부닥쳐 적잖은 내적 혼란과 갈등을 겪게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보적인 교단에 속한 교회라 하더라도 교인들에게 ‘평신도를 위한 기초신학’조차 가르치는 교회가 별로 없습니다. 하여 신학생들은 대부분 신학교에 들어와서야 현대신학을 제대로 배우게 되는데, 확신에 찼던 과거의 신앙이 도전을 받으면 학생들은 충격을 받으며 본능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특히 성서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 중에는 교수님에게 대든다든가, 시험문제를 백지상태로 제출하는 등의 저항을 하기도 합니다. (저도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이것이 사탄의 음성이라면 성령님께서 지켜 달라.”고 수업시간에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충격과 부정’의 단계를 지나면 학생들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1) 후회하는 학생들 - 확고한 보수 신앙을 갖고 있는 학생들 중에 신학교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학교를 떠나기도 하지만 학교에 남는 대신 귀를 닫기로 결심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현대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이 학생들은 과거에 갖고 있던 확신을 그대로 간직한 채 목사자격증을 획득하기 위해 과정을 참아낼 뿐, 결국 배타적 교리신앙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목회의 길로 들어섭니다.

2) 타협하는 학생들 - 위의 학생들보다 더욱 불행한 경우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과거에 가졌던 신념이 옳지 않다는 걸 알고 목회에 대한 꿈이 바뀌거나 사라졌지만, 떠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직업목회자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학생은 진실을 알면서도 교인들을 배타교리로 세뇌시키는 위선적인 목회자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 편지를 읽는 신학생 중 여기에 해당하는 학생이 있다면, 가급적 빨리 학교를 떠나는 것이 본인이나 한국 교회를 위해 바람직합니다).

3) 수용하는 학생들 -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과거에 가졌던 확신이 무너지는 아픔을 견뎌내며 진지하게 신학공부를 계속합니다. 마음의 고뇌와 현실의 고통을 견디며 신학을 제대로 공부한 학생들은, 기존의 신앙관은 무너지지만 결국 복음의 원형이 따뜻한 예수정신과 예수운동에 있음을 깨닫고, 기존 교회에서 가르치던 ‘예수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나 ‘예수의 신앙’을 갖고 실천적인 예수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이분들이 모두 진실되고 정직한 목회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다수는 그 옛날 우리 주님께서 가셨던 고난의 길을 따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행동하는 목회자로 살아갑니다. 가난한 이웃의 친구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등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며 도와주는 동지로, 독재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로 살아갑니다. (그런 목회자분들께 마음 깊이 존경을 표합니다).

하지만 이런 ‘열린 목회자들’도 여전히 극복하기 쉽지 않은 과제를 붙들고 씨름해야합니다. 고통을 감내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새롭게 알게 된 기독교의 참 모습을 목회 현장에서 솔직히 말하기에는 한국 교회에 드리워진 벽이 너무 높다는 것을 실감하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수위를 정하고 타협해야 하는 슬픈 현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분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조직은 마치 생명체처럼 자체생존욕구를 갖습니다. 그것은 교회라는 종교조직체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여 자기 조직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려는 사람이나 세력이 조직 내에서 발견되면, 조직은 그를 가차 없이 몰아내려는 속성을 갖습니다. 밖을 향해서는 소리 높여 개혁을 외칠 수 있어도 자기가 속한 조직의 중심을 향해 개혁의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찍이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하신 감신대 학장 변선환 목사님이 교단에서 퇴출당하고 학교를 떠나셔야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목회현장에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교단에서 쫓겨나는 상황을 힘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조직에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조직의 거대한 힘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현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알고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자기 조직의 개혁을 위해 나서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여 그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조직에서 퇴출될 것을 각오하지 않는다면) 교단의 눈치를 보며 침묵하거나, 정확히 말하지 못하고 에둘러 말하는 것 외에는 현실적인 대안이 별로 없습니다. 특히 신부님이나 스님들과는 달리 가정을 거느린 개신교 목회자들이 자신과 가족을 먹여주고 입혀주는 조직에 대항하기란 너무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3. ‘확신에 찬’ 목회자와 ‘고민하지 않기로 결심한’ 목회자

이쯤에서, 앞서 말씀드린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현장에 발을 들여놓는” 목회자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자신들이야말로 ‘보수정통’이라고 주장하는 보수교단 신학교의 대부분은 새로운 신학이론을 아예 소개하지도 않거나, ‘틀린 것’으로 미리 설정해놓고 학생들에게 가르칩니다. 하여 이런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은 배타적 보수정통 신학이 옳은 것으로 확신한 채 아무 갈등 없이 목회 현장에 뛰어들어 ‘확신에 찬 설교자들’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할 수 있는 설교자들, 고민하는 신앙을 나약한 신앙으로 간주하여 자신은 물론 교인들에게 ‘의심 없는 신앙’과 ‘변치 않는 신앙’을 강조하며, 교인들의 대다수를 ‘일편단심 신앙’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대부분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진보교단의 신학교를 나온 분들 중에도 이런 확신주의자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확고한 보수 신앙을 갖고 진보교단의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 중에는 현대신학이 자신의 신앙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마음의 벽을 쌓아놓은 채 과거에 갖고 있던 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졸업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소신대로 배타적 교리신앙에 근거하여 ‘확신에 찬 목회자’로 사역하게 됩니다.

자신이 자란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신학교에서도 현대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거나 접하지 못한 이런 부류의 목회자들은, 세상만물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을 확실히 만났고 선택받았다고 확신하기에, 자신도 ‘의심 없는 신앙’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리신앙에 대해 의심하거나 고뇌할 줄 모르는 이런 확신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승리자가 되는 슬픈 현실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신중하고 양심적인 상인들은 손님을 잘 끌지 못하고, 이삼십년 전까지만 해도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달변을 늘어놓는 떠돌이 약장사’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빼앗고 돈을 잘 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확신주의자들에게 배운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그 목회자를 닮아 확신에 찬 신앙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영위합니다. 예수를 믿어 이미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았으니 기껏 백 년도 안되는 현세에서의 고난쯤은 능히 감당할만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신앙을 진정한 기독교신앙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계의 이런 현실이 매우 안타깝고 슬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는 이분들(확신에 찬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이해하며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정직하게 저의 신앙과 신념을 따르는 것처럼, 그분들 역시 그것이 옳다고 정직하게 믿고 있다면 그들의 신념을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수정통을 자처하는 목회자들이 자기 신앙과 신학에 따라 확신에 찬 설교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즉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는 이분들과 다를 것이 없으나 속내는 전혀 다른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전자가 확신으로 가득 차서 고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분들인 반면에, 후자는 기독교의 전통 교리에 동의하지 않거나 회의를 느끼면서도 ‘고민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고민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들 목회자들은 오래된 교리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자신의 처지와 생계문제에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또한 솔직한 목회자는 교회를 부흥시키기도 어렵고 성공적인 목회자로 등극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진실을 덮고 ‘확신에 찬 목회자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에는 이런 목회자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이들은 그 옛날 우리 주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신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우님들이 특히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이며, 한국 교회가 반드시 가려내어 교회에서 떠나게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4. 평신도가 주체가 되지 않으면 교회개혁은 불가능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목회자들은 자기가 속한 구조 속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더 나은 상황으로 개선되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이미 형성된 구조 속에 안주하려는 자신의 본능적 욕구와 끊임없이 싸워야 하며, 자본주의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또한 가정을 갖고 있는 생활인으로서,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순수하게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며 초심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소수의 깨어있는 목회자들이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개혁을 외칠지라도 다수의 동료들에 의해 저항을 받게 됩니다. 피아가 확연히 구분된 전장에서 적과 싸우는 일은 오히려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자리를 함께 하는 동료들의 저항을 극복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의 개혁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는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목회자들이 주체가 되는 교회개혁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평신도 교우님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한국 교회 교우님들은 주체적으로 개혁에 나설 만한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직업목회자들이 대대로, 자신의 기득권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교인들을 세뇌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이 깨어있지 않으면 훌륭한 정치인과 그렇지 못한 정치꾼을 구별하지 못한 채 비양심적인 정치꾼의 술수에 놀아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평신도 교우님들이 깨어 교회현실에 눈을 뜨지 못하면 일부 비양심적이거나 무지한 목회자들에게 계속 휘둘리게 되고 한국 교회의 미래도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평신도 교우님들이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해 하실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 이렇게 기존의 신앙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글이라도 용기를 내어 읽어주시는 것 자체가 이미 교회개혁에 참여하고 계신 것입니다. 행동하기 이전에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 교계에는 재정 비리나 가짜 학위 등의 문제로 교회 내 갈등은 물론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지만 자신의 과오를 진지하게 뉘우치는 목회자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과는 다른 변화의 조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평신도 교우님들이 교회 쇄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교우님들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렇게 평신도 교우님들이 힘을 합쳐 각 교회마다 개혁운동이 활발히 일어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어렵다면, 교우님들의 행복을 빼앗거나 사회갈등을 일으키는 교회를 떠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배타교리나 도덕적 해이로 개혁의 가능성을 상실한 교회는 문을 닫는 것이 차라리 낫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가 도태되어 한국 교회의 전체적인 토양이 깨끗해질 수 있도록 미련 없이 떠나는 것도 교회개혁을 위한 작은 실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열린 목회자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일도 교우님들께서 하실 수 있고, 반드시 하셔야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확신하는 목회자’보다 ‘고뇌하는 목회자’들을 더욱 존경해 주시고, 그분들과 함께 바른 교회의 모습을 찾기 위한 대화를 자주 나누시고 실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그분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혹 그분들에 대한 교회의 압력이 있을 경우 교우님들께서 보호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우님들 스스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하여 제가 지난 9월 1일부터 오늘까지 보내드린 주일편지를 다시 한 번 잘 읽어주시고, 그 내용에 일부라도 동의하신다면, 주변의 교우님들에게도 소개해주시도록 부탁드리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만일 교우님들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로서는 더없이 보람되고 감사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 내용을 주제로 가까운 교우님들과 서로 토의도 하시고, 어떻게 하면 교우님들이 각자 다니시는 교회에 적절하게 도입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주신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평신도 교우님들이 직업목회자에 의존하는 신앙에서 벗어나, 스스로 공부하며 의식을 깨우고, 교회개혁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실 때, 한국 교회는 비로소 개혁을 위한 탄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 교우님들, 교회 개혁의 주체가 되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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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Ray (220.118.20.85)
2013-10-05 22:01:33
새신자=성도=집사=권사=장로=목사=감독=감독회장.

모두 왕같은 제사장이며 모두 예수님의 제자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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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0
동의합니다. (72.137.138.62)
2013-10-10 06:02:02
그런데 싫어하는 사람되게 많습니다.
무조건 나이에 따라서 순위가 갈리는 세상에서 보수니, 진보니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교회개혁은 평신도라고 하는데, 누가 평신도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평신도는 누구입니까? 집사밑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개혁이라고 하셨는데, 누구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인지, 교회의 구조를 알면 그런 이야기를 할수가 없습니다. 진보나, 보수의 선을 넘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젊은 때는 진보나 보수의 이야기를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성경의 말씀들이 맞는지 안맞는지 늘 체험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신앙을 깊게 만들지요. 이것을 보고 진보라고 보수라고 나불거리고 있는 분들이 많으니... 아무튼 읽으면서 답답해서 몇자 적어봅니다. 모두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보수니 진보니 서로 싸우고 있는데, 그러지 마시고 어차피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인생, 엇된다 시간낭비하지 말고, 귀한 곳에서 투자하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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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최Ray (175.223.56.80)
2013-10-10 18:55:26
우리 담임목사님은 목회자는 제사장으로 표현 합니다.

성도들도 제사장으로 표현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왠지 목회철학이 의심이가고

이질감이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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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동의합니다. (72.137.138.62)
2013-10-11 20:40:17
세대차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녀분하고 세대차이가 나듯이 나이든 목회자들하고 문화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서구 신학이 들어온 시점하고 비교를 해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목회철학이 어떻구 저렇구 할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그 분도 그렇게 배우셨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한국의 영어선생님들이 북미에 와서 연수하고 돌아가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적용해야 하냐고요? 그래셔 요즘은 북미로 연수오지 않습니다. 한국이 최고래요. 그냥 미국 드라마보고, 한국식으로 해석하고 사는 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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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Charlie (198.208.251.22)
2013-10-11 02:42:07
고난의길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시대의 교회 문제는 "평신도"들이 풀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는 않네요. 조금이라도 잘해보자고 하는 사람들은 왕따시키는 것이 사랑이 넘치는 교회에서 늘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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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Philip Im (70.62.49.64)
2013-10-09 07:12:17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개혁을 하려면 목적과 수단이 필요하다.
교회 개혁의 목적은 무엇이며 어떤 수단이 필요한가?

개혁이 새롭게 뜯어 고치는 것이라면
교회가 낡았다거나 부패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확실히 교회는 부패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개혁이 아니라 재창조가 필요할 지경이다.

결국 개혁의 목적은 부패한 교회를 성결한 교회로 만들자는 것이 될 수 있다.
사실 많은 안티기독인들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부패한 교회를 바라보며 탄식하고 있다.

그러면 부패한 교회를 어떻게 개혁할 수 있는가?
결코 이 땅 위에서는 온전하고도 완전한 교회,
정결한 신부로서의 교회를 이룰 수는 없지만
그렇게 되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부패한 교회가 아니라 정결한 신부같은 교회는
오직 하나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소위 개혁주의자라 하면서도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행하는 자들이 있다.
교리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문제가 있다.
성경 말씀을 사람이 쓴 문학 정도로 취급하는 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성경을 똥통처럼 취급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생활이 똥통이요 악취를 풍길 수 밖에...

개혁은 단순히 자기부정이며 변화가 아니다.
무슨 변화이며 언제까지의 변화인가?
진화론자처럼 끝없는 변화만 추구할 것인가?
오직 그리스도인들은
파괴된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개혁의 목표로 삼아 나간다.
오직 한 목표 그리스도의 형상,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만을 목표로 개혁한다.
어디서 그 목표에서 떨어졌는지 계속 살피며 나아간다.
그러기 위해 성경을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상고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을 찾아 나아가야 한다.
리플달기
0 4
조약돌 (218.38.160.207)
2013-10-09 08:55:33
빌립 임, 이 친구는..
예수가 세운 교회 옆에
교회당을 짓고
사람들을 교회당으로 모으려는
자인가 보네?
리플달기
2 0
무릇돌 (218.38.160.207)
2013-10-07 22:33:26
개혁은 무엇이고 개혁은 가능한가?
결론은 개혁을 하자고 한다.
그런데 관련자들을 성직과 평신도로 구분하여
성직은 밥줄때문에 개혁에 나서기 어렵고
예수에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의 신앙으로 전향한(깨어난)
평신도들이 나서야 한다고 한다.
신학자들조차 '예수의 신앙'이 무엇인지
아직 결론이 나질 않았다.
그러니 '예수에의 신앙'에서 '예수의 신앙'으로
전향하는 것조차 아직은 '미지수'이다.
그러므로 성직과 평신도를 나누기 이전
(이것이 타당한 것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개혁에의 목표 혹은 방향조차 혼란스럽다.
그래서 어떤이는 '초대교회'로 가자고 한다.
어떤 초대교회?
예수의 신앙이란
어쩌면 종교의 소멸을 의미할수도 있는데
모든 제도조차도 소멸시킨 그 무엇을
누가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그래서 조금 생각하는 자들은 극구 개혁을 우려한다.
기존의 것을 양보하다보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개혁은 무엇인가?
개혁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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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참빛 (24.141.4.52)
2013-10-08 15:21:22
다른 분께서 의견을 주시기를 기다렸는데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개혁이 무슨 큰 혁명으로 보지 말고,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작은 개혁으로 이해하면 어떨까요?

개혁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무릇돌님이 이미 말씀하신 바 있는 그 "변화"와 "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해야 한다는 것이죠.
물은 흐르지 않고 오래 고이면 썩는 법.
각자가 오만과 편견과 독선의 교리로 부터 탈피하여
진정한 인간을 위한 사고로 가야 합니다.

온갖 잡설과 교설로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죄인으로 간주해 온 전통적 기독교의 교리를 과감히 탈피하고 사람을 위한 현대신학을 수용하는 변화의 모습이 바로 개혁일 것입니다.

저는 성경은 사람을 위해 쓰여 졌고 존재의 목적도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종교도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고요.

제가 쓴 댓글을 이곳으로 옮겨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가장 급선무가 성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입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훌륭한 것과 최상이라는 것은 당연히 있지만요.

우리는 '성경이 절대적'이라는 착각을 먼저 힘들더라도 과감히 수정하여야 합니다.
성서무오설과 같은 가당치도 않은 교리를 최우선적으로 과감하게 버려야 하겠습니다.

신앙도 좋지만, 우리는 사람앞에서와 신 앞에서 정직해야 하고 솔직하여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성경에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흐르고 있다는 의미이지, 역사적 사건을 말하거나 사실을 말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썻기 때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이미지 대로 창조하였다고 한다면, 인간이 고락을 통해 얻어진 지혜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지요.

변화의 요청에 각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받아 들일 때 개인적 개혁이고 그것이 작은 파도를 일으켜서 언젠가는 단체적 개혁에 이르게 하는 힘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결국, 개혁은 '자기부인'이고 '변화'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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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무릇돌 (218.38.160.207)
2013-10-08 23:45:09
예수의 신앙과 개혁
예수의 신앙이란
하느님의 통치(왕되심,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낮은 사람들에게 우선
실현하기에 올인하는 것
이 아닐까요.
이것을 이루기 위한
예수의 행태는
철저한 자기부정(끊임없는 겸비,변화)이겠지요.

예수의 운동이 종교로 고착(제도화)된 것은
자기부정과 변화를 게을리하고 잊었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가끔, 불경스럽게도,
예수가 오십, 육십까지 사셨으면
과연 기독교가 가능하였을까
생각해봅니다.
그의 삶은
너무 강하고 또한 너무 짧아서
그의 그림자가 너무 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는
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무슨 거창한 구호나 광고로
개혁을 포장할 수 없습니다.
그냥 작은 걸음 한걸음씩
자기부정과 변화를 통하여
하느님의 왕되심(상징,추상명사)을
나 자신과
내 가족과
나의 이웃들에게
보여줄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나와 우리의 노력조차도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는 진실을
잊지만 않는다면
나는 또 우리는
에수와 함께 길을 간다고
말할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변화의 요청에 각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받아 들일 때
개인적 개혁이고
그것이 작은 파도를 일으켜서
언젠가는
단체적 개혁에 이르게 하는 힘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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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삼청교육대 (175.223.40.240)
2013-10-06 09:00:38
상태형 교회개혁이라고
상태형 말이 맞아
근데 왜 신부들이 목사들에게 비해 정치나 양심선언 많이 하는줄알아
그것은 신부들은 밑에서 입바른 소리를 해도 성직자 제도라서 불이익은
줄망정 짜르지는 않아 최악의 경우에도 촌으로 쫓겨가거나 미사권배제데
오히려 공기좋은 곳에서 휴양이나 새벽미사 안보고 늦잠자니 입장바꾸어
생각해보면 얼마나 좋아
근데 목사들은 입바른 소리하면 생계부터 걱정해야 되 내 아내 내자식이
굶어 그리고 목사안하면 다른거 해서 먹고 살거같애 내눈으로 보면
목사들 절대로 못해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입바른 소리할것같애
그런것을 기대하지마

상태형이 제기한 문제는 나도 공감해 근데 이게 한국교회의 말기암같은
문제라서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몰라
평신도가 이런 문제 제기하면 어떻게 될지 가르쳐줄까
"당신 싫으면 가면 되지 왜 문제 일으키냐"
거의 100이래
교회나 사회에서 인정받을려면 이끼처럼 있는지 없는지 조용히 숨죽이고
사는게 최고의 보신방법인지 몰라
왜 타인에게 할수없는 것을 기대하는거야
나도 마음이 아파 이현실을
보수나 진보나 저런것을 할수있는 교회가 있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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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Philip Im (70.62.49.64)
2013-10-06 07:35:02
교회 개혁?
먼저 교회를 개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류상태씨가 정리를 하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평신도들이 주체가 되어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1)이나 2)는 교회 다닌다 하면 어느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이다.
개혁주의자이든 자유주의자이든...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이 모인 조직은 언제나 부패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민감하지 않으면 언제든 옛자아가, 쓴뿌리가 발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인간적 양심을 갖고 정의니 평화니 하며 외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영적 각성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면 개혁의 대상 가운데 하나인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자도 있지만 서 있다 하더라도 실수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보아야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단순히 사람의 실수를 고친다거나 조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이것이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루터나 칼빈처럼 카톨릭의 잘못된 즉 성경적이지 않은 교리를 타파하는 것이다.
교리라 하지만 성경을 왜곡되게 해석하여 정리한 것을 일컫는다.

이제 정작 중요한 내용이 3)4)5)에 나와 있다.
교리를 폐기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이3)4)5)는 나름대로 성경을 연구하여 정리한 것들이 아닌가? 이것이 교리가 아닌가?
물론 하나님은 변한다 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이렇게 정리된 것들도 언젠가는 변할 것이니 교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자가당착이 아니겠는가?
지금 정리한 내용도 언젠가는 바뀐다?
부평초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 3)4)5)가 과연 루터나 칼빈이 바르게(?) 정리한 성경 말씀처럼 바른 내용인가?

성경관이 다르니 이제 각자 갈 길을 가는 것 뿐이다.

류상태씨는 공언하기를 기독교를 떠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교회개혁은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혹 교회 파괴는 아닌가 의심스럽다.

같은 성경을 읽지만 보는 관점이 다르고 하나님에 대한 관점도 다르니
하나님이라 부르지만 같은 하나님이 아니다.
어찌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같이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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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8
ㅋㅋ (175.213.169.30)
2013-11-05 13:38:08
이 사람은 항상 잘난 척이야
하수를 막 지난 중급촐랑이들의 특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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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가로수 (24.197.173.149)
2013-10-06 01:49:43
평신도라는 말의 어원을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안에 평등한것을 우리는 알고 잇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출처불명의 "평신도"라는 단어가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하나님안에 만인이 평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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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지나가다가 (71.234.154.98)
2013-10-06 21:58:25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죠.

신약에 나타나는 감독,장로, 목사(원래는 목자라고 번역해야 함)라는 단어는 동의어라고 보아야 합니다. 신약 여기 저기에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쓰였습니다. 1세기의 초대교회에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2세기에 접어들면서 초기 정통주의의 시조격인 교부들이 로마군대의 조직을 본따서 제도적인 개념을 교회내로 가지고 들어오게 됩니다. 장로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을 교주교로 세우고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같은 사람은 교회내의 지도자 개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클레멘트는 성직자와 그 외의 교인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성직자(clergy)와 평교인(laity)의 구분이 생깁니다. 성직자라는 단어의 헬라식 어원은 kleros 인데 제비뽑는다는 의미에서 나타난 단어입니다. 신약에도 몇번 나타납니다. 그런에 이 단어가 완전히 둔갑헤서 교회내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평교인을 의미하는 laity는 헬라단어로는 laikos 인데 신약에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 단어입니다.

사실 이런 개념을 가지고 온 클레멘트도 이 개념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했고 그런 개념이 성경에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도자를 부르던 clergy와 구분하기 위한 단어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3세기 이후로는 초기 정통주의가 권위를 내세우면서 세속화된 교회제도를 강화하여 로마 카톨릭의 원형을 만들어가고 따라서 권력층의 차별화를 강화합니다.

그리고 약 1300년이 지나고 나서 종교개혁 때에 겉으로는 만인제사장이라고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성직자와 일반 교인의 간격을 더 크게 벌리고 칼뱅의 경우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성직자에게 부여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먹사제도가 굳어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고대인들의 유산을 아무런 여과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신교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의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정신 나간 짓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신교만 돈에 미친 것이 아니라 천주교도 돈을 강요하는 신부들이 가끔씩 있습니다. 중앙통제체제 때문에 언론에 자주 보도되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했는데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평등의 개념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구약은 노예에 대하여 끝없이 언급합니다.

평등의 개념이 인류사회에 나타난 것은 300년도 안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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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가로수 (24.197.173.149)
2013-10-06 22:12:46
지나가다님의 요점은 한 마디로 정리해서 300년도 안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장황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님은 현재 살고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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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지나가다가 (71.234.154.98)
2013-10-06 22:32:15
반대입니다.
제 욧점은 평신도라는 개념이 교회에 들어온 것은 1세기를 넘자마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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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최Ray (220.118.20.85)
2013-10-05 22:01:33
새신자=성도=집사=권사=장로=목사=감독=감독회장.

모두 왕같은 제사장이며 모두 예수님의 제자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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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합니다. (72.137.138.62)
2013-10-10 06:02:02
그런데 싫어하는 사람되게 많습니다.
무조건 나이에 따라서 순위가 갈리는 세상에서 보수니, 진보니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교회개혁은 평신도라고 하는데, 누가 평신도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평신도는 누구입니까? 집사밑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개혁이라고 하셨는데, 누구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인지, 교회의 구조를 알면 그런 이야기를 할수가 없습니다. 진보나, 보수의 선을 넘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젊은 때는 진보나 보수의 이야기를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성경의 말씀들이 맞는지 안맞는지 늘 체험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신앙을 깊게 만들지요. 이것을 보고 진보라고 보수라고 나불거리고 있는 분들이 많으니... 아무튼 읽으면서 답답해서 몇자 적어봅니다. 모두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보수니 진보니 서로 싸우고 있는데, 그러지 마시고 어차피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인생, 엇된다 시간낭비하지 말고, 귀한 곳에서 투자하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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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최Ray (175.223.56.80)
2013-10-10 18:55:26
우리 담임목사님은 목회자는 제사장으로 표현 합니다.

성도들도 제사장으로 표현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왠지 목회철학이 의심이가고

이질감이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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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동의합니다. (72.137.138.62)
2013-10-11 20:40:17
세대차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녀분하고 세대차이가 나듯이 나이든 목회자들하고 문화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서구 신학이 들어온 시점하고 비교를 해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목회철학이 어떻구 저렇구 할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그 분도 그렇게 배우셨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한국의 영어선생님들이 북미에 와서 연수하고 돌아가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적용해야 하냐고요? 그래셔 요즘은 북미로 연수오지 않습니다. 한국이 최고래요. 그냥 미국 드라마보고, 한국식으로 해석하고 사는 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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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포이멘 (183.109.98.143)
2013-10-05 14:54:53
류상태형제님

성경에도 없는 ‘성직자(목회자)와 평신도’라는 용어의 개혁을 부탁합니다.

이 용어의 사용 자체가
성직자(목회자)는 교회 내에서 지배계급으로 인식시키고
평신도는 피지배계급으로 인식 시킵니다.
이에 따라 지배계급에 착취와 억압을 당하여도
피지배계급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으로
하나님이 왕이시고 성도가 백성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경에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 사도, 예언하는 사람, 전도자, 목자,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 바로 그분이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공동번역 엡 4:11) -

“성도가 나서면 교회가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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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
소리 (99.111.60.193)
2013-10-06 05:21:35
성직자/평신도의 나눔도 문제가 있습니다만

아래 지나가다님 말씀대로 성도라는 개념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역시 어느 때부터인가 성도라는 단어가 매우 불편했습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과연 믿음은 무엇인가 생각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라는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다양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어떻든 성직자가 자신의 직업을 귀하게 여기고 더 그 일에 충성을 다하는 의미로 자신을 성직자로 부른다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늘 다짐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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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지나가다가 (71.234.154.98)
2013-10-06 01:05:02
성경에는 성도가 있다고?
정말?

어디에?

사도, 예언하는 사람, 전도자, 목자, 교사도 있다고?

어디에?

아~ 에베소서?

에베소서? 그건 누가 쓴건데?

바울?

그럼 왜 바울이 쓴 편지가 성경으로 둔갑했지? 예수의 복음서에는 목자니 교사니 그런 말 한 마디도 없잖아?

성도?

워매~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인데 누가 거룩해? 예수 믿으면 거룩해져?

목사들도 예수 믿잖아? 그런데 목사들 개판치는게 안보여?

그게 거룩해?

그럼 교인들이 거룩해?

교회 밖에서는 돈 벌려고 혈안이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룩해?

아무리 밥벌이로 목사짓을 한다고 해도 최소한 목사들은 다른 사람의 눈치라도 보면서 거룩한 척 하면서 살지. 그런 사람들이 저렇게 개판을 치는데 일반 교인들이 거룩하다고?

개혁을 외치면 다 거룩한가?

도대체 인간 가운데 누가 거룩하다고 할 수 있지? 누가 기준이고 뭐가 판단의 근거냔 말이지.

개혁?

평신도가 교회개혁의 주체가 된다고?

개신교에는 개혁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다니까 참 못 알아듣네. 개신교뿐만 아니라 어느 종교나 다 마찬가지라고.

게다가 머리에는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기꾼 먹사들이 가르친 지식만 가득한 교인들이 개혁을 해?

그냥 교회를 떠나서 집에서 성경이나 읽으면서 살라고 하면 모를까. 개혁은 무슨 개혁.

개혁하면 뭐해? 또 누군가는 권력의 중심에 설 것이고 누구는 그저 꼬붕 노릇만 할텐데.

칼뱅하고 루터를 보면 알잖아.

개혁한다고 해놓고 결국은 또 다른 조직을 만들어서 말로는 그럴듯하게 어쩌고 저쩌고 했지만 결국 이 꼬라지가 된 것만 보더라도 개혁이란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잖아?

그리고 제발 좀 성경에 뭐라고 써있는지 도배질 좀 하지 말자고.


성경에 대해서는 인간들 모두가 제대로 알고 있는데 없다고요~

구약이나 신약이나 처음부터 뭐가 어떻게 된건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고요.
리플달기
3 0
포이멘 (183.109.98.143)
2013-10-06 07:18:17
지나가다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게 살려고 합니다.
11. 이방인으로 태어난 여러분, 지난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단지 몸에다 사람의 손으로 행하는 할례를 받은 소위 할례자들로부터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12. 그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이스라엘 시민권도 없는 외국인으로서 약속의 계약에서 제외된 채 이 세상에서 희망도 하느님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13.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15.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나 가까이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다 같이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18.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21. 온 건물은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22. 여러분도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리플달기
1 1
무릇돌 (218.38.160.207)
2013-10-05 15:41:43
하나님이 왕, 성도가 백성인 교회!
지당하신 언급입니다.

류목사님도 그 사실을 알 것입니다.

현실적인 구별은 단지
그 성직계급이 '개혁에 저항'하는 구룹일 듯.

“성도가 나서면 교회가 달라집니다.”-아멘-
리플달기
5 0
포이멘 (183.109.98.143)
2013-10-05 15:10:38
하나님은 성도들과 직접 교제를 하십니다.

물론 사도나 예언하는 사람, 전도자, 목자, 교사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하시지만
그때마다 다른 사람에게도 함께 말씀하십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면
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말씀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친절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 각자와 교제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목사나 사제나 교황이나 이만희와 같은 중재자가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돈을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류상태 형제님의 ‘당당뉴스 읽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겠습니다.
리플달기
5 0
참빛 (24.141.4.52)
2013-10-05 13:21:34
평신도가 나서야...
"이런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평신도 교우님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한국 교회 교우님들은 주체적으로 개혁에 나설 만한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직업목회자들이 대대로, 자신의 기득권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교인들을 세뇌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께서 종교도 경제다 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오늘 류상태 목사님의 주일편지를 읽고 나니 정말 그렀겠구나 하는 심감을 하게 됩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학교에서 이미 배운 진실이지만 다 말할 수가 없는 목사님들... 잘 못하다가는 일자리를 잃게 되고 목사 자격증까지 잃을 수 있는 현실정...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교인이 나서야 한다는 말씀이 백번 옳고 말고요.


예화 하나 드리겠습니다.
미국에 성서 텍스트 비평학자로 이어만 이라고 있습니다.
이 분이 한 강의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한번은 이어만씨와 신학교 동창이었던 어느 목사님이 이어만씨에게 자기의 교회에 와서 특강을 좀 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흔쾌히 승락을 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정해진 제목같은 것 없이 아무것이라도 좋으니 맏아서 해 달라고 하여, 신약성서 사복음서에 있는 서로 상반되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강의를 했다고 합니다. 강의가 끝난 후에 어느 한 할머니께서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하는 놀란 표정으로 하는 말이:

"저는 오래도록 교회에 다녔는데, 왜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를 한번도 듣지 못했나요?" 라는 질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생소하지만 진실을 말해 주어서 너무도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어만은 그 교회 목사가 자기의 동창생이었기 때문에 자기와 함께 공부했고 자기가 강의한 내용도 신학교에서 배웠는데 왜 단 한번도 가르치지 않았는지 의아스럽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은, 류목사님께서 본문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먹고살아야 하는 일이 어쩌면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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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10-05 13:45:41
질문입니다..
문제는 개혁을 막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죠.
박창진 목사는 개혁을 하게되면 자기가 배운 것이 그게 전부인데 다 틀린 것으로 나오게 되면 자기가 설 땅이 없어진다는 공포를 느낄 수 있어 이를 악물고 훼방하고 있다고 치고...

문제는 빌립과 같은 무식쟁이 개독입니다.
더 무지하게 문자주의로 돌아가자는 말을 외쳐대고 있고, 똥막대기를 휘드르며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을 가로 막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악성 개독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끝까지 조롱으로?
예수의 사랑으로 포용?

무뇌아들에게 하는 질문은 아니니 근본주의자의 답변은 저도 절대 사절할락 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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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207)
2013-10-05 15:46:16
발꿈치로 가시를 차다가
그만두겠지요.
설마 고통도 못 느끼는 존재이겠습니까?
저는 창진님이나 빌립이나 같은 종족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들도 생명체라면 사랑으로 계속 질책하며...
참빛님과 박평일 선생님의 끈기가 경이롭습니다.
아마도 '사랑'하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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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207)
2013-10-05 13:00:55
여하튼
구구절절 절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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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207)
2013-10-05 12:47:11
교회개혁을 평신도의 힘으로!?
1) 목회자 문제

2) 재정문제 특히 십일조와 목회자 납세 문제

3) 성서의 재해석과 배타교리 수정의 필요성

4) 예수님에 대한 재해석

5) 배타적 원시 유일신 신앙 극복

등등의 주제로 5회에 걸친 류목사님의 결론은
교회개혁이 필요하다.
그런데 밥줄이 걸려있는 목회자들이 중심된 교회개혁은
어려워 보인다.
그러므로 예수에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의 신앙으로 전향한
평신도들에 의한 개혁을 요청한다!?

깨어난 평신도들이 개혁에 저항하는 먹사들의 밥줄을
좌지우지함으로써 개혁이 가능하다!?

원로 목회자가 "나는(우리는) 속았다, 실패했다"하는데도
많은 목회자들은 심각해하지 않은 것 같다.

슬픈 한국 개신교 교회이다.
완전히 개독교가 훼파된 후에라야 새순이 돋아날 듯.

그래도 개혁에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는데...
그래도 모든 것을 내려놓을 성직자들이 앞장서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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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207)
2013-10-06 23:14:50
왜 교회개혁이 어려울까?
한국의 교회개혁은 필요하다.
한국의 개신교는 마침내 개독교라는 별명을 얻었다.
먹사들의 상식이하의 반윤리적인 행태와
개신교 내부의 불합리한 신앙과 교리들로 인해.

교회개혁의 준거는 무엇인가?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며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교과서로 삼는 성서-성경.
그런데 성서-성경의 진지한 숙고는
기존의 기독교 교리와 신학의 근거를 거의 부정한다.
전통적인 신학과 교리는 성경본문의 오해와 왜곡에서 발원하기에.

기독교의 최대의 모순과 아이러니는
자신의 정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제정한 경전(성경)이
기독교 자신을 부인하는 점이다.
경전이 그 경전을 산출한 종교를 부정한다!?
경전의 종교가 경전을 벗어낫기에.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경전에 대한 숙고를 통하여
기독교 자체를 재조립-재정립하는 것일 듯하다.

막연하게
기존의 성서관, 예수론, 하나님이해가
그릇되었다는 것만을 나열하고 확인하는 것으로는
개혁의 추력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새로운 것이
더욱 매력적인 것이라는 확신이 없이는
누가 새로운 것을 취하고 옛 것을 버리겠는가?
개혁의 매력적인 결과만이 개혁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덜 익은 것을 버림으로써
더 익은 것을 취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개혁이란 단지
어설픈 말들의 잔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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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Ray (220.118.20.85)
2013-10-05 12:16:00
필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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