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전에 오기 전부터 연일 내리던 비가 오늘은 잠시 개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사역지로 인도하시려고
잠시 하늘 문을 닫고 비를 멈추셨나보다.
지난 번 올 때 무너진 도로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다.
험한 도로를 다시 조심스럽게 반대방향으로 지나며
태고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말리꽁 산마을을 향하여
데이비드씨와 함께 가슴 벅찬 호기심을 갖고 달린다.
아주 까마득한 그 옛날
이곳 산악에는 사람은 없고 산과 구름과 안개만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유목민들이 찾아들기 시작하고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이 생겨나다보니
더 이상 수렵할 동물도 없었고, 채집할 먹을거리도 없었다.
이들은 양식을 마련하기 위하여 산을 일구어 논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탈진 산을 깎고, 흙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계곡에서 돌을 주어다 담을 쌓았다.
손바닥만 하게 만들어 진 논 위의 산을 다시 파서 담을 쌓고 논을 만들었다.
한 뼘이라도 더 농사를 지을 욕심으로
논 위에 논을 만들고, 또 다시 논 위에 논을 만들고
수십 층의 논을 만들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계단처럼 보인다.
추수기가 되면
좁은 논에 탈곡기를 사용할 형편도 못되어
겨우 한줌의 벼를 낫으로 잘라
젖은 논에 놓을 수 없어 머리에 이고
또 다시 낫으로 잘라 머리에 이고
열무더기 모이면 어깨에 메고 벼 곳간으로 나른다.
힘들지만 그렇게 장장 2천여 년 동안 조상 대대로 평화롭게 잘 살았는데
2차 대전이 일어난 어느 날
폭격기에 날벼락을 맞아
천여 년 이상 조상들의 젖줄이던
라이스 테라스가 무참하게 무너진다.
전쟁이 종결되고 일본군들이 패망하여 돌아간 어느 날
모든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강에서 돌을 날라다 무너진 논두렁을 다시 쌓으며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산꼭대기에 마을도 만들고 학교도 지었다.
그렇게 하여 지금까지 아침이면 아이들은 학교가고,
어른들은 논에 가서 일하며
하늘과 구름과 안개와 친구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어른들은 날마다 일만 하다 보니 허리 어깨 팔 다리가 쑤시고 아프다.
수 십리길 걸어 병원에 갈 형편도 못되고
진통제 먹어 나을 병도 아니다.
팔 하나를 못 쓰고 다리도 하나가 짧은 노인이
힘겹게 벼를 어깨에 메고 절뚝거리며 마을로 올라간다.
그분을 따라 우리도 아슬아슬한 한 뼘 논길을 걸어 마을을 올라가 본다.
언덕위에 10여 채의 농가가 나타나고, 벼 저장고를 지나
조그만 창고 같은 학교 건물이 보인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을 만난다.
학생 수 107명, 교사 수 7명. 교실 2칸.
조그만 운동장이 아이들로 바글바글하다.
어디가나 필리핀 사람들은 아이들을 생기는 대로 많이 낳는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선물이니 귀하게 받아야 한다는 천주교의 전통이다.
작은 산봉우리를 깎아 만든 조그마한 운동장에서 어린이들이
배구하다 공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니
아예 잡으러 갈 생각도 않고 포기하고 예비 공으로 한다.
예비 공이 항상 옆에 대기하여 놓여있다.
한편에선 긴 대나무를 양쪽에서 잡고 높이뛰기 놀이를 한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잘 하던 놀이다.
필리핀 어디가나 볼 수 있는 농구대에서
아이들이 농구는 하지 않고 무서운 동물 흉내를 내며 서로 놀래주며 논다.
교실에선 몇몇 아이들이 조용히 앉아 자습을 하고
젊은 처녀 선생님도 조용히 책상에 앉아 교안 정리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선생님들이
우리를 보고도 수줍어
못 본척하고 자기 일들만 한다.
따전에서 본톡까지 밴으로 두 시간 가서
다시 논길을 1시간 걸어 올라가 자리 잡은 말리꽁 라이스테라스마을.
인간의 집념은 험한 산을 논으로 만들었다.
돌을 떡으로 만들었다.
이제 산이라 부르지 말고 논으로 불러야 하는
이제 황폐하다 말하지 말고 비옥하다 말해야 하는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볼거리라곤
구름과 안개와 산과 계단식 논만 있는
조용한 라이스 테라스 마을에서는
다음에 다시 와선 꼭 며칠 묵어가라고 당부한다.
차마 수줍어 강요하지 못하고
잘 가라고 손짓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며.
마운틴 프로빈스 본톡, 말리꽁 라이스테라스 마을
힐링미션 리서치를 다녀와서 적다.
2013년 8월 23일 금요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