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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가?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6월 9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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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6월 08일 (토) 07:19:04
최종편집 : 2013년 06월 08일 (토) 16:36:30 [조회수 : 4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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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관객 천만 명을 돌파한 최초의 영화는 2003년 12월에 개봉한 <실미도>이고, 두 번째 영화는 2004년 초에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라고 합니다. 두 영화는 모두 분단국가인 우리나라가 실제로 겼었던 비극적 사건을 소재로 만들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애정영화도 오락영화도 아닌 이념적 성격의 영화들이 당대 최고의 흥행작이 되었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두 영화가 갖는 치밀한 구성과 박진감 넘치는 재미도 한몫했겠지만, 이념문제가 아직도 우리에게 뗄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라는 슬픈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이 허전해집니다.


1. 영화 <실미도>

<실미도>는 박정희 정권 때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거의 그대로 재현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968년 1월 21일에 청와대를 습격했던 북한의 124군 부대에 대응하여 중앙정보부와 공군이 합작하여 대북 특수부대인 684 부대를 창설했습니다. 김일성 사살과 주석궁 폭파를 목적으로 설립된 이 부대는 사형수 중에서 선발한 훈련병들을 영종도 근처의 작은 섬 실미도에 가두고 혹독한 훈련을 시켜 피도 눈물도 없는 ‘전투기계들’로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3년여 세월이 흘러 남북관계는 1972년에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평화공존이라는 상생의 방향으로 가닥을 잡습니다. 하여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684 부대의 훈련병들을 몰살시키라는 명령이 중앙정보부로부터 떨어집니다. 교육부대장(안성기 분)은 중앙정보부 고위당국자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하지만 “명령대로 실행하지 않을 경우 교육부대장은 물론 담당 교관들과 조교까지 함께 처분될 수밖에 없다”는 최후통첩에 묻혀버리고 맙니다.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던 훈련병들은 교육부대장과 교관들의 갈등을 통해 사태의 전모를 눈치채고 한 발 앞서 움직입니다. 거사 당일 기간병을 모조리 사살하고 실미도를 무력으로 장악한 훈련병들은 섬을 빠져나와 버스를 탈취하고 승객들을 인질로 잡은 채 청와대를 향해 진격합니다. 몇 개의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훈련병들은 결국 겹겹이 둘러싸인 포위망을 뚫지 못한 채 인질을 모두 풀어주고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하고 맙니다.

<실미도>는 전쟁, 인권, 평화, 통일, 남북관계 등 우리가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될 골치 아픈 역사적 숙제들을 잔뜩 던져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10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풀지 못한 채 한반도의 위기로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무겁고 어두운 주제였지만 관객들을 꼼짝 못하고 영화 속으로 빨려들게 하는 마력을 가진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2.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가 상영되고 관객 천만 명을 돌파하는 상종가를 친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한편의 괜찮은 한국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입니다.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이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많았던 저는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호감을 갖지 못했지만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라는 소문에 결국 지인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영화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인공기를 휘날리는 장면도 없었던 것 같고, 굳이 깃발이 휘날리는 장면을 찾는다면 ‘깃발부대’의 붉은 깃발과 중국군의 ‘오성홍기’가 휘날리는 장면이 잠깐씩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태극기가 휘날리는 장면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감독이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휘날리긴 뭘 휘날려? 사랑하는 가족 형제 다 죽이고 휘날려서 뭘 하겠다는 거야?”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진태(장동건 분)는 남에서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북에서는 인민영웅이 됩니다. 물불 안 가리고 전장을 누벼 뛰어난 전과를 올린 대가였습니다. 그만큼 진태에게는 죽음을 각오하고 기필코 지켜내야 할 절대적인 이념(?)이 있었습니다. 연약하지만 똑똑한 동생 진석으로 하여금 반듯한 대학을 나오게 하고, 홀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행복한 미래를 가꿔갈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주는 것,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그의 이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진태에게 있어서 전투를 하는 유일한 목적은 혁혁한 전과를 올려 그 공으로 동생 진석을 제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진태는 전쟁을 일으켜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게 만들고, 그토록 사랑스럽고 소중한 동생 진석(원빈 분)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은 ‘빨갱이’들을 향해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그저 보리쌀 두되를 얻기 위해 별 생각 없이 가입한 것뿐인데) 약혼녀가 우익 청년들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보고, 또 그 과정에서 벌어진 시비로 동생 진석까지 공산당 끄나풀로 오인 받아 불에 타 죽은 것으로 오인하고, 진태의 분노는 국방군에게 돌려집니다. 인민군으로 전향하여 소좌가 되고 혁혁한 전과를 올린 진태는 마침내 인민영웅 칭호를 받게 됩니다.

한편 진태의 소식을 들은 진석은 형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인민군 포로가 됩니다. 하지만 동생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진태는 동생의 소식을 외면한 채 국방군에 대한 증오로 눈이 먼 잔인한 살인귀로 전장을 누비고 다닙니다. 마침내 형제는 육박전이 벌어지는 살육의 현장에서 극적으로 만납니다. 진태의 눈에 그토록 사랑스러운 동생 진석이 나타났지만 형은 동생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국방군복을 입고 있는 진석을 보자마자 진태는 “죽어!”라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미치광이처럼 공격을 퍼붓습니다. 진석 역시 그냥 맞아죽을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총검을 휘두릅니다. 두 형제의 처절한 육박전이 한동안 계속됩니다. 전쟁이란 게 그렇습니다. 그토록 여리고 약했던 진석도 어느덧 형 못지않은 전투쟁이로 변했습니다.

“형! 정신 차려, 제발... 우리, 엄마한테 가야 되잖아...” 혈투를 벌이면서 진석이 절규합니다. 마침내 제 정신을 찾은 진태는 “혼자서는 갈 수 없다”고 버티는 사랑스런 동생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설득하여 후퇴하는 국방군 진영으로 돌려보냅니다. 이윽고 진태는 조금 전까지의 전우였던 인민군을 향해 다발총을 난사하여 동생의 후퇴를 도와주고 전사합니다.

‘진태’라는 인물을 통해 강제규 감독은, 그리고 작가는, 인민군과 국방군, 남과 북, 이 모든 상극의 세계를 마음대로 넘나듭니다. 국방군에서 태극무공훈장까지 받았으면 절대로 절대로 전향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이라는 기막힌 사건 앞에서 진태는 그 훈장과 명예, 그리고 반공이라는 이념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렸습니다.

인민군으로 전향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인민영웅 칭호까지 받았으면 절대로 절대로 변절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념이란 것이 그토록 무섭고 질긴 것으로 (적어도 50~60년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진태는, 아니 강제규 감독은, 그토록 사랑하는 가족과 형제를 파멸시킨 미친 세상에서 변절이니 전향이니 하는 단어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비웃는 것 같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1989년 봄,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아직도 살아있긴 하지만) 그 어두운 시대에, 기어코 북녁 땅을 다녀오겠다고, 형제와 끌어안고 사랑노래를 부르겠다고, 온 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며, 결국 분단을 넘어섰던, 고 문익환 목사님을 떠올린 사람이 저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3. 전쟁의 하나님과 평화의 하나님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상영되기 2~3년 전인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중심부인 뉴욕에서 비행기를 이용한 자살테러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의 부와 힘을 상징하듯 거대한 자태를 뽐내며 우뚝 서있던 쌍둥이빌딩을 민간항공기로 돌진하여 폭파시킨 이 사건은 전 세계의 넋을 빼앗아 놓았습니다.

사건 후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리스트들은 반드시 응징되어야 한다며 즉각 ‘거룩한 전쟁’을 선포했고, 미국과 한국의 보수 개신교 목사들이 앞을 다투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는 등의 호전적인 제목의 설교를 쏟아냈습니다. 백악관에서 하루 일과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친다는 미국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하는 그들의 설교는 확신으로 가득 찼고 국경을 초월하여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당시 설교자들이 주로 인용한 성서 구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사무엘상 17장 47절)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시편 24편 8절, 이상 개역성경)

위의 두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존경해마지 않는다는 다윗의 고백으로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자는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울 때 그의 압도적인 무력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당당하게 맞서 외친 말입니다. 과연 그의 믿음대로 다윗은 골리앗을 물맷돌로 거꾸러뜨렸습니다. 평생을 이웃국가와의 전쟁으로 보낸 다윗은 시편에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고백하며 찬양했습니다.

이 본문들이 다윗의 실제 고백인지를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왕의 실존과 성서에 기록된 그의 언행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가 인식한 하나님이 삼천년 전의 원시신관에 철저히 머물러 있었다는 점은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편에 서서 몸소 싸우는 신, 적을 모조리 잡아들여 자기가 돌보는 민족에게 넘겨주는 신은 당시 팽배해있던 종족수호신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비호를 받아 평생에 걸쳐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승전을 기록하고 이스라엘을 당시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다윗은 마침내 자신의 수호신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가 이렇게 호전적인 성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함께 반영하고 있기에, 기독교는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가진 난해한 종교로 우리 교우님들 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갈등과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다음 구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입니다.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장 4절, 공동번역)

이사야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내다보며 전쟁이 영원히 사라진 지구마을의 평화를 꿈꾸었습니다. 왕과 사제들과는 대척점에 서서 가난하고 억눌린 백성에게 희망과 위로를 선포한 고독한 예언자는 다윗이 고백한 강하고 능하신 전쟁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평화의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4. 기독교의 두 얼굴

이렇게 성서는 매우 다른 두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이점을 애써 부인하며 성서의 일체성과 완전성을 주장하는 보수 해석자들은 평화의 도래를 위한 중간 단계로 어쩔 수 없는 전쟁의 시기가 있노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평화의 도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전쟁’을 선택하는 전능자의 전투방식은 여전히 잔인하고 유치하며 편협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성서에 나타납니다.

우리 기독교성서가 두 얼굴을 갖고 있다는 점은 그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완벽하고 논리 정연한 책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겪어왔던 치열한 삶의 현장과 갈등, 또한 그들의 어리고 유치하며 이기적인 시각까지 너무나도 솔직하게 담아냈기에, 그들의 한계와 욕심, 앞과 뒤가 다른 오류와 혼란도 뒤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가진 오류와 한계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성서를 그냥 하늘에서 주신 완전한 경전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 모순과 어린 시각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삼천 년 전의 원시신관에 그대로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오랜 옛날 다윗이, 또한 성서기자가 이해했던 원시신관을 그대로 갖고 살아가는 21세기의 현대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놀랍고도 슬픈 일입니다.

따뜻한 5월 가정의 달이 지나고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6월로 들어섰습니다. 현충일(6일)과 한국전쟁 발발일(25일)이 함께 들어 있어 그런 별명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이 한 달 동안 전쟁의 기억을 상기하며 “그 날을 잊지 말자.”고 외치는 호전적인 설교가 소위 복음주의교회를 자처하는 한국 교회 강단에 쏟아질 것입니다. 성서를 어떻게 읽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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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6-11 10:52:05
구약의 전쟁에 능한 신에 대하여
구약은 유대인들의 역사, 문학, 문화, 법률 등을 망라한 서적들의 역음입니다.
이 구약에서는 '전쟁에 능한 신' 여호와를 찬양하고 강조합니다.

그럼 '전쟁에 능한 신'은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요?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 남아 보려는 집념으로
믿을만한 구석(여호와)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믿을만한 구석을 의지하여 모두가 단결하게 하고
주위의 적들과 싸워 이기도록 유대인들이 만들어 낸 유대인들의 신에 대한 신화입니다.

신화란 말 그대로 신에 대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신이라면 물리적인 전쟁에 관심이 없어야 합니다.
전쟁은 신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는 것이며 인간들의 전유물입니다.
신이 만약 전쟁을 즐겨한다면 그 신은 미치광이 신입니다.
히틀러만도 못한 그런 신은 우리가 섬길 이유가 없습니다.

언젠가 이사야님이 이런 말을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자이다 라고요.
이는 구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스스로를 밝히시는 말씀이었지요.
I am...


스스로 창세전부터 이미 계셨고 범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유대인들은 그들의 민족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전쟁에 능한 신'으로 졸렬하게 그려 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생존을 위하여 어쩔수 없이 폭력적인 신이 필요하였던 것이었지요.

범우주적 하나님은 아래 어느 분의 말처럼 검을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주려고 하는 그런 옹졸한 분이 결코 아닙니다.
댓글을 쓴 다른 분들을 두고 '성경도 이해 못하는 사람' 이라고
감히 단정해 버리는 자기도취 어린아이 신앙을 넘지 못하는 한계를 봅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고 사랑이십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진리와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하나님을 하나님 본질이라고 믿고 신앙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쟁에 능한 신은 없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을 물리적 전쟁에 능한 신으로 받아 드려서는 아니됩니다.
'전쟁에 능한 신'은 (영적전쟁에 능한 신)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내 안에 있는 죄와 나의 기질과의 영적싸움에 포커스를 맞추고
그러한 내면적 영적전쟁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십사하고 끊임없이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귀있는 자는 들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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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박평일 (72.196.234.24)
2013-06-11 14:28:52
구약에 관한 한 모슬람신도들처럼 철저한 근본주의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 다음이 유태교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중동에 이 천년 이상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보다 훨씬 더 한 사람들이 한국의 일부
근본주위 신앙인들입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된 120 년 이전의 우리 조상들은 모두 지옥에서 살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 그들이 신봉하고 있는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죽음으로 보여주신
사랑과 화해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증오와 복수의 유태인 하나님입니다.
진리 안에 자유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율법 안에 구속과
노예의 하나님입니다.

그런 근본주의 신앙인들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 분쟁과 싸움이 뒷따릅니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역사책을 뒤적일 필요도 없습니다.

당당뉴스에 보도된 기독교단체들의 싸움판을
보시면 됩니다.
그 것이 바로 성경일자일획을 그대로 믿고 있는
근본주의 신앙인들의 참모습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자신 밖에 참신앙인이 없다고 믿고 있는
자칭 의인들은,

그들이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 성경지식, 신학지식이
부족해서 그렇다. 성경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 성령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 ... 고 주장을 할 것입니다.

그런 과대망상증 환자들은 미국 정신병원에 가면
쉽게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퍼온 성경구절 몇 마디를 지껄이며
자기자신이 예수, 모세, 엘리야, 배드로 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나폴레온 기사를 읽고 나서
자기자신이 황제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
빌게이트 자서전을 읽고
자기자신이 빌리언 에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
하바드 대 일일관광을 하고 나서
자기자신이 하바드 대 박사학위 소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자기글에 자신 콤퓨터로 수십번씩 예스 버튼 을 눌러 놓고
자기자신이 베스트 샐러 작가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
별별 정신병자들이 다 있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 있습니다.

자신이 황제라고 믿고 있는 환자가
삼년간 정신병치료를 받고 퇴원수속을 밟고 있었습니다.

담당의사가

"이제 집에 돌아 가셔서 편히 쉬십시요"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정신병자가
"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내가 사는 곳은
집이라고 부르지 않고 궁전이라고 부릅니다" 하고
마구 화를 냈습니다. 고맙습니다.
리플달기
1 0
이사야 (121.129.19.205)
2013-06-11 07:56:30
류 목사님 글 잘읽었습니다
이스라엘의하나님 다윗의 하나님.....한마디로 웃기는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전면에 내세우며 지금21세기에 이르러서도
그범죄 행위를 계속하고있습니다...그들만의 하나님이라는결론입니다

전 인류와 우주적인 하느님.그런 하느님을 믿는다는자들이 만들어내야합니다

왜 이스라엘은 핵을 갖고있는것이 당연하고 북한이 핵을 갖고있으면 안돼는지...미국넘들과 남한 당국자와 일본 넘들에게 묻고싶습니다...신뢰를 할수없는 것들이
리플달기
2 0
Philip Im (70.62.49.64)
2013-06-11 07:52:08
'검'을 주러 왔노라
많은 경우 목회자들이 저지르는 잘못된 일과
그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비판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아전인수격인 해석과 적용이다.

가장 많은 것이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를 가리켜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하여 잘못해서는 안되며
그럴 경우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해석이다.

이와 비슷하게 제대로 성경적인 지식도 없이
동양적인 선문답에 젖어
'자기 소견에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전자에 대하여는 비판하면서도
후자에 대하여는 침묵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 말씀에서 '검'이란 무엇인가?
나의 욕심을 잘라내는 좋은 도구로서의 검을 가리키는가?
앞뒤 문맥을 잘라내고
'검'이라는 단어 하나만 붙들고서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대로 듣기 좋은(?) 해석을 하면 괜찮은가?

분명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지 않았고
'세상'에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많은 이들이 '사랑'의 예수님, '화평'의 예수님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검'이란 다른 의미일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검'은 분쟁의 의미를 드러낸다.
35절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그렇다고 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해야 바른가?
이 또한 잘못 해석하는 경우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그나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예수님께서 모순되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간단히 말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다는 뜻이다.
대적자들이 검(핍박)을 든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검을 주신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이런 경우
어떤 이는 왜 저들을 자극시켜 검을 들게 만들었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가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데 대하여 부끄러워할망정
복음 전하다 핍박받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혹 이 해석에 마음에 분노를 가지고 핍박의 말을 쏟는다면?
리플달기
0 5
박평일 (72.196.234.24)
2013-06-09 20:58:13
분명히 인류의 역사 속에 나타난
종교로써 기독교는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모습과는
무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용서,화해,평화였습니다.

하나님의 두 얼굴 중 다른 한 얼굴은
정치, 교회,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이
그려낸 하나님의 가짜 얼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합리화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욕심많은 증오의 하나님로
그려왔습니다.
종교전쟁은 하나님을 위한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앞세운 정치권력, 종교권력 간에 일어난
전쟁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촛대를 훔쳤다는 강도들,

기독교세력을 보호하고 늘이기 위해서
전쟁이 필요하다는 호전주의자들,

교회의 숫적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온갖 불법을 합리화시키는 교회맹신자들...

그 모두, 하나님이나 예수님과는 무관합니다.
하나님을 자신들의 거짓과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이천년 전 한 이스라엘 목동이 천사로 부터 들었던
" 땅에는 평화, 하늘에는 영광" 이라는
예수님 탄생목적에 대한 노래를 액면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는
말씀도 액면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는 상호 모순된 의미가
아닙니다.

사랑은 목적이고 검은 수단입니다.

이 땅에 예수님의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검을 필요합니다.
그 검은
너를, 세상을 겨누는 증오와 비난의 검이
아닙니다.

나와 내 자신의 이고, 탐욕을 향한
자기성찰과 회개의 검입니다.

그 검이 자기 자신을 향할 때
사랑과 평화의 검이 됩니다.

그 검이 너를 향할 때
증오와 전쟁의 검으로 변해버립니다.

오늘날 세상에 비친 우리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자신들 속에는 사랑도, 의로움도 없으면서
남을 정죄하고 비난함으로써 자신들의 사랑과 의로움을
증명하려는 위선자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자기 정의와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깊이 생각해 봅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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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6-11 06:08:52
구구절절 옳은 말씀만을 적어 올려 주셨습니다.

촛불을 훔쳐 성경을 읽는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던지 결과만 선하면 옳은가?

이기고 보자는 이기심
이기면 하나님은 내편이 된다는 착각
이기고 나면 패자를 다스릴 수있겠다는 망상
이기고 나면 여호와에게 '전쟁에 능한 신'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는 자기도취

이러한 생각들이 유대 선민사상의 원초적 발상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와 비를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비추시고 내리시는 줄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신은 자기들에게만 부와 축복과 영생을 준다고 믿는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
이러한 근본주의 기독교가 단 한사람이라도 바르게 과연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내재하고나 있을까요?

기라성 같았던 그리고 카리스마가 넘쳐나던 많은 한국의 대표적 목사들이 범죄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신앙의 모델격이셨던 조모 목사님도 배임과 회령으로 걸려들었지요.

이러한 현상을 그들의 개인적 부족함으로 간단하게 여겨 버리며 또 그렇게 슬그머니 넘어가야 하는것인지..
또 다시 그냥.. 그 사람들의 개인적인 불찰과 실수로 여기고 넘어가야 하는 것인지..

이제 우리는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주여, 당신은 왜 악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변명이라도 좀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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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6-12 00:44:18
기라성 같았던 그리고 카리스마가 넘쳐나던 많은 한국의 대표적 목사들이 범죄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신앙의 모델격이셨던 조모 목사님도 배임과 회령으로 걸려들었지요.

그런분들이 바로 검을 자신의 성찰이 아니라
남에게 휘두르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의 가정생활을 들여다 보십시요.
부인과 자녀들이 모두 갈라져 있습니다.

기회가 있으시면 근본주의 신앙인들의 가족들은
은밀히 불러내어 그분들에 대한 솔직한 견해를
물어 보십시요.

99 % 는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들을 진심으로 존경하지도 않고
부인들은 남편들 진심으로 신뢰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자기자신도 사랑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시간만 있으면
인테넷을 검색해서 남를 정죄하고 비판할
자료를 수집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죄의식을 숨기고 정당화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남을 공격합니다. 그들은 공격이
최상의 방어책이라는 병법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한 한편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된 모습이 들어날까 해서
하루 24 시간 불안과 부려움에 떨며
안절부절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들이 주장하는 폭력적인 복음입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의로워서 핍박을 받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분들의 행위가 눈에 띄게 거짓스럽고 위선적이어서
이웃으로 부터 배척과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향해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고
소리치다가 하늘의 응답이 없으면 목소리가 작아서
그렇다고 목청를 높혀 갑니다.

그들은 물위를 걷게해 달라고 기도를 해서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금식기도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주위에서 겸험해 온 근본주의신앙인들의
실상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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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7.210.3.147)
2013-06-11 05:33:08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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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8.59)
2013-06-10 10:58:02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인류는 벌써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라는 말은
돈신에 빠져있는 적그리스도 세력과 싸우는
성령의 검을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검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검이 아니라 살리는 검입니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의 세상을 만드는 검입니다.

성령이 함께하는 성도들은 이땅의 순례자이며
하나님나라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으로 살기 때문에
자신을 내어줍니다.
초대교인들이 그랬고
천주교의 압제에 순교한 순례하는 교회가 그랬습니다.

천주교의 변신인 지금의 개신교회는 개혁의 대상입니다.

500년전 종교개혁의 주체들은 사제들이었으나
오늘날 한국에서의 종교개혁의 주체들은 성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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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6-10 14:33:16
오늘날 한국에서의 종교개혁의 주체들은
성도가 되어야한다는 주장에 공감합니다.

인류의 역사상 위로부터 시작된 혁명이나 개혁이
성공한 예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적 부패한 체제가 탄생하곤 했지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닭농장을 경영하는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여우가 침범해서 하도 닭들을 잡아먹어서
우수한 개 몇마리를 구입해서 지키게 했지요.
여우로 부터 피해는 줄일 수 있었으나
우리를 넘어가려는 닭을 잡아먹는
개들의 피해가 여우들로 부터 피해보다 더
심했습니다.

고심 끝에 닭들에게 최면을 걸어
스스로 목슴을 지킬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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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6-09 08:28:25
저는요.
폭력적인 하나님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시고 빛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는 폭력적인 신을 미워하고 미워할 것이며, 또 그러한 신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근본주의자를 긍휼히 여깁니다.

그리고, 류목사님의 글 읽으며 그 두편의 영화를 다시보는 것 같아서 무척 감동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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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6-10 03:19:07
저는 폭력적인 신을 미워하고 미워할 것이며,
또 그러한 신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근본주의자를 긍휼히 여깁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어둠도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일부입니다. 사랑과 긍흉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올은 천사의 말, 믿음, 소망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가리소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인터넷에서 쏟아져 나오는 지식적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개는 마음이 불안할 수록 자기자신의
본심을 숨기기 위해서 크게 짖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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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6-09 04:24:11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이 말씀이 삼상17:47에 나와 있다.
'속하다'에 대하여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전쟁의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의지, 뜻)'에 달렸다는 뜻이다.

문제는,
거두절미하고 이 구절만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이다.
곧 평화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쟁을 좋아하는,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또 바르게 해석하더라도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이란 구절 앞에 어떤 내용이 선행되고 있는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가끔 성경에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이 자기들끼리 싸워 이스라엘은 전리품을 거두기만 하기도 하였다.
칼과 창이 필요없었다.
그래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보는가 영의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 해석은 달라진다.
해석이 다르다하여 내 마음대로의 해석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 깨닫게 하신 해석인가가 중요하다.



'원시신관?'
이런 용어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시대에 따라 변하는 사람의 인식을 기준 삼은 것이다.
그러니 저들이 말하는 오늘의 하나님은
내일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뀔는지...
오늘의 신관은 먼 훗날 '원시신관'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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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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