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갔다가 약속이 있어서 종로 5가에 나갔다가 복잡한 지하도 입구에서 아주, 우연히, 공교롭게도, 신기하게, 어쩌다가, 희한하게 몇 십 년 만에 고교동창을 만났다. 그는 마침 동기생 20 여명이 근처 당구장에서 만나는 날이라면서 그 곳에서 늦게까지 있을 것이니까 약속이 끝나면 모처럼 한국에 온 것이니까 꼭 와서 얼굴을 보자고 빚쟁이 조르듯이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가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은 과거의 사람들이고 나는 미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간다해도 별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이 모이면 과거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그것은 내가 잘나거나 역량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쌓아 놓은 네트워크 때문이다. 나는 이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연결고리인 내가 사라지면 나를 중심한 네트워크도 자연히 사라진다. 내가 사라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고 네트워크가 없어질 것이 아깝다.

고교 시절 나에게 이과 과목인 물리, 화학은 쥐약이었다. 그래도 화학에서 한 가지 분명히 기억되는 일은 화학반응은 원소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네트웤을 맺어야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점 조직은 선으로 이어져야만 비로소 조직으로서 힘을 발휘 할 수가 있는 법이다.

내가 남보다 조금 더 잘 할 수 있고 또 좋아 하는 일은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 요즘 말로 하면 네트워킹을 하는 것이다. 아마 어려서부터 가정이 부실해서 밖으로 돌다보니 인간관계를 중요시 하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을 서로 소개해 주는 일이라면 열 일을 제쳐놓고 나선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을 이렇게 고쳐서 믿는다.

“인간의 근원이시고 모든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사오니 내 속에서 에너지를 끌어내는 원천이시고, 모든 관계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성령이 교통하심을 믿사오며’라고 하는데 나는 성령의 역사는 잘 몰라도 교통하는 네트워크의 역사는 알기 때문이다.

예수도 인간이 하나님과 어떻게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즉 예수와 네트워크를 맺어야 하나님과 네트워크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주변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자연과도, 다른 인간과도. 그러므로 세상에서 관계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서부의 개척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가장 절실한 아픔도 기쁨도 모두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어떤 관계는 무한한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어떤 관계는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나락에 빠지게 하는 관계도 있고 욱일승천 하게 만드는 관계도 있다. 이 엄청나게 복잡 미묘한 관계의 장이 온라인의 발달로 더 한층 세밀해졌다. 온라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지 7년이 지난 요즘 나는 관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그것은 온라인에서 맺어진 관계가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라인 이웃이 멀리 있는 사촌 보다 낫다"는 말도 있다.

세상에 가치 있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 법’이듯 네트워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각자가 살아오면서 느끼고 경험하고 배운 것들을 함께 나눠서 서로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어떤 매개가 있어야 한다. 나는 할 수 있다면 이런 매개체가 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나를 보고 혹자는 ‘남 좋은 일만 하는 실속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당장은 나에게 실속이 없어도 네트워킹이 제대로 작동할 때 누군가에게는 실속이 있다고 믿는다.

너무 일찍부터 실속만 차리는 사람을 보면 얄미운 생각이 들지만 나이 들어서도 실속이 없으면 철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로 실속이 없는 짓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경우는 그 사람이 어리석거나 지나치게 순수하거나 낭만, 혹은 감정에 잘 좌우되는 성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아무 실속이 없었지만 그의 삶은 인류에게 측량 할 수없는 크기의 의미를 던져주었다. 실속이 없어도 크게 실속이 없으면 남을 구원할 수 있지만 작게 실속이 없으면 자기도 구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