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리칸 드림잉


1

7. 19일 토요일 아침 일찍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며칠간 미 동부를 휩쓸고 있는 기록적인
폭염 탓으로 이른 아침부터 찜통이다.
집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 거리 떨어진 버지니아 주 시골
윈체스터로 가는 길을 GPS에 입력했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몇 개월 전에 그 곳 JIM BARNET PARK에 미군 한국전쟁 참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벽돌 한 장 값을 도네이션 했었다.
오늘이 바로 그 기념탑 준공식이다.

혼자서 운전을 하고 오고가기에는 제법 긴 시골길이다.
7월 중순의 버지니아 숲은 짙푸르고,
청명한 하늘엔 하얀 솜털구름들이 한가히 부유하고 있었다.
이 기회에 좋아하는 미국팝송들이나 실컷 듣자.

자동차 시디를 켜고 5번을 눌렀다.
1960 대에 유행했던 "California Dreaming" 노래가
Mamas and the Papas 들의 애절한 목소리로 내 귀를 뜨겁게 달구었다.

"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hy is gray
I've been for a walk on a winter's day
I'd be safe and warm if I was in L.A.
California dreamin' on such a winter's day.

Stopped in a church I passed along the way
Well I got down on my knees and I pretend to pray
You know the preacher likes the cold
He knows I'm gonna stay
California dreamin's on such a winter day.

"모든 나뭇잎들은 갈색으로 변하고 하늘은 회색빛.
어느 겨울날 나는 걷고 있었습니다.
L.A였으면 안전하고 따뜻했을 걸...
나는 캘리포니아 꿈을 꾸었습니다.

가는 길에 교회를 들렀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흉내를 냈습니다.
목사는 얼음같이 찬 것을 좋아하는 존재
그는 내가 이곳을 떠나지 못할 걸 알고 있지요.
어느 한 겨울날 나는 캘리포니아 꿈을 꾸었지요.

노래를 연거푸 되풀이 해 들었다.
나의 지난 37년 이민생활은
한 겨울날 꾸고 있는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안전하고 따뜻한 자유를 그리워하는...

2

다소 시간 여유를 두고 나선 길이지만
넓은 공원 내 식장과 주차장을 찾느라
약간 늦었다.
식은 이미 시작되었고
한 한국 목사가 영어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한국목사들 특유의 긴 기도다.
영어기도가 끝나자 다시 한국어로 계속되었다.

5-6 명밖에 되지 않은 한국인들을 위한 기도인지,
아니면 영어를 모르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인지.
청중들의 목덜미에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날씨가 화씨 10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
푸른 공원잔디위에 양쪽에 미국기와 한국기가 꽂힌
10피드 짜리 하얀 대리석 한국참전위령탑이 우뚝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앞에 모여든 300여명의 축하객들, 겨울군복 복장차림의
한국전참전 늙은 용사들, 총을 든 의장대...
하나같이 더위를 잊은 듯 식장은 엄숙하고 숙연하기만 했다.

한국전은 미국인들에게 잊힌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아니
정작 진실은 미국인들이 잊고 싶었던 전쟁인지도 모른다.
3만 4천여 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무엇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을까?
이 작은 버지니아 시골에서도 60여 명이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위령탑에 새겨진 그 영령들의 이름들을
일일이 호명했다. 우주보다 귀한 꽃다운 청춘들은
지금쯤 어느 하늘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말이 없다.

맥아더 장군 퇴임사처럼
노병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사라지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상념들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60년이 지난 오늘,
전쟁에 참전했던 머리가 하얀 저 노병들의 목소리로
그 진실을 직접 들어 보기로 했다.

한국대사관에서 파견 나온 한국군 소장, 이 장군으로부터
한국의 자유를 지켜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말이 있었다.

뒤이어 한국전 전쟁포로 삼 년간 고생을 한
Mr David Mills 의 감동적인 Key Note Speech 가 있었다.
그의 연설주제도 역시 자유였다.
"한국전은 인류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수많은 전사자들, 부상자들, 포로들이 흘린 성스러운 피는
자유에 지불해야 할 마땅한 대가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응단의 희생을 지불해야 한다."

미국독립전쟁 당시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페트릭 헨리의 외침과 유사했다.

식이 끝나고
지역 한국전 참전용사조직(no #313) 회장인 Mr. Lewis Ebert,
Key Note Speaker인 Mr. David Mills, 그리고 참석한 나이가 80이 넘은
10여 명의 노병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한국전 당시 나이가 몇 살이었느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17세 18세가 대부분이었다.

"그 나이에 자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자유의 참의미를 알고 있었을까?
"징병제도처럼 그들의 죽음은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인간의 목숨은 우주보다 소중하다고 충고해 줄 현자들이
주위에 없었을까."
"개새끼들! 자기 목숨을 위해 싸우는 거야
비겁한 겁쟁이들이나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헛소리를 지껄인다며 사병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이차대전의 영웅 페튼 장군은 애국자가 아니었을까?"
"지금 나이에도 타국의 자유 수호에 목숨을 내맡길 수 있을까?"

진실은 그 누구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 밖에...

떠나기 전에
"당신들이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베푼 희생에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50-60년대 흘러간 미국팝송들로
여러분들을 위해 한국 카라오키 공연을 갖고 싶습니다.
구체적인 일은 나중에 전화로 상의합시다." 하는 나의 간곡한
의사를 전달하고 헤어졌다.

3

그 지역에서 살고 있는 T 선배가
인파를 헤집고 찾아와 나를 반겼다.
최근에 수북하게 기른 나의 구레나룻 때문에
나를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고 미안함을 표했다.

마침 내 옆에 서있는 한 한국인 K 씨를
학교후배라고 나에게 소개했다.
"열 개 가까운 한국교회들이 있는 이 지역에서
한국인 참석석자들이 겨우 대여섯 명 밖에 없다니? 하고
실망하고 있던 터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내 첫눈에 비친 K 씨는 검소함과 성실함이 몸이 밴 듯 했고
두 눈에서는 비범한 안광이 번뜩거렸다.

"이렇게 어렵게 만난 인연인데 점심식사나 함께 합시다"
K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T 선배의 차를 타고 근처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육개장으로, 두 사람은 월남국수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며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중에
"미국은 기회를 찾아 온 이민자들에게는
낙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같은 사람이 꿈을 실현 시킬 수 있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미국 말고 어느 나라가 있겠습니까. 나는 이 점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라고 미국생활에 대한
만족감을 토로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 돈 천불을
달랑 들고와서 경제적으로 중산층 이상의
지위를 누리는 것에 늘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식사 후 T선배가
"서로 헤어지기 전에 K씨가
운영하고 있는 카워시에 잠간 들려 아이스크림이나 한 컵씩
먹고가자" 며 K씨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럽시다 " K씨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 무척 반기는 눈치다.

내 입이 탁 벌려졌다. 내 두 눈이 의심스러워 지기까지 했다.
눈에 들어오는 건물은 단순한 카워시가 아니었다.
자동차 정비소까지 갖춘 초현대식 12,000 스퀘어 피트 넓이의
거대한 쇼핑센터처럼 느껴졌다.

월마트 백화점, 타겟 백화점, 홈 디포 등 각종 유명
소매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번화가에 위치해 있는 걸로 보아
내 전문적인 판단으로 사업체 가치가 어림잡아 6백만불 정도는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사람 보는 통찰력은 역시 정확했다.
그는 흔히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카워시 내 상점에서 요구르트를 먹은 후 카워시 시설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미국에서 살면서 여태껏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초현대식 시설이고 가장 큰 규모였다.

"이 시설들을 누가 디자인 하고 설치했습니까?
그리고 현대식 시설일수록 고장이 잦은 걸로 알고 있는데
누가 보수 관리를 합니까?" 하고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든 시설을 내가 직접 디자인 하고 설치했습니다.
물론 보수 관리도 내가 직접 하고요" 하고 대답했다.

“에디슨같이 타고난 천재인가?
대학에서 엔지니어링 전공을 한 사람도 아닌데”

"K씨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막노동으로 생활을 의탁했다.
한국의 지연, 학연, 신분의 벽과 차별에 절망을 하고
1973년에 무일푼 단신으로 미국에 이민을 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별별 험한 일들은 다 해보았다.
그런 중에 미국사회는 한국사회와는 달리
열심히 일한 만큼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K씨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성실과 정직, 근면, 그리고
남다른 창의력과 용기였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들만이 잡을 수 있습니다. 나는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리지만 저같이 작은 부자는
자신이 일군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의 고백이 다이아몬드 보다 강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그렇다. 미국은 아직도 기회의 땅임에 틀림없다.
빌 케이트, 스티브 잡스 같은 자들도
억만장자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의 나라가 미국이다. 기회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는
끈기 있는 연금술만 가지고 있으면...

그의 지난 고통과 고난을 능히 상상할 수 있었다.
로마도 만리장성도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K씨의 피와 땀의 뜨거운 열기가 잠시도 쉬지 않고
자동차들을 컨베이어에서 좌악좌악 씻겨내고 있었다.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먼 동쪽 하늘에서 하얀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피어올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인연의 따사한 온기가
가슴 속에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흘러내렸다.

“California Dreaming" 을 다시 틀었다.
" I'd safe and warm if I was in L.A"

"그래, 하늘은 만인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거야.
기회는 태양빛 같은 거지. 그 태양빛은 자유이기도 하고.

그래서 자유와 기회를 막고 억압하는 것은 신성 모독죄지.
하늘이 주는 기회에는 머리와 손발이 달려있지 않지.
따라서 기회는 인간들의 창의력, 성실, 정직, 근면, 노력이
흘린 피와 땀으로 일궈가는 거야.
그것이 바로성공의 연금술이지."




버지니아 숲 속에서
박평일 드림

▲ 박평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